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진노, 부활과 영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9-10).
본문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할 점은 2번 등장하는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라”(9, 10)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고 2번이나 미래시제(未來時制)로 말씀하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저는 이를 증거하기 위해서 본 문단을 달리 설정한 것입니다.
사도는 5-10절을 통해서 첫째로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하는 점과, 둘째로 과거 우리의 상태와, 현재의 우리 상태를 대조(對照)해서 보여줌으로 우리 구원의 확실성과 안전성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完成)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하고 미래시제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래에 받게 될 구원(救援)은 어떤 구원이며, 이 구원이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인가?
①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 합니다.
㉠ 이 말씀 속에는 “피와, 진노”라는 두 단어가 조화(調和)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그 피”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셔서 흘리신 피, 즉 죽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진노”(震怒)란 역사의 종말(終末)에 임할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 그렇다면 9절의 의미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에 대한 진노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날, 즉 최후심판 때에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자들은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② 사도는 저 출애굽의 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던 심판의 밤에, 문설주와 인방에 피가 뿌려진 이스라엘 집은 안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 죽음의 천사가 심판하기 위해서 문 앞에 당도하였을 때에 대문에 뿌려진 피를 보고는, “이 집은 이미 죽임을 당했구나”, 하고 건너고 넘어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에 의해서 되어진 복음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9절에서 “그 피를 인하여,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한 구원은 이를 의미합니다.
③ 그런데 사도는 그냥 “피를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더욱 그(의롭다함)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하고 말씀합니다.
㉠ 그러면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목적(目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이 끝은 아니잖습니까? 그 뒤에 무엇인가 따라올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결정적(決定的)인 순간을 대비케 하기 위해서 준비시켜 주셨음이 분명합니다.
㉡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반대는,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한 “벌거벗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가림을 받지 않은 벌거벗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震怒)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 12-17)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이날에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9-10)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의 의미입니다.
④ 그러면 10절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어떤 구원인가?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10하) 합니다.
㉠ “화목 된 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다음에 화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화목하였고, 이 다음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한, “구원”은 어떤 구원인가?
㉡ 10절의 “구원은, 살으심”과 결부(結付)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으심”은 주님의 부활(復活)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10절의 구원은, 우리 몸도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화(靈化)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우리의 구원은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⑤ 그러므로 10절에는 짝이 있는데, “원수와 아들, 살으심과 구원”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원수” 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 시켜주셨다면, “더욱” 주님의 “살으심”을 인하여 “우리 죽을 몸도 살려주실”(8:11하), 즉 영화롭게 해주실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 그 아들의 죽으심이 없었다면 의롭다함도, 하나님과의 화목도 불가능한 일이며,
㉯ 또한 그의 살으심이 없으셨다면, 우리의 부활도 영화도 영영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4:25절에서는,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부활이 우리들의 부활에 보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⑥ 그러므로 9절과 10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한 “구원”은, 구원의 완성(完成)과, 구원의 최종(最終)성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 성경이 얼마나 자상하고 예민한가를 보십시오. 6절과 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고 표현을 달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원수와, 그 아들”을 대조(對照)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 그 뿐입니까? 10절에는 “화목”이라는 말이 2번 등장합니다. 원수를 구원하여준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셔서 양자(養子) 곧 자기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 아들의 죽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⑦ 사도가 확증하려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진노를 받으셨다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진노의 날에 구원 얻을 것은 더욱 확실하고, 하나님께서 원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신,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화 될 것도 더욱 확실하다는 말씀입니다.
㉠ 10절 안에는, “원수, 그 아들, 죽으심, 화목 됨”이 있습니다. 이를 도표(圖表)로 나타내면, 앞부분에는 “우리”가 있고, 뒷부분에는 “하나님”이 있는데, 그 두 사이는 “원수”의 관계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아들의 죽으심”이 있습니다. 원수를 위하여 그 아들이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었다” 하고 말씀합니다.
원수
우리---------그 아들의
죽으심--------하나님
화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