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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복고 왕정(5) 중도 정책의 파탄과 샤를 10세
1816년 입헌파 다수 의회의 성립과 함께 복고 왕정은 안정을 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매년 의석의 5분의 1씩 개선하는 하원에서 해마다 보나파르트파와 자유주의자의 의석이 늘어갔다. 1817년에 25석, 1818년에 45석, 1819년에 90석이 늘었다. 좌익의 대거 진출은 중도파의 힘을 약화시켰다. 정부는 이제 우익의 왕당파와 좌익의 독립파와 양면 공격을 받게 되었다. 1818년 12월 리슐리외가 드디어 물러났다. 그러나 왕은 중도를 걷기 위하여 드카즈와 드 세르(De Serre) 같은 온건한 인물로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원이 그 반동성을 드러내어 새 내각을 반대하였다. 거기서 루이 18세는 상원의 의석 수를 208석에서 270으로 늘여 새 의석에 보나파르트파를 임명하여 반대세력을 눌렀다.
독립파의 세력 증대에 따라 정부에 대한 좌우 양쪽의 공격도 더욱 강해졌다.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는 루이의 중도 정책은 중대한 시련에 봉착하였다. 국민의 분열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지난 30년의 역사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제 복고 왕정의 안정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왕은 왕당파로부터 개각의 압력을 받았다. 이러한 때에 공교롭게도 1820년 2월 13일 아르투아 백작의 둘째 아들 베리 공작(Charles Ferninand d’Artois, Due de Berry)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혁명운동의 여파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왕당파와 입헌파의 눈에는 왕정을 전복하려는 자유파의 음모의 증거로 비쳤다. 왕은 우익의 압력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카즈와 그의 중도적인 내각이 물러나고 리슐리외가 다시 등용되었다.
리슐리외는 그의 제1차 내각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왕당파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왕당파는 지금까지의 정부 업적으로 모두 무효화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우선 신문 검열을 재개하고 신문과 일체의 출판물 발행을 정부의 인가제로 강화하고 드디어 1822년에는 언론 재판의 배심제를 폐지하였다. 왕당파는 언론의 탄압과 함께 선거법도 개악하였다. 비례대표 직접선거제를 없애고 소선거구 간접선거제를 재도입하는 동시에 이중 투표제라는 것을 새로 만들었다. 이것은 소선거구 제도에 의하여 선출된 258명의 대의원 이외에 또다시 1,000프랑 이상의 직접세를 납부하는 약 1만 6,000명의 부자들만이 도 단위로 전국에서 172명의 대의원을 더 뽑는 제도이다. 따라서 하원의 의석수가 430석으로 늘었다. 이 새 선거법에 의한 1821년의 선거 결과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극우파의 대거 진출을 가져왔다. 리슐리외는 벨레르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물러났다. 왕당파는 기뻐 날뛰었다. 그들의 기쁨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앞서 암살된 베리 공작의 유복자가 탄생하여 왕위를 계승할 자가 생겼다. 루이 18세는 아들이 없었고, 늙은 아투아르 백작에는 두 아들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도 둘 다 아들이 없었는데, 암살된 차남에게서 유복자가 태어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아기를 ‘기적의 아기’라고 불렀다. 이 아기가 보드로 공작(Duc. Bordeaux으로서 1830년 7월 혁명이후 정통파의 왕위 상속을 주장한 샹보르 백작(Comte de Chambord)이다.
빌레르 내각은 왕당파 다수의 의회와 함께 자유파를 탄압하는 엄격한 반동 정책을 강화하였다. 반정부 세력은 필연적으로 음모를 획책하여 폭동을 일으키거나 지하로 잠적하거나 하였다. 샤르보네리(Chabonnerie)라는 비밀결사는 복고 왕정의 타도를 그 명백한 목적으로 세우고 1822년에 몇몇 도시에서 혁명적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폭동들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프랑스 군대는 이제 국내의 폭동 진압쯤은 문제가 안 될 만큼 막강한 힘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들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프랑스 정치의 특색이 되고 정부의 공포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탄압의 대상이 된다. 평화적인 민주적 절차에 의한 개혁의 길이 막힐 때는 어느 곳에서나 개혁의 세력은 지하의 폭력주의로 화하는 법이다. 더구나 프랑스에서는 그 폭력주의가 상퀼로트의 혁명적 전통에 이어져서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1820년대의 개혁운동도 그러하였다. 이 운동은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1820년대의 프랑스 군대의 힘은 국내의 폭력 진압쯤은 문제가 안 될 만큼 막강하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유럽의 보수 반동 체제를 교란하는 다른 나라의 폭동이나 혁명도 진압하러 나설 만큼 강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프랑스는 1818년에 이르러 전쟁배상금을 다 물고 외국군이 전부 물러갔는데, 동시에 프랑스는 완전한 동등 자격으로 4대 연합국 동맹에 가입하여 5국 동맹(Quintuple Alliance)의 일원으로서 유럽 협조(European Concert)의 일익을 분담하게 되었다. 이는 프랑스의 재정 안정과 군사력에 대한 연합국의 평가를 의미하는 동시에 프랑스의 보수적인 정치적 안정에 대한 연합국의 신임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프랑스는 이제는 4대 전승국들과 함께 빈 보수 반동 체제의 수호를 위하여 앞장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의 향상을 뜻했으나 자유주의의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배역이었다. 거기 국내의 정치적, 사상적 충돌의 위험성이 숨어 있었다. 그 위험성이 현실로 화하는 것이 7월 혁명이었다.
어쨌든 1820년대의 프랑스는 5국동맹의 일원으로서 7월혁명을 일으킬 방향으로 내디디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마치 1820년 스페인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가문의 페르디난드 7세 Ferninand VIIsms 1812년 헌법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빈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열국은 1822년 스페인 혁명 진압을 논의하기 위하여 베로나에서 회의를 열었다. 프랑스는 군사적, 외교적 승리에 의하여, 복고 왕정의 위신을 높이고 혁명의 위험 앞에 떨고 있는 유럽 열강에게 프랑스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스페인 혁명의 진압을 자원하였다. 영국만이 반대하였다. 영국은 나폴레옹 시대 이래 스페인에 대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개입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5국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각국의 국가이익과 유럽 협조 체제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는 이듬해 아르투아 백작의 자암 앙굴렘 공작(Duc d’Angouleme)이 지휘하는 원정군을 스페인으로 보냈다. 프랑스 원정군과 스페인 혁명군 사이에는 상당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으나 혁명군이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앙굴렘군은 나폴레옹도 극히 어려웠던 스페인 정복에 성공하였다. 프랑스 정부와 그 군대의 위신이 국제적으로 크게 드높아졌고, 국내적으로도 복고 왕정 선전의 효과가 매우 컸다. 그러나 스페인 원정의 소득은 그것뿐이었다. 이 원정에 소모된 엄청난 군사비는 국가재정에 압박을 가하였고, 프랑스 자유파의 맹렬한 반전운동은 국론을 분열시켰다. 더구나 그들 중에는 의용군으로서 스페인 혁명군에 가담한 자들이 있어 프랑스인은 동족상잔의 추태를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페르디난드 7세는 프랑스군의 원정을 감사히 생각하지 않았고, 또 혁명 세력에 대한 그의 가혹한 탄압 정책은 스페인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프랑스의 군사행동을 크게 비난하게 만들었다.
스페인 원정은 프랑스 정치의 극단적인 우경화를 뜻했다. 1823년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실시하였다. 대의원의 임기를 5년에서 7년으로 늘리고, 종래 해마다 5분의 1씩 새로 선출하던 제도를 없앴다. 그리고 정부는 공공연히 선거에 간섭했다. 그 결과 1824년 초에 개원된 새 하원은 극우 왕당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전의 “세상에 둘도 없는 의회”가 다시 나타났다고 하여 1824년 의회를 “다시 만난 의회(la chambre retrouvee)”라고 빈정댔다. 이 의회는 앞으로 7년간 의석의 변화 없이 존속하도록 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 정치의 경색이 제도화된 셈이다. 이렇게 숨막히는 상황을 더욱 굳어지게 한 것은 루이 18세의 와병이었다. 그만이 왕당파의 극단주의를 억제할 수 있었는데, 왕당파의 두목 아르투아 백작의 영향은 한결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 우경화의 길을 가고 있을 때 루이가 1824년 9월에 죽고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서 프랑스 왕위에 즉위하였다.
샤를도 형 루이처럼 67세의 홀아비였으나 형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활동적이고 정열적이고 명쾌한 성격만이 형과 다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력과 사상도 매우 달랐다. 샤를은 왕당파의 두목으로서 헌장을 우습게 여기고,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장난으로 믿고, 왕권신수설을 진심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이제 왕권신수설을 부정한 헌장을 준수해야 하는 입헌군주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얼마나 헌장에 충실할 것이며 정당정치의 군주로서의 임무에 성실할 것인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왕당파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다시 만난 의회’는 왕당파의 두목이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이제야말로 1815년에 하려다 못한 제반 계획을 쉽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계획이란, 교육과 호적 및 혼인 사무를 교회에 위임하는 일, 민법을 개정하여 국가가 몰수한 망명 귀족의 재산을 배상해 주는 일, 민법을 개정하여 세습적인 귀족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는 일 등이었다. 이런 일들은 이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실현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반정부 세력은 원내에서는 약할지 모르지만 원외에서는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의견차로 외무대신에서 밀려난 샤토브리앙은 <주르날 데 데바(Journal des Debats)>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또 하나의 반정부 비판의 필봉을 들었다. 당시 이들 야당지는 약 4만 명의 독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당지들은 1만 5,000정도의 독자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원외의 반정부 세력이 상당히 강했으므로 왕당파의 계획이 그리 쉽게 실현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왕당파의 계획이 전혀 실현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샤를은 그의 즉위식에서 앙시앵레짐의 종교의식을 많이 부활시켰다. 그것은 그가 혁명을 부정하고 앙시앵레짐을 복구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프레시누(Denis Antoine Luc Frayssinous) 주교가 문교 대신에 임명되면서 교육이 사실상 교회에 위임된 셈이었고, 사범학교(ecole normale)를 불온사상의 온상이라고 하여 폐쇄했고, 여러 가지 공공 행사에 종교의식을 다시 도입했고, 부르봉 왕정의 회복을 목적으로 나폴레옹 제국 시대에 조직된 비밀결사 신앙 기사단(Chevaliers de la foi)이 교권주의의 부활을 공공연히 제창하였다. 요컨대 교권주의가 사실상 부활된 셈이었다. 베랑제, 쿠리에, 기조 등 합리주의자들이 투옥되기도 하고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그들의 저작물 출판이 박해받고, 또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신성모독죄가 제정되었다. 그리고 1825년에는 망명 귀족의 몰수 재산을 보상해 주는 법안이 드디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국채 이자율 5퍼센트를 3퍼센트로 내림으로써 생기는 6억 5,000만 프랑을 보상금의 재원으로 확보했다. 그러나 이것은 국채 소유자들에게 응당 지불되어야 할 돈을 정부가 가로채서 망명 귀족들에게 보상해 주는 셈이었다. 이 처사가 국채를 소유한 부르주아에게는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납득되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제 반정부 세력은 자유파와 보나파르트파에 그치지 않았다. 현대 세속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과 시민적 평등의 필요성을 인식한 가톨릭 신자들과 갈리카니슴을 지지하는 온건한 왕당파에 이르기까지 반정부 세력이 광범하게 형성되었다. 반정부 신문들은 물론이고 살롱과 클럽 및 각종 팸플릿이 정부의 교권주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심지어 프랑스 학술원(Academie francaise)까지도 정부의 종교 정책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답은 언제나 탄압법의 제정이었다. 언론 탄압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상원이 이 법안을 거부하였다. 상원은 1815년에서처럼 다시 한 번 더 하원의 지나친 반동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빌레르 내각은 1827년 11월 하원을 더 강화하고 상원의 의석을 늘려서 강격 정책을 추구하려고 3개조의 칙령을 발포하였다. 첫째,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한다. 둘째, 상원의 의석을 76석 더 늘린다. 셋째, 최근 강화한 언론 검열을 철회한다. 이 셋째 것은 타협적인 제스처에 불과한 것으로 별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정부의 선거 간섭에도 불구하고 총선거의 결과는 정부의 기대를 완전히 뒤엎고 야당이 60석 이상의 다수당이 되었다. 빌레르는 참패의 책임을 지고 1828년 1월 수상직을 사임하였다.
샤를 10세도 이제는 무언가 양보하는 제스처라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새 내각을 다소 온건한 마르티냐크(Jean Baptiste Gay Martignac) 자작에게 위촉하였다. 마르티냐크 정부는 대체로 중도 우파의 타협 정책을 추구하여 신문의 검열제를 없애고, 가톨릭교회의 교육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기조와 같은 해직 교수를 다시 강단에 서게 하였다. 그런데 1829년 4월에 샤를 10세는 반부르봉 세력이 가장 강한 동부 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와서 자기는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여 8월에 개각을 단행하였다. 새 수상에 망명 귀족이며 극우파인 샤를의 가까운 친구 폴리냐크(Prince de Polignac)를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 내각에는 국민 사이에 악명 높은 부르몽(Louis Auguste Voctor, Comte de Ghaisnes de Bourmont) 장군과 다 부르도나예(Francois Regis de La Bourdonnaye) 등이 포함되었다. 이 내각이 얼마나 반동적인 성격의 것이었는가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마저 그 조각을 반혁명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평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메테르니히야말로 당시 유럽 전체의 보수 반동 체제의 중심인물이었다.
야당지들은 일제히 개각의 불법성을 공격하고 쿠데타의 전조라고 극론하엿다. 1839년 1월에는 탈레랑이 지지하는 새 야당지<르 나시오날(Le national)>이 창간되었다. 티에르나 미네(Francois Auguste Marie Mignet)와 같은 저명한 젊은 역사가들이 이 신문에서 1688년의 영국 명예혁명을 찬양하면서, 국민이 원하지 않는 군주는 동일한 왕가의 다른 사람으로 교체시킬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암시하였다. 일체의 반정부 세력이 하나로 뭉쳤다.
1830년 3월 의회가 열리자 의회는 내각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왕은 무력을 써서라도 야당을 누르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표명하였다. 의횐느 위협에 굴하지 않고 내각 불신임안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복고 왕정 시대를 통하여 내내 잠복해 있었던 헌법상의 문제를 드디어 제기하였다. 국왕은 의회의 다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 마음대로 내각을 구성할 것이냐, 아니면 의회의 다수의 동의를 얻어서 구성할 것이냐, 그리고 내각은 의회의 다수의 불신임을 받으면 사임해야 하느냐, 아니면 국왕의 뜻에 따라 사임하지 않아도 되느냐. 폴리냐크는 의회정치의 원리를 무시하고 의회의 불신임 결의에 대항하여 오히려 의회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왕도 같은 생각이었다. 왕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폴리냐크 내각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7월에 새 하원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정부는 온갖 불법과 부정을 동원하여 선거에 간섭하였다. 그러나 7월 선거의 결과는 야당 의석을 221석에서 270석으로 크게 늘려주었다.
이제 국민의 희망과 여론의 방향이 무엇인가가 너무나 명백히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 10세는 아직도 눈을 바로 뜨지 못했다. 그는 헌장 제14조의 긴급 명령권을 악용하여 7월 26일 이른바 4개조의긴급 칙령을 발포하였다.
(1) 막 끝난 선거에 의하여 소집될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채 해산하고
(2) 새 선거법을 제정하고
(3) 새 선거법에 의하여 선거를 다시 실시하고
(4) 언론 규제를 강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새 선거법은 자유주의적인 도시 부르주아를 제거하고 주로 농촌 지주 계층에게만 투표권을 주어 유권자의 수를 약 2만 5,000명 정도로 크게 줄이려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 7월 칙령은 쿠데타에 해당하는 중대한 조처였다. 반정부 세력은 일제히 일어섰다. 신문들은 합헌성을 잃은 정부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혁명을 시사하는 과격한 논진을 펴고, 의원들은 납세 거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폴리냐크 내각의 퇴진 요구가 혁명으로까지 돌진할 만큼 사태는 그리 험악하지 않았다. 만을 샤를이 사태의 진정한 의의를 잘 파악하여 폴리냐크 내각을 후퇴시키고 사태 수습에 성실했더라면 결코 혁명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샤를의 어리석음과 방심이 결국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는 긴급 칙령에 서명한 후 남쪽 랑부이에로 사냥을 떠났다. 얼마나 경솔한 짓이었던가? 긴급 명령을 발포한 당사자가 사태의 긴급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긴급조처를 취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 아닐까? 그는 야당 세력이 힘을 조직하여 혁명으로 이끌어가는 데에 대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수도의 경비를 강화하지도 않았고, 또 많은 병력을 북부 아프리카의 알제리로 원정을 보내 프랑스에는 군대가 없었다. 3만 8,000명의 장병과 4,500필의 군마, 103척의 군함과 469척의 상선이 알제리 원정에 동원되어 있었다. 그가 사태의 긴박성을 깨닫고 군대를 움직이려 했을 때는 수중에 그만한 군대가 없었다.
7월 27일부터 파리 시민은 시내 요소요소에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군민 방위대는 1827년에 해산되었으나 대원들은 아직도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나섰다.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해야 한다는 과격한 노동자, 학생, 시민이 이제 모두 반정부 운동에 한데 뭉쳤다. 낭만적인 혁명의 물결이 순식간에 전 시가를 휩쓸었다. 당시 파리의 수도 사령관은 마르몽(Auguste Frederic Louis Viesse de Marmont)장군이었는데 그는 나폴레옹을 배신한 군인으로서 파리 시만이 몹시 싫어하였다. 마르몽의 군대는 비좁은 골목에서 행동의 자유를 잃고 사상자만 더 냈다. 7월 29일 두 연대가 폭동 쪽에 가담하였다. 그렇잖아도 병력이 모자란 마르몽은 결정타를 맞았다. 완미한 샤를도 이제는 사태의 진상을 깨달았던지 30일 폴리냐크를 파면하고 4개조로 이루어진 칙령을 철회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사냥터에서 왕이 긴급히 파견한 사절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의회과 샤를의 퇴위와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의 즉위를 가결한 뒤였다. 이제 샤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군대의 힘으로 의회를 항복시키는 것이었는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에게는 그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는 센 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왕의 목숨을 노리는 폭도들을 피하여 생애 세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부르봉 복고 왕정은 워털루 이후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