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사망 후 처음 열린 올해 맥월드 박람회(MacWorld Expo)에선 네 명의 영화감독이 잡스의 유작이 된 아이폰4S로 촬영한 영화를 상영하는 ‘아이폰 영화제’가 열렸다. 진 감독의 〈992〉는 한국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 영화는 진 감독이 자신의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틀 만에 촬영했다. 아이폰의 동영상 촬영기능에 카메라 효과를 보강해주는 올모스트DSLR 앱과 DSLR 렌즈를 장착, 렌즈 사이즈에 따라 표현 방법과 화면의 깊이를 달리했다. 진 감독은 “‘아이폰으로 촬영했으니 퀄리티가 떨어져도 봐주세요’라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어요. ‘영화가 좋아서 봤는데, 알고 보니 아이폰으로 촬영한 거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진 감독은 2010년, 건축가 겸 가수인 양진석씨의 노래 〈가로수길〉의 뮤직비디오를 아이폰4로 촬영해 주목을 받았다. 이 뮤직비디오는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10만여 명이라는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해 미국 ABC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맥월드로부터 영화 연출을 의뢰받았다. 그에게 뮤직비디오와 단편영화를 스마트폰으로 제작하며 느낀 점을 물었다.
“예산도 촬영시간도 부담이 적어 쉽게 시도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카메라 기능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휴대폰에 카메라가 달린 것이지, 카메라에 휴대폰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스마트폰이 영화 촬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적은 돈으로 촬영할 수 있고, 소규모 극장에서도 개봉할 수 있는 등 대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기존 영화 시스템의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재미난 아이디어나 빠져들 수 있는 스토리만 있다면 굳이 스마트폰에 따로 렌즈를 붙이지 않아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편집을 돕는 앱들이 다양하게 나와 있으니까요. 유튜브 같은 곳을 활용해 발표할 수도 있고요. 전 세계인이 함께 보는 공간이라 홍보 효과를 톡톡히 올릴 수 있으니까요.”
그는 단편영화 〈992〉 제작에 소요된 비용 중 40%를 소셜 펀딩으로 조달했다고 한다. 60명의 후원자가 참여해 목표액 100%를 달성했다. 핼러윈 파티 장면은 진 감독의 페이스북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20여 명의 참여로 촬영할 수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영화광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는 부모님을 졸라서 보고, 또 보러 극장에 가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텔레비전에서 영화 평론을 하던 정영일 선생을 찾아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라고 진지하게 물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연세대 불문학과를 다니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 영화과로 유학을 떠났다. 불문학을 선택한 이유도 영화와 관련이 있다.
“불문학과에 가면 프랑스문화원에서 프랑스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입시 면접 때는 ‘왜 불문학과에 오려 하느냐’는 질문에 ‘불어를 공부해 칸느 영화제에서 불어로 수상소감을 말하겠다’고 대답해 교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죠.(웃음)”
미국으로 간 그는 세계 영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고, 미국 영화인들을 사귀는 데에도 공을 들였다. 그의 데뷔작은 1998년 만든 〈투 타이어드 투 다이(Too Tired To Die)〉. 김혜수와 금성무, 미라 소르비노 등이 출연했으며 선댄스영화제에 출품돼 좋은 평가를 얻었다. 1999년엔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했다. 미국에서 선풍적인 화제를 일으켰던 한국계 기업인 죠셉 박의 ‘코즈모닷컴’ 의 흥망성쇠를 그린 다큐멘터리 〈이-드림스(e-dreams)〉는 2002년 뉴욕에서 개봉돼 미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992> 촬영 장면. |
그의 롤모델은 대만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이안 감독. 〈결혼피로연〉 〈음식남녀〉 등 이안 감독이 만든 영화가 전 세계에 중국문화를 전파하는 것을 보고 “영화를 통해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고 한다. 2005년 그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준비했다.
“영화를 통해 한국에 대한 서구의 편견을 깨고 싶었고, 한국과 할리우드 사이의 거리를 한층 좁혀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죠. 그러나 투자도 여의치 않았고 캐스팅 문제로 흐지부지됐죠.”
그 후 영화제작을 해보려고 영화사를 차리기도 하고, 합작관련 작업도 해봤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왜 영화를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괴로웠다.
“항상 고민이었죠. 제 삶의 5분의 2를 미국에서 지내다 보니 제 삶의 문화적 배경은 한국과 미국이 반반인데,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단점이 될 수도 있거든요. ‘어설프게 미국 영화만 찍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과연 한국에서도 어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영화배우 최민식씨의 격려는 위로가 되었다.
“진원석의 이야기를 했을 때 그걸 좋아해주는, 즐겁게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또 네 자신의 진솔한 얘기를 한다면, 적어도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진 않을 것이라는 얘길 듣고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단편영화 〈992〉는 진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제야 진원석만의 꿈틀거리던 창작욕이 느껴져 기대된다’는 주위의 평을 들으며 자신감도 되찾았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만든 단편영화가 영화제작 환경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켰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몇 년 동안 준비하고, 몇 십억원을 들여 만든 영화가 개봉되는 주말 단 한순간에 운명이 결정된다는 게 참 허무하다고 생각해요. 꼭 장편영화가 아니더라도, 30분짜리 단편영화를 꾸준히 만들거나 시리즈를 만들어도 감독으로서 제작자로서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992〉는 스티브 잡스에 대한 오마주로 만든 영화지만, 저의 이런 도전이 영화계에 하나의 새로운 장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유튜브뿐 아니라 이런 영화를 발표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그는 현재 한국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시나리오를 작업 중이다. 그가 강조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 다문화적 관점을 가진 그의 개성이 이번에는 어떻게 표현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