【윤승원 가풍 수필(2)】
부모님 묘비문(墓碑文)
― 부모님 뜻을 잘 받든 장형(尹佶遠)의 효심을 그리워하며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필자의 말
<장형을 그리워하며> 두 번째 이야기는 <부모님 묘비문(墓碑文)>이다. 이 글은 고향인 청양문화원에서 발행하는 《七甲文化》 제3호(1993년)에 수록된 장형의 수필이다.
동생으로서 장형의 수필 옥고에 덧붙여 추가로 다른 설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부모님 비문을 지을 때, 장형은 동생들의 의견도 존중하고 반영해 주었기 때문이다.
장형이 비문(碑文)을 초안했고, 형제 모두가 흡족하게 공감하고 동의했다. 장형은 내게 특별히 부탁했다.
“다른 동생들도 붓글씨는 잘 쓰지만, 부모님 비문 글씨는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막냇동생이 쓰는 게 좋겠어. 붓글씨라면 입상 경력도 있으니까 말이야. 동생의 글씨라면 부모님께서도 좋아하시고 뜻있게 생각하실 거야.”
장형이 부탁하신 대로 먹을 갈아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여 쓴 기억이 난다.
매년 묘제 때마다, 또는 명절 때마다 부모님 산소 성묘하면서 비문을 바라보면 장형의 남다른 효성스러움이 느껴진다.
장형은 부모님 생시에 효자로 소문났다. 부모님의 뜻을 잘 받들어 공부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소망하신 대로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어왔다.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는 조상님 산소를 반듯하게 정비하고, 석물이며 조경수며 선산 관리에 정성을 다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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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문화원 발행 《七甲文化》 제3호(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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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풍 수필(2) : 두 번째 이야기
부모님 묘비문(墓碑文)
윤길원(尹佶遠) 교육자. 향토사학자
어디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 문득 ‘청양(靑陽)’이란 간판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음식점이든, 무슨 상점(商店)이든 가리지 않고 반가움에 겨워 쳐다보고, 또 쳐다본다.
그러다가 여건이 닿으면 반드시 들어가서 고향이 청양 어디이냐? 어떤 연유로 "청양"이란 간판을 걸게 되었느냐? 고 말머리를 꺼내게 된다.
그렇게 말이 오고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향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게 되고, 그러다 보면 한없이 반갑고 친밀감이 도타워져서 흐뭇하다.
어떤 때는 ‘천양’을 ‘청양’으로 잘못 보고 성급히 들어갔다가 무안을 당한 때도 있었다. 그만큼 청양이란 말만 들어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정(情)이 간다.
청양은 내 고향이요, 내 요람이고, 나의 일부분이다. 아니, 나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아직 이때까지 나는 호(號)란 게 없는데 서예의 낙관이나, 책을 선물하게 된 경우라든지 가끔 본명이 아닌 다른 내 이름으로 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내 이름이나 호로 알려져 있진 않지만, 슬그머니 ‘靑陽’이라고 써 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차차 알 만한 사람은 짐작하고 반겨 주기도 한다. 그 얼마나 정겹고 따뜻하고 또 순박하고 싱싱하고 풋풋한 이름인가!
청양이 고향으로 인연을 맺어진 계기는 지금부터 정확하게 400년 전 일이다. 조선 선조 25년(서기 1592년.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다음 해에 나의 12대조(代祖), 성균관 전적 윤준제(成均館 典籍 尹遵悌) 할아버지께서 산 좋고 물 맑은 피난지지(避難之地)인 이 고장 청양으로 낙향하시어, 면려후학(勉勵後學) 하신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후손들이 면면히 이 고장에 뿌리내리고 누대(累代)를 살아오고 있다.
우리 칠원 윤가(漆原 尹家)는 청양 중에서도 남부(定山 · 木 · 靑南 · 長坪 4개 面)에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살아오고 있다.
내가 고향 초등학교에 다니던 50여 년 전, 학급 출석부의 이름을 보면 3분의 2 이상을 尹이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도 尹 선생님이 많으셨던 기억이 새롭게 난다.
동네에서도 일가 아니면 거의 친척 간의 연(緣)이 닿아서 농담도 함부로 하기 거북하고, 또 나이 어린 사람이 아저씨, 대부 뻘이 되는 경우가 있어서 서로 존대하면서 살아가던 기억도 새롭다.
나는 공주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외지에 나가 살게 되었는데, 부모님과 생활의 근거지는 언제나 고향에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자주, 어떤 때는 가끔 고향에를 다녀오는 데, 차(車)를 타려면 10킬로쯤 떨어진 정산(定山)이나 부여(扶餘)까지는 걸어서 다녀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공주까지도 걸었고, 지난해까지도 정산~부여 간의 큰길이 포장되지 않아서 고향 가는 길은 고생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가용 차도 흔해졌고, 포장도 말끔히 되어서 고향 가는 길은 즐거운 길, 경쾌하고 편안한 길이 되어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내 고향 청양(靑陽) 하면 발전이 덜 된 순박한 산골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요 근래 전국적으로 많이 애창되고 있는 <칠갑산>이란 가요가 더욱 그러한 면을 부채질해주고 있는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곳저곳 산과 들을 함부로 파헤치고, 또 공장이나 시멘트 고층건물과 구축물들이 들어서야만 첨단 개발이고 발전이냐? 그게 아니고, 나는 옛 그대로의 고향산천이 그립다.
주민들이 생업이나 생활향상에 직결되는 일이면 몰라도 좀 불편하더라도 함부로 발전이란 명분을 앞세워서 아름답고 정이 어린 내 고향을 다치지 않게, 그리고 볼품없는 곳으로 오염시키는 일이 없었으면 싶은 바람이 간절하다.
나는 누가 뭐래도 앞으로 고향에 돌아가 살다가, 고향에 묻히는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런 꿈을 가지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도 하고 있다.
또 나를 낳아서 길러 주시고, 가르쳐 주신 고마운 부모님은 이미 타계(他界)하셨다. 그러나 그분들의 지난 삶을 조금이라도 선양(宣揚)하고 싶은 것이 자식 된 도리이고, 또 숨길 수 없는 참마음이다.
이런 생각은 다른 누구도 같으리라. 그래서 나의 4형제들과 아들 4형제 모두의 의견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을 지어서 지난해 5월 묘소에 건수(建竪)하였다.
이 묘비문에는 고향 냄새, 흙냄새 그리고 조상님의 삶의 냄새가 깊숙이 스며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같았지만, 표현력이 미흡하여 역불급(力不及)인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누구든지 자기 조상님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 묘비문을 읽어 본다면, 그간 여러 해 동안 계속 방영하고 있는 <전원일기>라는 TV 연속극을 시청하면서 향수에 젖곤 하는 일종의 감회 비슷한 것이 돋아나지 않겠는가 하는 뜻으로 감히 여기에 적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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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묘비문
誠實(성실)하고 儉素(검소)하게 사시었고 부지런히 일하시어 自手成家(자수성가)하시었으며 八十 平生(80평생)을 善良(선량)하게 살아오신 農夫(농부) 내외분이 陽地(양지) 바른 이곳에 고이 잠드시다. 뒤로는 望月山(망월산)과 七甲山(칠갑산)의 精氣(정기)가 흐르고 가까이는 情(정)겨운 가래울, 그리고 저 멀리 바라보이는 長水坪(장수평)과 錦江(금강) 이 고장의 산과 들과 내는 삶의 보금자리요 生活의 터전이셨다. 生時(생시)에 뿌리신 땀방울이 밑거름되고, 고이 심어놓으신 씨앗들은 온 누리에 퍼지고 돋아나서 所望(소망)하셨던 대로 子孫萬代(자손만대)에 榮譽(영예)롭게 꽃피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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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문화원 발행 《七甲文化》 제3호(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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