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흥미로운 프랑스 소설을 읽은 직후 극장에서 영화 <하녀>를 봤는데,
이 상관없어보이는 두 작품이 묘하게 겹쳐져서 영화를 훨씬 더 재미있고 풍요로운 의미작용을 읽어내면서 보았다.
영화 <하녀>는 칸느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로 일찍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만큼 빨리 호기심과 관심이 식으면서 엇갈린 평가가 내려지는 판국이라 더더욱 보고 싶었다.
전도연과 윤여정의 연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걸리는 부분들이 많긴 하다.
전도연의 캐릭터가 참 묘하다.
나쁜 여자는 분명 아닌데 고맙다는 서우의 말에 웃으며 돌아선 후에 왜 그 묘한 섬뜩한 표정까지 짓는지,
조금은 바보같이 나오는 전체적인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전도연이 맡은 인물은 입체적인 하나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연결이 되지 않는 에피소드로 뚝뚝 끊겨 있어 갑자기 이 대목에서 왜 저러고 있을까 하는 장면들이 꽤 있었다.
왜 갑자기 옷을 벗고 있는지,
불쑥 들어온 이정재를 어쩌면 그토록 쉽게 받아들이는지,
그녀의 입장에서 그 이전에 전혀 그럴 가능성을 조금도 내비추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뜬금없다.
그런데도 난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는데
그건 아마도 그 직전에 읽은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 덕분이 아닌가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소설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영화 <하녀>에서는 주인집에서 복무하되(그러니까 분명히 그 집에 있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아가는 하녀가 등장하고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는 파리의 최고급 아파트의 수위 아줌마가 등장한다.
수위 아줌마는 하녀와 마찬가지로 아파트를 지키는, 아파트의 일부이면서 입주자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면서도
사실은 그 어떤 입주자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거나 소통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파트에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은 부재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아파트를 지키는" 사람들로 생각한다.
그들은 별로 배운 것이 많지 않고, 특별히 고결한 생각도, 독서나 문화생활도 하지 않을 것으로 우린 생각한다.
그들은 1층의 좁은 공간에서 먹고 마시고 졸고 우편물을 돌리고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외의 것(언어라든가 예술, 철학, 인생에 대한 고민)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설사 간혹 그들과 스쳐지나가듯 제법 다정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이내 마음의 철창을 내리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아파트 수위아줌마와 하녀는 닮은 꼴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는 피아노를 치고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며 우리의 존재증명을 친구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다.
아파트를 장식하는 이런 저런 소품들(부자들은 진품일 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복제품)과
거실에 흘러나오는 음악, 내 서가에 꽃힌 책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나를 나타내는 이런 것들은 내가 노동하는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면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예술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생각한다.
그러나 수위 아줌마와 하녀는 노동하는 사람들이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녹초가 되도록 일한다.
우리는 그들의 노동 덕택에 상당한 문화적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건지 모른다.
영화에서 이정재가 자주 멋진 피아노곡을 연주한다든지
무수한 현대의 추상화들로 가득한 그의 집은 이런 것을 나타내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인은 클라식 음악을 들으며 마티스의 화집을 뒤적이고,
부를 독식하려는 듯 남편의 아이를 끝도 없이 나으려 하면서 침대에 누워 시몬 드 보봐르의 <제2의 성>을 읽고 있다.
그들은 결코 노동하지 않고 오로지 고급문화를 배경으로 고급문화가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항변하듯이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의 고급문화는 얼마나 허위적인지.
밀란 쿤데라가 키치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번드르한 외양으로 그 아래 숨겨져 있는 가짜와 추악함을 감추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파리의 고급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이정재의 고급주택의 본질이 아닐까.
이들은 수위아줌마나 하녀와 같은 주변인들을 그들 나름의 잣대로 규정하고
적당한 거리와 형식적인 친절로 지하, 혹은 다락으로 내몬다.
내몰린 주변인들은 음악이나 그림 하나 없는 축축한 혹은 차가운 공간에서 먹고 똥싸고 잠잘 뿐이다.
그러나 그럴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들도 자기 존재증명을 하고 싶어한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 수위아줌마 르네는 철학에서 예술, 문학, 음악, 미술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면서 심오한 수준에서의 독서와 예술적 취향을 향유하며 살아간다.
다만 겉으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흔히 수위에게 요구되는 말투와 표정, 행동거지를 이어갈 뿐.
그러니 사람들도 그렇고 그런 수위아줌마로 그녀를 대할 뿐이다.
일주일에 두 번 차를 같이 마시는 마누엘라라는 파출부 친구가 있긴 하지만
자신의 지적, 정서적 교감을 온전히 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새로 온 일본인 오주씨와 신분의 차이라는 불가능한 벽을 넘어 친구가 되면서 54년 생애 처음으로 행복이란 걸 맛본다.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드러낼 수 있고 그렇게 드러내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이것은 그녀가 아무리 하버마스나 톨스토이나 베르메르와 몇 십년을 뒹굴어도 느낄 수 없었던 직접적인 감정이다.
<하녀>를 보면서 가장 뼈아프게 느껴졌던 장면은
전도연이 수술받던 수술실 바깥을 서성이던 윤여정을 보고 누구냐고 묻는 한 의사에게 다른 의사가
"아, 저 사람, 아무도 아니에요"라고 대답하는 장면!
아무도 아니라니!
주변인들은 그들의 주인의 욕망에 복무하고 그들이 욕망할 때는 욕망의 배출구가 되다가
그 다음 순간 그들의 주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얼굴을 바꿔버리면
원래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전도연의 극단적인 선택은 자신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가 살아갈 수도 있지만
잠시 있었던 자리나 돌아갈 자리가 누군가에는 처음부터,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 어디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자리라고 한다면, 그 사실을 어느 순간 확 깨달았다면,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재미있는 것은 <고슴도치의 우아함>에도 불지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는 점이다.
고급아파트에 살고 있는 천재 소녀 팔로마는
아무도 자신에게 진심으로 귀기울여주지 않는 '너무 잘 나가는' 가족들이 미워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려 한다.
또한 르네는 이민자들의 방화사건을 백인주류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문화를 박탈당한 사람이 선택하는 야수적 자기발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에서의 르네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부조리한 상황을 맞이한다.(책읽으시라고 결말을 언급하지 않겠음)
그녀가 그토록 깊이 사유하던 삶의 부조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황!
르네는 말한다.
우리가 문학이 없다면, 예술이 없다면, 학문이 없다면,
이 비루하고 무료하고 힘든 일상을 어찌 견딜 것인가?
일상을 견디게 할 꽤 괜찮은 것들이 이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르네는 하녀보다는 몇 배 낫다.
남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르네는 자신 스스로를 잘 알고
훨씬 강건하게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건, 말건 별 상관이 없이.
결론은 버킹검!
무슨 일을 하건 자존감을 지닐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의 자존감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정말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축하는 많은 언어와 상징으로 '나는 만들어진다'
지금부터 나를 만들기!!!
어떻게?
?
첫댓글 내가 좋아하는 칭구 라비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마지막장을 방금 덮었는데, 신기하네요. 하녀, 재미없을 것 같아서 안 봤는데, 보고싶어져요.
하녀, 썩 잘 만든 영화라는 느낌이 들진않지만 이 여름에 한번보는 재미도 있을 듯 하네요...물론 고슴도치 책이 더 재미잇을 듯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