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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처럼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詩>
아버지가 살아 계셨어도 아흔이다. 요즘 100세 시대인데... 아버지는 여전히 자녀들에게 44세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벼랑끝만 남긴 줄 알았다. 2015년 11.8일 증조모(김계춘), 증조부(강명성), 아버지(강응준)를 어승생 납골묘에 모시게 되었다. 증조모는 둘째 아들(강두규 할아버지) 부자와 같이 생활하다 둘째(강두규)가 죽자 홀로 남은 손자(아버지)를 첫째아들(강두병)에게 양자로 보내셨다. 그래서 제대로 된 생년월일은 어머님이 1931년생으로 세살 터울이라고 하시니 아마도 1928년3월4일생이고 할아버지는 10년이 늦은 1936.8.12일 34세의 나이로 돌아가신게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야 아버님이 9세때 조부(강두규)께서 돌아가신 것이 되고 초등학교 3학년 중퇴라고 했으니 그 때쯤 큰 숙부에게 입양 후 월사금이 끊겨서 학교를 못다니게 된 사유도 맞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제주시 도두리 752번지에 출생해서 그 자녀들의 본적지도 그렇게 되어 있다. 지금 납골묘에 모신 증조부(강명성)는 뱃일을 크게 해서 돈을 많이 벌고 땅도 많이 가지신 분이었다. 조부(강두규)몫으로 한길땅, 내창땅, 비행장 땅 이렇게 3개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조부는 몸이 허약해 농사도 간신히 하면서 세월을 보낸것으로 추측된다. 몸이 약한 남편이 미덥지 않은 조모(성할머니)는 아버지가 3세때 집을 나가버리고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갔다. 실은 고부갈등이 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모든일에 서툰 며느리(성할머니)는 날로 심해지는 시어머니의 타박이 싫어서 집을 나갔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조모는 아들집을 못잊어 남문통 우리집으로 살림하러 들어오셨는데 오신 첫날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네 이년! 네가 무슨 낮짝으로 이 집에 들어왔느냐. 당장 나가거라"하셨다 한다. 재가 후 세월이 쉽지 않았던지 조모(내게는 성할머니)는 수시로 머리가 아프다며 담배를 즐겨피우고 어머니에게 걸핏하면 짜증을 부리며 시어머니 대접을 안한다고 핏대를 내고 미국간 아들(재가 후 낳은 독자)이 맡긴 300만원을 내놓으라고 성화를 부렸다. 할머니가 보증금으로 맡기신 돈인데 어머니는 다급하니 아이들 학비랑 생활비로 다 써버렸다. 할머니 성화에 꿀판 돈 300만원이 생기자 돌려드린 후 조모는 집을 나가서 남수각 근처에 사시다 성안교회에서 장사를 치루어 주었다. 어머님이랑은 사이가 안좋았지만 손자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과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언젠가 납골묘로 조부옆에 모셨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靈끼'가 있었는데 어느날 아버지 제사에 '저기 네 아버지가 와서 제사밥을 먹는구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으면 손자들을 위해서 돌봐주시겠다는 말씀도 하신게 기억난다. 조부는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는 비행장옆에 묘터를 해서 장사를 지냈다. 지관이 그랬다." 허어. 이 터에는 자손이 많이 나올 터우다" 조부가 돌아가시자 증조모가 아버지를 보살피다가 큰숙부밑으로 들어간게 초등학교 2학년 혹은 3학년쯤일 것이다. 아버지는 학교를 더다니고 싶었고 담임도 숙부를 찾아와 학생이 공부에 대한 의지가 강하니 어렵더라도 소학교만 마칠 수 있도록 하자고 권유해도 월사금 낼 형편이 못된다고 해서 소학교 3학년 중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머슴처럼 일했다. 주로 소꼴을 하고 나무를 해오거나 등짐지는 일을 한 것이다. 큰 숙부에게는 4남 2녀를 두셨는데 주로 두사촌누이와 막내 사촌과 어울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눈치밥을 먹으면서 사촌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큰 숙부내외는 아버지를 그닥 아끼지는 않으신 것으로 들었다. 밥을 먹더라도 사촌들이 안방에서 밥을 먹고 본인은 정지(부엌)에서 혼자 먹는것을 당연스레 여겼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손재주가 있어서 만들기를 좋아하고 무엇이든지 호기심을 갖고 노력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하루는 막내사촌과 팽이치기를 하다가 아버지가 만든 팽이가 자꾸 이기니 막내 사촌동생이 달라고 해서 주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좀 더 좋은 팽이를 만들어 팽이를 치고 있으니 사촌이 다시 달라고 떼를 썼다. 아버지는 "네가 졸라서 팽이를 줬더니 이것까지 욕심내면 어떡하냐"면서 안주니 더욱 떼를 쓰며 울고 있자 큰 숙부가 "넌 형이나 된 놈이 어찌되서 어린동생과 다투느냐"면서 대들보에 베를 묶어서는 모질게 때렸다고 한다.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할머니가 돌봐 달라며 준 궤짝을 등짐 지고 비어있는 할머니 집으로 가버렸다. 동네 이목도 있고 해서 큰 숙모가 달래서 다시 데려와서 살게 했지만 차별을 받으면서 어른이 되면 성공하겠다는 욕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23세 되는 해에 6.25 전쟁이 터졌다. 병무청에 조회한 결과 아버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강응준(군번0306970) 기장번호-38979 (아버지는 상이군인으로 제대를 해서 어머님이랑 결혼하고서도 국가유공자로서 소정의 쌀배급을 받았지만 정상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보고 당국에 고발이 되어서 해제가 되었다. 하지만 2017년 9월 4일.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47년만에 참전유공자로 인정을 받아서 국가유공자로 정식 등록이 되었다. 증서를 받는 날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좀 더 일찍 복권이 되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허벅지에 수많은 수류탄 파편을 다 제거하지 못한 채 상이군인으로 제대를 했고 제대한 그 해 아버지는 어머니랑 선을 본다. 어머니를 소개하신 분은 바로 1년전 상이군인에게 시집간 유일한 혈육형제 언니(윤석,인석이 어머님)였다. 언니는 아버지 행적을 조사한 결과 조상에게 물려받은 밭이 있어 성실하고 착한 모습에 목구멍에 거미줄은 치지 않으리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노름만 하는 장돌뱅이인 외할아버지에게 희망이 없어 태어나자 마자 일본으로 재가 해 버린 외할머니덕분에 천애 고아처럼 학교도 못가고 남의집 종살이를 하다 물질을 하며 입에 간신히 풀칠을 하는 신세였다. 두분은 비슷한 동변상련을 가진 경우라서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잔치할 돈은 둘째 치고 손님치를 쌀조차 없어서 언니는 형부의 군용오바를 시장에서 쌀 한말과 바꿨고 엄마는 이웃에게 사정을 해서 보리쌀 두말을 빌렸다. 그리고 신랑이 갖고 온 돼지 뒷다리를 갖고 간신히 손님을 치루었으며 아버지가 동네 안쓰던 낡은가마를 손수 고쳐서 보내줬다고 한다. 엄마는 그때까지 바다물질을 해서 번 쌈지돈으로 솜과 천을 따로 사서 이불을 두개 만들고 언니집 한켠에서 가난한 신방을 차렸다. 지금도 가난하고 못배운 시절 의지할 곳 없었던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해 준 언니를 어머니는 가장 고마워 하신다. 아버지의 성품은 어릴적부터 눈치밥을 먹은 탓인지 아니면 천성인지 다른이들에게는 항상 웃는 표정으로 살갑게 대해주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점은 부지런 한것이다. 일할 때는 낮이고 밤이고 쉬는 시간없이 독하게 했다. 집안에서도 창살문을 만든다든지 공사와 관계된 일을 하면서 한 시도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일을 맡긴 이들은 부지런하고 속이지 않고 맡은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만족하고 점점 소문이 나면서 큰공사를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스레트건축을 주로 하시다가 나중에는 등대나 학교등 직접 관급공사도 맡기 시작했다. 점점 일이 많아지면서 아버지의 기술도 늘어가고 동네 후배들이 아버지밑에 들어가서 일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몰래물 어른들이 자식을 부탁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두번째 장점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중퇴지만 학구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문을 모르는 이들도 많았고 한문은 더 더욱 몰라서 아버지에게 일본에서 온 편지에 대필을 부탁하기도 하셨다. 아마도 초등 3년만 마친것이 아버지에게는 큰 한이 되셨던 것이다. 처음에는 건축설계도면을 도면자들에게 부탁하다가 나중에는 직접 돈을 받고 설계도면을 그려주시기도 했다. 건축주들이 설계도면을 볼 줄 몰라서 아버지에게 들고 와서 도면해석을 경청하는 일도 생겼다. 세번째 장점은 누구에게나 친화적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이름을 대면 누구나 좋은기억과 좋은말만 했고 아까운 사람이었다라고 하셨다.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시고 술을 좋아 하셔서 일이 끝나면 일꾼들과 술로 해갈음하면서 하루의 여독을 푸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장구도 잘 치고 즐거운 분위기를 잘 이끌어냈다. 자녀중에 음악가가 생기고 미술가가 생기고 건축가가 생긴일들이 모두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영향일 것이다. 아버지는 성실하지만 가정에선 불같은 성미라서 밖에서는 그지 없이 호인이면서 집에 들어와서 성이 안차면 보이는게 없었다. 가끔 술을 마셔 늦게 들어와서는 자는 아이들을 깨워서 "넌 뭐가 될것이냐?"고 다그치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녀들을 혼내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현명하게 가타부타 말없이 순종하고 아버지를 보이지 않은 가운데 열심히 내조를 하셨다. 가끔 술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엄마가 겪은 세월의 시련에 비하면 참을 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사촌가족에게 멸시 받은 한으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에 돈도 악착같이 모으고 가정에는 엄격하셨던 것이다. 돈이 생기면 가까운 친척들을 불러서 돼지고기를 삶아서 대접하며 동네잔치하듯이 베풀기도 하였다. 그리고 둘러보며 "야. 장가네 없다. 박가네도 불러라" 주로 처가쪽을 잘 챙겼으며 친사촌들은 불러도 잘 오지 않았고 아버지 역시 숙부를 어려워했지만 경조사는 꼬박꼬박 챙기며 인사를 갔다. 특히 시멘일을 해주는 남수아버지(박경종)와 죽이 잘 맞아서 술이 취하면 둘만 밤새 술을 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항상 타인들에게 친절하고 잘 챙겨주었기때문에 모두가 아버지와 계모임하기를 좋아하셨고 덕분에 아버지에 대한 동네사람들의 기대와 칭송도 점점 커갔다. 아버지는 모든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공부를 비롯 뭐든지 야무지게 잘하는 셋째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셋째형님은 공군사관학교에 입교를 하였다. 생도 2학년 시절 퇴교위기가 왔다. 3학년 선배생도에게 하극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기장에"아버지. 만약 지켜보고 계시다면 도와주세요."면서 자신의 퇴교 당해야 할 억울한 심정을 절절히 기록했다. 우연히 관품검사를 하던 주임신부가 일기장을 보고는 사관학교장에게 일기장을 보여 주면서 탄원변호를 해서 정상참작으로 해결이 된 것이다. 당시 형님은 아버지가 도움을 주신것으로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형님은 생도들도 선망인 파일럿이 되서 임관 후 1981년9월17일 광주 송정리에서 홀로 전투기를 타고 출격훈련 중 순국 산화하였다. 24세 너무나 짧은 생으로 하늘의 별이 되어 아버님 곁으로 갔다. 너무 슬픈 소식이라 책임 대대장도 어머님께 알리지 못하고 형님들 몇이서 현충원에서 영결식을 보낸 후 어머님께 알리게 됐는데 자식먼저 보낸 아픔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오. 어머니에겐 믿었던 남편에 이어 두번째 희망은 절망이 되어 사라져 버렸으니. 36년이 지난 오늘 생각하면 그것은 가족에 대한 다른 희망과 헌신으로 돌아왔다. 형님이 졸업 후 첫 월급을 어머님께 보내드렸는데 마지막 편지엔' 어머님. 앞으로도 결혼전까지 작은 월급이나마 보태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건강하시길 빌겠습니다.'라고 유언처럼 남겼는데 오늘까지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어머님이랑 19년의 부부생을 하셨다. 아버지는 공사장 10리 길도 마다않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가곤했는데 엄마가 가까운데서 식사를 하시라고 하면 "그리 돈을 아끼지 않고 써서 언제 아이들 공부시키고 살림을 꾸리겠는가" 라며 어머님께 면박을 주셨다. "일을 하면서 밑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가! 부지런하게 하면 밑질 일이 뭐가 있다구 그래. 뻔한 계산이 나오는 일이 건축일이고 노동일인데.." 불평하는 사람들의 게으름을 탓하기도 했다. 하루는 점심먹으러 집에 아버지가 왔는데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다. 여름출산 후 몸조리를 못한 어머니가 바닷가 용천수 차가운 물에 밀린 빨래를 하고는 오한이 와서 집에 오자 마자 쓰러진것이었다. 간신히 의식있는 어머니에게 영문을 묻고는 설탕에 소주를 타서 잡숫게 해서 따뜻한 기운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었을것이라고 하신다. 또 하루는 어머니가 가을 걷이를 하다가 독사에 손이 물렸다. 온 몸이 검게 타들어 가는데 아버지는 어디서 급히 돼지비계를 얻어와서는 물린자국에 덧대감은 민간요법으로 살아났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의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17~8년 세월이 엄마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외롭고 가난한 두분이 만나 화목한 대가족의 부푼꿈을 갖고 희망이 넘쳤던 시절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불행은 시대적 건축 환경과 관계가 있었다. 당시 건축일을 하던 이들이 대부분 요절을 하였는데 이유는 당시 신식으로 새로나온 석면 스레트 지붕때문이었다. 계속 일감들이 밀려오는 상황에 아버지가 쓰러지신것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데에는 일에 대한 욕심도 한몫하셨다. 아버지가 쓰러지실 때 맡으신 일감이 열군데도 넘었다고 한다. 마악 무지개희망이 꽃필 때 무너진것이다. 아버지는 병중에 엄마에게 "내가 너무 어릴 적 가난의 한때문에 일만 하고 당신에게도 고생만 시킨것 같다. 이번 몸만 나으면 애들과 맛있는것도 사먹고 호강여행도 한번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42살에 암에 걸려서 온갖 치료를 다 했다. 그 당시 최첨단인 서울 성모병원의 방사선 치료까지 해서 암을 극복한것 처럼 보였다. 몸이 괜찮아지자 빈밭에 무얼 심어야 하다며 어느 하루 억수로 비오는 날 온종일 밭에 가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선 재발이 되어서 서울 성모병원에 찾아갔더니 자신들로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 까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 하지 않았는데 사이비 민간요법에 의지한 것이다. 어떤 불치병도 낫게 한다는 도사가 와서 아버지의 혹을 보더니 불개미 여러마리를 얹었다. 희한하게도 불개미들은 한시간내 아버지 혹주변만 맴돌며 종기를 빨아들이는 듯 했는데 그 도사왈 "이 불개미는 내 마을에만 사는 몇 안되는 나쁜 암독소만 빨아들이는 신통한 개미 "라고 했다. 점점 나빠지니 도사는 돈만 받고 사라지고 마지막 희망으로 무당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나 아버지 목숨이 끊기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 달아났다. 향년 44살에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짐작한 아버지는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현실을 원망했다."아이들 중학교만이라도 다 졸업시켜야 하는데"라며... 비록 아버지는 이승에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채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셨지만 아내와 자녀들이 그 한을 풀어서 위로를 드렸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열심히 아내위치에서 자녀들에게 본을 주었고 그 덕분에 나쁘게 자란 자녀가 한명도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노력하고 부지런하면 안될 일이 없고 여지가 있으면 이웃에게 잘 대접하라는 것이다. 자녀들 모두 아버지의 나이를 넘어 제나이도 57세가 되었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큰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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