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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0 기상.
세면 후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로비에 집합했다 (9:00).
- 단체로 여순감옥을 가기로 하여, 어제 이용하였던 빵차를 다시 대절해 (300위안) 여순감옥으로 향한다.
여순감옥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께서 순국하신 감옥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곳이다.
(*) 여순감옥 :
- 러시아가 1902년에 지은 감옥으로, 러일전쟁 때에는 러시아군의 야전병원과 병영으로 사용되었으며,
일본군이 여순 점령 후부터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 1907년 일본이 확장 증축한 여순감옥의 규모는, 2,000여명을 동시에 수감할 수 있고, 275여개에 달한 여러 형태의 감방과 검신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노역공장으로 구성된 대규모 형무소이다.
- 1945년 8월 일본 패망 후, 소련 군대가 주둔하면서 여순감옥 사용이 중지되었으며, 1971년 감옥을 전시관으로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개관하였다.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하다가, 2009년10월1일부터 전면개방되었다.
- 대부분의 수감자는 정치범과 사상범으로, 중국과 한국, 러시아 등의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안중근의사, 신채호선생, 이회영선생을 비롯하여, 최흥식, 유상근, 손기업, 박민향지사 등이 여순감옥에서
사형되거나 가혹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 1시간을 달린 후에 여순감옥에 도착했다 (10:00).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25위안), 한국어 가이드를 대동해 (100위안) 감옥을 관람한다.
(여순감옥 정문)
- 참관입구를 통과하여 검신실에 들어섰다.
검신실은, 매일 아침 감옥의 노역공장으로 노역하러 갈 때와 저녁에 감방으로 돌아올 때, 수의를 벗기고 온몸 수색을 한 곳이다.
수감자들의 흉기 소지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엄동설한에도 수색은 게속되었다.
붉은색 수의는 투옥된지 얼마 안되는 수감자들의 옷이고, 푸른색 수의는 장기수와 온건한 수감자들의 옷으로 구분하였다.
(참관로 안내도)
(참관 입구)
(가이드가 감옥 건물 모형도를 설명하고 있다)
(검신실 - 앞에 보이는 나무막대 바를 뛰어 건너가야 했다. 우측에 빨간색과 푸른색의 수의가 보인다)
- 안중근의사를 구금했던 감방에 도착했다.
감방 벽면에 안중근의사 설명안내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이같이 4개 국어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안내판은,
여순감옥에서 안의사가 유일하다고 한다.
안의사는 일제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이 감방에 단독으로 구금되었다고 적혀 있다.
감방 안을 살펴보니, 조그만 나무책상과 의자, 침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안의사를 특별히 관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의사가 구금되었던 감방 - 옆에 간수부장 당직실이 있다)
(감방 벽면에 부착된 안의사 설명안내판)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 감방 내부)
- 암뢰(暗牢)라고 하는 독방을 둘러본다.
2.4평방미터 크기의 감방으로, 반항적이거나 감옥규율을 위반한 수감자를 가두었으며, 캄캄해서 손을 뻗으면
다섯손가락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독방 - 간수가 감시하기 위한 원형구멍이 하나 있다)
(감방 안에 있는 손잡이가 달린 물통과 변기통)
- 수감자들에게 사용했던 여러 도구들을 둘러본 후에, 고문실을 살펴본다.
수감자를 고문할 때 썼던 끔찍한 고문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닥에 설치한 십자가 형태의 나무판에 수감자를 눕혀놓고, 납을 매단 대나무로 피부가 벗겨지고 속살이 찢어질 때까지
때렸다고 하며, 납의 독이 온몸에 퍼지는 악독한 고문이었다고 한다.
(수감자를 거리로 압송할 때는, 대나무로 만든 통모자를 씌워 서로를 알아볼 수 없도록 하였다)
(수감자 다리에 채웠던 발목굴레와 쇠뭉치)
(수감자 밥공기 - 크기가 다른 7가지가 있다)
(고문실 - 여러 고문용 기구들이 있다)
- 세 방향에 있는 감방을 동시에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된 간수대에 서본다.
이 설계방식은 러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배운 방식으로, 이후 일제가 도입해 일본의 형무소에 설치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에도 이런 형태의 간수대를 만들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이다.
(가이드가 간수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간수대에 서면, 세 방향에 있는 감방을 모두 감시할 수 있다)
- 교화실에 들어가본다.
종교행사 등을 통해 수감자들을 교화시킨다고 하는 이곳에는, 일본군이 수감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신사가 놓여있다.
(교화실에 설치해놓은 신사)
- 단재 신채호선생과 우당 이회영선생이 구금되었던 감방 벽면에 게시된 안내판을 읽어본다.
(신채호선생이 구금되었던 감방에 게시된 안내판)
(이회영선생이 구금되었던 감방에 게시된 안내판)
(감방에 수감되어 있는 수감자 번호표 - 일반 감방에는 보통 7~8명이 수감되었다고 한다)
(감방 복도 - 아래층에 있는 감방을 감시할 수 있도록, 바닥에 철망이 설치되어 있다)
- 감방들을 둘러본 후, 강제노역공장 중 하나인 인쇄공장에 들렀다.
일제는 침략전쟁에 사용되는, 군복, 신발, 인쇄, 기계, 철공, 목공 등 15개 공장을 감옥에 설치하고, 수감자들에게
하루에 10시간이 넘는 강제노역을 실시하여 군수품을 생산조달했다.
(노역공장 중 하나인 인쇄공장 - 당시 사용한 인쇄기와 자판이 전시되어 있다)
- 감방 건물을 나오니, 감옥의 서쪽 감방과 중앙 감방 건물 사이 뒷쪽에 있는 삼각구역이라고 하는 곳이 나타난다.
삼각구역은 수감자들의 운동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운동을 하는 기회를 이용해,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위로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삼각구역)
- 의무실을 둘러본다.
말이 좋아 의무실이지, 이곳에서 죽어나간 수감자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의무실 건물)
(의무실 건물에 있는, 시체 임시안치소)
- 감옥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1934년에 신설했다는 사형장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교수형이 집행된 시신을 조그만 나무통에 넣어서, 감옥 뒷동산의 묘지에 묻었다고 한다.
(사형장 건물)
(사형집행실)
(시체통 - 처형된 사람의 몸이 굳어지기 전에, 조그만 나무통에 쑤셔넣었다고 한다. 해방후, 뒷동산의 감옥묘지에서 발굴한 것이다)
(사형집행 대기실 - 처형자가 많을 경우, 이곳에 임시 가두어놓고 사형집행 대기를 시켰다)
(2칸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형집행 대기실 내부)
- 추가입장료(20위안)를 내고 특별전시실에 들어가본다.
(특별전시실 안내판)
(특별전시실 내부)
(안중근의사 흉상)
(*) 안중근 (1879~1910) : 한말의 교육가, 의병장, 의사
-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1909년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 1909년11월3일 여순감옥에 투옥되어, 이듬해인 1910년2월14일 일본 관동지방법원의 6차례 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3월26일 형이 집행되어, 여순감옥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신채호선생 흉상)
(*) 신채호 (1880~1936) : 독립운동가, 역사가, 언론인
- 일제강점기의 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활약하며, 역사논문 및 민족영웅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전력하였다.
- 1928년5월 독립운동자금 조달차 대만으로 가던 중, 기륭항에서 체포되어 1930년4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여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2월21일 병으로 옥사, 순국하였다.
(이회영선생 흉상)
(*) 이회영 (1867~1932) : 독립운동가
- 엄청난 재산을 처분해 독립군 후진양성에 투자한 독립운동가로, 전 식솔을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왔다.
- 1932년 만주의 지하공작망 조직, 주만 일본군사령관 암살 등을 목적으로 천진에서 대련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여순감옥에서 고문 끝에 옥사했다.
(최흥식, 유상근지사 흉상)
- 특별전시실 관람을 마친 후에, 안중근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장소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안의사께서 어머니와 부인, 조국의 국민들에게 남긴 유언이 게시되어 있다.
(안중근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장소)
- 안중근의사가 조국의 국민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조국이 해방되면 자신의 시신을 조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 1945년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선생은, 순국한 독립운동가인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인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와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으며, 안중근의사를 위해서는 가묘를 만들어두었다 (사의사 묘역).
(효창공원에 조성된 '사의사 묘역' - 비석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가묘가, 안중근의사의 유해를 모실 곳이다.
/ 사진제공 : 인터넷 자료)
- 여순감옥에서 사형당한 안의사의 시신은 감옥의 죄수묘역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는 뒤에 안의사 시신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유골을 현재까지 못찾고 있다.
2008년 남북한정부는 안중근의사 유해 공동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를 찾지 못했다.
2011년 출범한 비정부민간단체인 '안중근 뼈대찾기 사업회'는, 여순감옥 구지 묘지를 유해매장지로 추정하며,
해당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의뢰하고 있는 상황이다.
- 안중근의사께서 남긴 유묵을 모아놓은 서예관에 들어선다.
안의사는 옥중에서도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고, 서예도 뛰어나 감옥에서 휘호한 유묵을 많이 남겼다.
(안중근의사 옥중 서예관)
- 한국어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과 질의, 답변을 주고 받으면서, 1시간 30분 동안 감옥을 관람하였다.
가이드가 한국관광객임을 감안하여 안내해준 코스인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항일 독립투사들, 특히 안중근의사의
특별전시관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관련자료를 잘 비치해놓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유적지라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
(추가입장료를 내고 관람한 특별전시실 안에는, 한국광복회의 후원으로 전시가 이루어졌다는 안내문이 있다.)
- 감옥을 둘러보며 여러 상념에 잠겼던 회원들의 표정이 착잡해보이고, 대기중인 빵차로 향하는 발걸음 또한 무거워보인다.
- 여순감옥을 출발해서,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어제 아침에 들렀던 '태능갈비'에 도착했다 (12:30).
갈비탕으로 식사를 마친 후에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 1:30).
- 호텔에 맡겨둔 배낭을 찾아, 몇분의 회원과 페리터미날까지 걸어서 가기로 한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 지도를 보기도 하고 길가는 현지인들에게 묻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역시 이렇게 배낭을 메고 걸어가야, 배낭여행의 참맛을 느껴보는 게 아니겠는가 ?"라는 말을 주고 받으면서.
(페리터미날이 가까운 거리 풍경)
- 30여분 정도 걸은 후에 페리터미날에 도착했다 (오후 2:00).
여러 회원께서 터미날 부근에 있는 가게에서 참깨 등 농산물을 구입한다.
(대련항 터미날)
(비닐테이프로, 구입한 캔맥주 박스에 손잡이를 만들고 있는 대장님 - 많이 해보신 숙달된 솜씨다)
(2층 대합실에서 승선 대기중)
- 승선을 마친 후 (오후 3:00), 침대에 짐을 내려놓고서 배 갑판에 나가 대련항 주위 풍경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배가 출항하기 시작한다 (오후 4:00).
(갑판에서 바라본 대련항 주변 풍경)
- 식당 옆 휴게장소에 본부석을 마련하고, 잔뜩 구입해온 캔맥주와 안주를 펼쳐놓고서 술자리가 벌어진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술파티 / 사진제공 : 파인트리님)
- 얼마후에 재미있는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다.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고자, 맥주 한 박스를 차가운 선실 밖으로 내어놓았던 정유진님이, 맥주를 가지러 나갔더니
없어졌다고 하더니만, 맥주를 찾아오겠다고 하며 자리를 떠난다.
얼마후에 땀을 흘리며 돌아오더니, 모든 선실을 살펴보았으나 맥주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맥주 회수작전을 위한 회의가 진행된다.
대장님께서는, 맥주는 많이 구입해왔으니 찾는 걸 포기하자고 한다.
그러나 회원들께서는, "먼 소리여, 피같은 맥주인디. 배를 다 뒤져서라도 찾아야제."라고 하며, 여러 아이디어가
난무한다.
범인은 사건현장에 반드시 다시 온다는 범죄심리학을 이용한 방법이라며, 또다시 맥주 한 박스를 선실 밖에 내놓은 후에,
누가 가져가는지 살피고 있다가 범인을 잡자는 의견이 나온다.
여러 의견이 오간 후에, 맥주 상자에 경고문을 써서 선실 밖에 내놓기로 한다.
젊잖은 표현을 쓸 것인가, 험악한 표현을 쓸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후자쪽의 경고문을 써서 선실 밖에 내놓았다.
(험악한 표현의 경고문)
- 한 회원께서 방송을 부탁하겠다고 자리를 뜨더니, 얼마후에 돌아와서 이야기한다.
프런트에 있는 직원에게 방송 부탁을 하였으며, 방송 후에도 맥주상자가 원위치에 돌아와 있지 않으면, 선장을 면담하겠노라고
하였다고 한다.
몇분후에 선내에 방송이 울려퍼진다.
"승객 여러분, 선실 밖에서 맥주 한 상자를 습득하신 분께서는, 속히 제자리에 갖다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선실 밖에서 맥주 한 상자를........"
- 선실 밖을 살피고 있던 회원께서, 방송이 나간지 얼마후에 분실한 맥주 한 상자를 찾아서 들어온다.
"야, 방송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아니지, 찾지못하면 선장을 면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지."라는 말들을 주고 받으며, 회원들께서는
포복절도할만큼 웃었다.
(인권을 존중하여, 누가 범인이었는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 면세점에서 술과 담배를 구입하고,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저녁식사를 한 후에, 다시 본부석에 합류하였다.
- 밤 9시경에 접어들자, 여행기간 내내 술자리를 즐겼던 주류파들께서, 한 분, 두 분 침실로 돌아간다.
결국, 눈을 껌벅거리며 피곤해하던 대장님마저 자리를 뜨더니 돌아오지 않는다.
본부석에 남아있던 비주류회원들께서, "아니, 주류파의 정예 본부요원들은 다 어디로 가고, 예비군과 민방위대원들만
남아서 본부를 지키고 있네"라고 하며 웃는다.
하기야, 매일밤마다 그토록 술파티를 하였으니, 어찌 피곤하지 않을손가?..
- 주류파들께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리를 파한 후에, 갑판에 나가 캄캄한 밤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바람을 쐬다가,
침실로 돌아와 자리에 눕는다 (밤 10:00).
(갑판에서 바라본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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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여순감옥은 관광지라기 보다, 가슴 뭉클한 아픔의 역사를 풀어 놓은 자리였지요... 귀국시 쿠르즈 선내에서 발생한 맥주사건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 들이 이번 여행, KC 여행의 특징이 아닐까요~
분실한 맥주를 찾게된 일등공신 중 한 분은 선배님이 아닐까 합니다.. ^^
여순감옥 여행기와 관련된 황당한(?) 에피소드 2가지. (실제상황입니다 / 인터넷 자료)
(1) 여순감옥의 끔찍했던 현장을 관람하고 나온, 한 아주머니 여행객이 옆사람에게 소감을 말한다.
- "죄 짓고 살지 말아야지" ... ㅜㅜ
(2)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를 보던 사람이, 여순감옥편을 읽고나서 댓글을 올렸다.
- "감옥에는 왜 갔노?" ... ㅠㅠ
?백두산 자유여행 2박3일 100만 일인당입니다..
포함사항: 밀착가이드 (조선족 한족 초이스가능)
투숙 호텔 :4 성급
여행: 백두산여행?,윤동주생가,도문(조중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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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 및 문의 :
메일 : ybguide@hotmail.com
메신저 :ybguide@hotmail.com
전화: 86)136 5443 8710 김승무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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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고 여행하면 시간을 많이 빼앗깁니다,차라리 비행기로 중국여행은 하세요,배 비추 비행기 강추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