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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KBS1-TV에서 방영되고있는 '정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있습니다
이 '정도전'에서 보여지는 내용이 사실에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어 이렇게 복사해다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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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Contents
1 개요
2 고려시대편
2.1 제1회
2.2 제2회
2.3 제3회
2.4 제4회
2.5 제5회
2.6 제6회
2.7 제7회 ~ 제8회
2.8 제9회
2.9 제10회
2.10 제11회
2.11 제12회 ~ 제14회
2.12 제15회
2.13 제16회
2.14 제17회 ~ 제18회
2.15 제19회 ~ 제20회
2.16 제21회 ~ 제23회
2.17 제24회 ~ 제25회
2.18 제26회 ~ 제28회
3 조선시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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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KBS에서 정도전의 생애를 주제로 방영되는 사극 정도전(드라마)에서 극중 전개와 실제 역사적 사건들의 비교를 위한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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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시대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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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제1회 ¶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것은 신돈 집권 전 일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작중에 그녀를 위한 영전(影殿)을 짓는다고 한 것을 오해한 것일 듯하다. 사실 노국대장공주를 위해 영전을 짓는 것은 신돈 집권시와 그 이후의 일이고, 신돈은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짓는 일을 반대하였다가 실각의 빌미를 만들었다. 더불어 영전을 짓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역자들을 동원하고 사상자가 많이 나와 민심이 흉흉했던 것도 실제 역사적 사실. 명덕태후 홍씨나 심지어 하녀까지 국왕에게 간했으며, 간언을 했던 신하 하나는 끝내 공민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공민왕이 정도전을 보고 '뭐야 이 듣보잡은?'이라고 보는것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죽기전부터 총애했던 신진사대부로 고려사 '정도전 열전'에서는 "왕이 그를 매우 총애했다"고 기술했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신돈을 처벌하고 태묘에 제사 지낼때 일익을 담당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대에 이미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혈통상의 문제가 있었고, 후일 우현보에 대한 그의 처분[1]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컴플렉스도 있었겠지만, 그런 약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지금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형부상서 정운경의 아들이었으며, 당대 최고 학자인 이색의 제자였다. 그의 출세는 적어도 공민왕대까지는 어느 정도 탄탄대로였던 셈이며, 그가 좌절을 겪는것은 우왕때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본작에서와 달리 조선개국으로 완전히 틀어지기 전까지 동문들과 동료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이 문제를 비판한 기사.
작중에서는 성균사예가 낮은 직품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종4품의 꽤 높은 직함이었다. 당시의 정도전 같은 30대의 젊은 관료가 종4품이라면 순조로운 출세이다. 거기에 아버지, 어머니의 줄초상(아버지 3년상 중 2년째 될때 어머니도 돌아가시는 바람에)으로 그는 20대의 절반인 5년간 관직 생활을 쉬기까지 했는데도 저 정도의 승진속도를 보였다. 이쯤되면 왜 열폭했는지 모르겠네.
공민왕이 모니노가 신돈의 자식인가 의심하는 세간의 소문을 신경쓰는 묘사가 초반에 나오지만, 실제 사서에서 공민왕은 우왕을 확실한 자기 자식으로 여겼다. 물론 실제 그런 소문이 퍼진건 맞고 명덕태후가 우왕의 출생을 의심했다는 것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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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2회 ¶
이인임이 정도전을 문초하면서 아비 대에야 개경에서 관직을 지낸 가문이라면서 깔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애초 권문세족이라는 것 자체가 기존 문벌귀족의 생존자들에 무신정권의 잔당들, 한미한 가문 출신의 국왕의 친위 세력(심지어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집안을 일으킨 강윤충 같은 노비 출신도 있었다)에, 지방 향리 출신 과거 급제자들 중 권력을 잡은 자들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이들과 신진사대부가 확실히 나눠진다는 학설 역시 도전받고 있다. 이인임 역시 할아버지 이조년이 학문으로 집안을 일으켜 개경에서 입신하였으며, 형 이인복은 공민왕 초기의 중신으로서 원에서 과거 급제하는 등 학문으로 일어난 집안이었다. 이성계의 큰며느리는 한때 이인임과 결탁해 우왕 초기의 권신으로 있었던 지윤의 딸이며, 이성계의 사위 이제도 이인임의 집안 친척이었다. 즉 실제 저런 식으로 이인임이 생각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이야기. 단 드라마에 아직 나오지는 않았지만 정도전의 모계에는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고, 나중에 정적들이 이를 가지고 넘어지는 등 그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였다.
공민왕의 최후는 정사와 달리 비극적으로 처리된다. 정사에선 익비를 임신시킨 홍륜을 최만생과 묻어버리겠다고 하다가 살해당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정도전의 일갈을 듣고 새 정치의 희망을 품어 이인임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왕이 평소 거칠게 대해온 것을 불만으로 여기고, 익비와의 불륜으로 공민왕이 자신들을 제거할 것을 알아챈[2] 홍륜등 자제위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에 정사에 있던 홍륜등과의 난행도 상당히 축소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 여기서는 환관 최만생[3]이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홍륜을 죽이려다가 공민왕과 같이 죽는 것이 역사와 다르다.
어째 공민왕 항목에 있는 이인임 배후설이 생각나면 기분탓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기분 탓이라기 보다는 작가가 실제로 사료에 남은 내용과 이인임 배후설을 엮어 대본을 썼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공민왕을 비롯해 고려 후기 왕들의 기록에 조선학자들의 폄하가 들어가 있다는 지적이 조선 후기부터 지적되는 만큼 작가의 각색이 어느 정도는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동사강목의 저자 안정복은 이익과의 편지에서 '우왕, 창왕도 신돈의 아들이 아니라 왕씨 아닌가요?'라고 까고 동사강목에도 왕으로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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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제3회 ¶
최영이 제주반란의 수괴 3명의 수급을 개경으로 보낸 것은 실제로 사실이다. 물론 그걸 가지고 이인임이 수작을 부린 것은 당연히 픽션. 최영이 우왕을 겁박한 듯한 모습도 당연히 픽션. 현실 역사에서 우왕은 공민왕이 죽은 이후 9월에 왕위에 올랐고 최영은 10월에 수하 장수들과 함께 귀환해보니 왕이 이미 죽었으므로 왕의 빈소에서 보고를 올리며 통곡하다가 목이 메었다라는 기록만이 있을뿐이다. 당연히 최영이 급히 개경으로 올라오자 제2의 무신란을 일으킬까 저어하여 하루아침에 우를 왕위에 올렸다는 건 각색이다. 그래서인지 실제 역사와도 다르고 작중 행동은 마치 구석을 받은 권신이 할만한 행동이라는 지적이 있다. 작중에서도 경복흥이 이를 말리거나 자신에게 부월을 들이대는 최영을 보고 이인임이 역적이냐며 디스하는 장면이 있다. 일단 최영은 기본적으로 우왕 즉위 당시 우왕의 즉위를 밀어붙인 이인임 측 사람이었으니 실제 역사적 사건과는 다른 묘사이긴 하다.
그러나 실제 최영의 행적을 보면 저런 식의 행동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우왕이 매우 아끼고 신임하던 유모 장씨를 유배보내고 처형시켜버린 행적을 보면 드라마 묘사 뺨치는 수준. 이 일은 사실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기 위해 우왕이 유모 장씨에게 말을 듣고 임견미 등을 제거하려 했는데 최영이 이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킨 사건이다. 이때 최영 열전에 기록된 행동을 보면 자기 위하 무장한 군사들을 대거 도열시켜 놓은 채 백관을 소집해 장씨를 국문하라고 주청하며 우왕이 "최영 당신 충신 아니었냐? 대체 왜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러고 있는거냐, 이러지 마라"라고 말한후, 경복흥 등에게 "장씨는 내 어머니 같은 사람이니 살려달라" 울면서 간청했다. 우왕의 태도가 어찌나 간절했던지 막상 최영과 함께 행동했던 경복흥도 그런 모습을 보고 눈물지었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되어있다. 최영은 이런 우왕의 간청을 쿨하게 무시하고 장씨를 유배보낸 다음 죽였으며 "신하의 몸으로 임금에게 항거한 것은 어쨌든 옳지 못한 태도가 아니냐?"는 간관도 유배를 보냈다. 이 장면만 보면 고려의 충신이 아니라 무신정권 집권자다. 이의방 MK-2 어쨌거나 고려 후기에 유달리 무신들의 권세가 판을 쳤던 점을 감안한 묘사일수도 있겠다. 참고로 이 장면은 드라마에서 생략되었다.
이거 외에도 역사에 기록된 최영이 간언하는 장면을 보면 왠지 우왕을 윽박지르는 듯한 말들이 많기도 하다(...). 당장 저 사태가 끝나고 최영이 우왕에게 한다는 말이 "전하께서 사악한 자를 물리치시고 저를 의심하지 않으시니 저도 심히 기쁩니다. 다만 신이 불충하다고 꾸짖으시니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다(...) 우왕도 최영이 두려웠는지 "다급한 김에 나도 몰래 실언했으니 깊이 후회하고 있소"라고 변명했다(...) 무신정권 맞네. 그 외에 명덕태후와 경복흥이 강녕대군 우가 아닌 다른 종친을 밀었고 이인임이 우를 왕으로 밀었다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李壽山)이 말하기를, 마땅히 종실 영녕군(永寧君) 유(瑜)를 왕위에 올려야 한다고 했으나 결국 이인임의 뜻대로 되었다. - 고려사 공민왕 세가 23년 기록
공민왕의 사망소식을 들은 최영이 급히 개경으로 회군해오자 이인임의 말발에 넘어간 경복흥이 무신정권의 재출현을 우려하여 명덕태후에게 강녕군을 왕위에 올리자고 설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경복흥이 디스한 무신집권기 집권자 중 경대승은 그의 고조부 항렬이다. 문신을 우대하면서 이의민과 대립각을 세웠던 경대승의 행적을 고려하더라도 일단 무신정권 전체를 싸잡아서 깐 경복흥의 대사는 어찌 보면 패드립성 발언(...)이 되고 만다. 뭐 같은 청주 경씨이나 경대승 세계도 실전 되어 두사람 관계를 정확히 알 수 없는면도 있지만서도... 위국헌신의 충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자기 조상을 디스한 권신 경복흥 선생... 전생에 경대승의 거사로 죽은 기억이 나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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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4회 ¶
이인임이 공민왕 사후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을 호종무장을 사주하여 죽이고 북원과 붙은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 맞다. 고려사 이인임 열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드디어 이인임이 백관을 거느리고 우(禑)를 왕으로 옹립했다. 어떤 자가 이인임에게, "자고로 나라의 임금이 시해당하면 재상자리에 있는 사람이 먼저 그 죄를 받는 법입니다. 황제가 선왕의 변고를 듣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공이 필시 모면하지 못할 터이니, 원나라와 화친해두는 것이 상책입니다.” 고 귀띔했다. 이인임이 옳은 말이라 여기고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 등이 귀국할 때 찬성사(贊誠事) 안사기(安師琦)를 보내어 전송한다고 둘러대고서 비밀리에 김의(金義)를 꾀어 중도에서 채빈 등을 죽여서 입을 막아버리게 했다. 김의가 채빈을 죽이고 북원으로 달아나버리자 이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다.
이성계가 서북 방언을 쓰는데 그 당시의 언어가 지금과 같다고 하긴 어렵기에 그냥 캐릭터성을 살리기 위한 각색으로 보인다. 뭐 고려 초기 북진 정책으로 얻은 영토엔 서북지역인들이 대거 투입되긴 했을테니... 따지고 보면 이성계 일족을 비롯해 그들이 이끌던 고려인 집단은 원래 전라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고...사실 동북 방언을 쓰는 것도 시대상 맞지 않는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동북 방언은 놀랄만큼 동남 방언과 비슷한데 그 이유는 이 시대의 조금 뒤인 세종시절부터 시작된 사민정책으로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동북 지역으로 넘어와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에 동북방언을 쓰는 것이 오류가 될 수 있다. 그럼 서남 방언을 쓰면 만사 OK. 가문의 영광으로 갈고닦은 사투리를 다시 쓰면...!!!
작중 등장하는 이성계의 정예병력인 가별초를 그냥 이성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픽션적 성격으로 여기기 쉽지만 이 가별초는 실제로 이성계가 이용하던 사병조직으로 이성계를 따라 전장에 종군하였다. 대체로 전주 이씨 집안이 이끌던 동북면의 고려인들과 이지란등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외 이성계의 인망을 보고 추가적으로 들어온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숫자는 대략 1000~2000여명 선이었다. 그 휘하엔 정예기병으로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성계의 공격적인 전술운용에 요긴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최유의 난이나, 황산대첩, 위화도 회군 등 이성계가 종군한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들로 이후에도 존속하다가 태조가 승하한 이후 태종 11년(1411년)에 혁파되었다고 한다.#
이성계가 부하들을 많이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동각잡기에 "성심을 미루어서 부하들을 예의로 대접하니 늘 욕하는 자가 없어 장군의 부하들이 모두 태조에게 예속되기를 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 자체가 픽션이지만 이인임이 최영과 만나 상호견제구도로 고려의 이익을 도모하자 하였을 때[4] 인용한 나라를 하필이면 고조선이라 부르는데, 고려 당대에 고조선으로 지칭되는 나라는 단군조선이고, 이인임이 인용한, 중국 분열기에 세를 키우다 통일 한조에게 멸망한 나라는 이 후의 위만조선이기에 조금 맞지 않다. (고조선이라는 단어 자체는 14세기 말에 고조선 계승을 표방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쓴 용법이 정착되었지만 그 전에도 '옛 조선'고조선과는 다르다. 고조선과는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도 고조선이라는 단어가 쓰였다.)
우왕 즉위 초 북원과 명, 고려 외교 관계는 사실과 픽션이 혼재되어 있어서 쉽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우선 신진사류들이 하루 빨리 명에 사신을 보내야 한단 주장을 한 것은 맞다. 거의 유일한 사대부 개그 캐릭터 전교령(典校令) 박상충(朴尙衷)과 훼이크 주인공화가 가속화 중인 성균사예(成均司藝) 정도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했으나 이인임이 이 말을 듣고 '재상들이 가길 꺼려하는데 누가 가겠음?' 이라고 한게 사실. 그러니까 전의부령에 있을 당시에 그랬던 사극에서와 달리 정도전은 아직 하급 지위에 있었을때부터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북원의 군벌 나가추(나하추)가 사신을 보내어 우가 왕위를 계승한 것을 물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북원에서 심양왕의 손자 타타부카(탈탈불화)를 고려왕으로 삼았다는건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에선 공민왕이 아들이 없으니 탈탈불화를 왕위에 올린다고 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왕의 혈통을 의심하고 있다는건 픽션의 성격이 강하다. 나하추가 군사를 일으켜 고려 변방을 압박했다던하는 일은 역사서에 '판밀직 이자송을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윤으로, 찬성사 지윤을 서북면 도원수로, 문하평리 유연을 동북면 도원수로 각각 임명해 각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북원의 침공에 대비하게 했는데, 얼마 후 변방의 정세가 평안하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징병을 중지했다.' 는 기록을 따라 각색한 것.
지문하부사 임견미가 서경상 도원수로 파견된 건 정도전이 유배가고 난 다음에 일이다. 이후 5회에서 나하추를 추격한 이성계와 만나 갈등을 빚었다던지 이인임이 이성계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할때 호위를 하라 명 한건 픽션이다. 이는 이성계가 변방의 장수이며 조상대대로 원을 섬겼기에 고려 중앙의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는 설정을 보여주는 장치로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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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제5회 ¶
정도전이 원나라 사신 맞이를 거부하였다는건 역사적 사실이다.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이 공민왕을 지하에서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며 사신맞이의 불가를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정도전이 경복흥의 집에 가서 "내가 마땅히 사신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에 묶어 보내겠다."라고 한 다음 명덕태후에게 "사신 맞이는 불가하다"라고 고하자 경복흥과 이인임이 분노하여 그를 회진으로 귀양보냈다. 물론 극에서 경복흥의 집이 아닌 도당에서 칼부림(?)을 했다거나 이인임의 멱살을 잡았다는건 당연히 픽션이다. 정도전은 이후 2년간 유배살이를 한다. 다만 이 일은 안사기가 돌아온 김의의 수행원을 대접했다는 죄목으로 박상충에게 탄핵당해 자결한 이후의 일인데 본작에선 이 사건이 그 앞으로 앞당겨졌다. 애시당초 나하추는 우왕 1년 정월과 5월에 각각 사신을 보냈는데 본작에선 시간 문제상 그 둘이 합쳐진듯. 전체적으로 우왕 1년에 있었던 사건들이 시간 구분없이 뒤섞인 느낌이 강하다.
신진사대부들이 북원과의 화친을 반대한건 사실이고 정몽주와 정도전이 그 중심에 있었던것도 맞지만 정도전의 성균관 농성이나 최영의 성균관 난입 후 진압은 픽션. 물론 나중에 박상충 고문때도 나오겠지만 최영이 신진사류 쪽에 호의적이진 않았다는 건 맞다. 유배지역이 전라도 나주의 부곡이었던것은 실제 사실이 맞다. 이인임이 정도전이 태후에게 사신 맞이 불가를 아뢰자 공무를 보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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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제6회 ¶
이성계의 개경 인맥이 상당히 생략된 모습을 보여주는데 경처였던 강씨 집안과의 관계 외에도 큰아들 방우(진안대군)와 둘째 방과(영안대군, 정종)는 지윤의 딸과 혼인했고, 강씨 소생 막내딸(경순공주)는 이인임의 동생 이인립의 아들인 이제(흥안군)와 혼인했기 때문에 권문세족 집안과도 인맥이 어느 정도 있었다. 다만 이인임 집안과의 혼사는 이성계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재료로 18화에 나오긴 하고 지윤과의 인맥은 지윤 자체가 스토리에서 비중이 생략되어서(...) 같이 생략된듯. 어쨌거나 이성계 집안 자체가 워낙 오랜 기간 변방에 있었고 저렇게 대놓고까진 아니었겠지만 은근히 차별하는 것은 있었을것이다.
안사기 사건의 세부적인 묘사가 다르다. 안사기가 김의의 수행원을 대접하여 박상충에게 탄핵당한 것까지는 같다. 고려사에서는 안사기를 탄핵한 후에 마침 판사(判事) 박사경(朴思敬)이 북원에서 돌아와 태후에게 보고하기를 "나하추가 저더러 '당신 나라 재상이 김의를 보내, 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니 심왕을 받들어 왕으로 삼기를 원한다고 청하기에 황제께서 그렇게 한 것이오. 만약 전 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조정이 꼭 심왕을 보내지는 않았을 거요.'라고 일러주었습니다.'"라고 하자 태후가 이인임을 불러, "듣건대 재상이 김의를 원나라에 보낸 지가 오래되었다는데 경들만 어찌 모르는가?"라고 꾸짖고 박상충의 상소를 도당으로 보냈으며, 왕명으로 하옥될 위기에 처하자 안사기가 도주 후 자결, 그 목을 효수했다고 되어 있다.
드라마에선 이 점을 각색하여 안사기의 조작책 중 하나가 정몽주를 포함한 신진사대부 측에게 미행당하고 확보당할 즈음에 칼을 꺼내들어 일행을 베어 위협하던 중, 지나가던 이성계에게 칼날을 잡혀 제압당해 신변을 확보당한 뒤 자백하는 바람에 들통났다. 거기다 국문은 최영이 하므로 자백 안하고 못 배길 상황이라, 이인임이 몰래 찾아가 '당신 가족들의 목숨을 내 수하들이 쥐고 있으니 동이 틀 때까지 자진해서 가족들의 목숨은 보전하라'고 강요했다. 안사기는 비빌 구석이 있다면서 역관광을 보내주겠다 했지만 이인임이 안사기 부인 것으로 보이는 노리개를 내밀었고, 마음이 급해진 안사기가 최영과 정몽주를 면담하고 싶다고 한 사이에 그 틈을 노린 이인임의 자객의 화살에 맞고 사망. 사실 노리개는 원래 이인임이 갖고 있던 것으로 순전히 뻥카였다. 이인임의 자객은 사실 안사기의 가족이 아니라 안사기 본인을 노리고 있었던 것. 이인임이 "노리개라고 무조건 제 부인의 것이 아니거늘..."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압권.
정도전이 유배지로 가기 전에 맹자를 정몽주에게 받는데 삼봉 본인이 후일 회고한 바에 따르면 정몽주에게 맹자를 받은 것은 그가 한창 영주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20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제사를 지내면서도 짬을 내서 한장 한장 열심히 읽었고 책을 보내준 정몽주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는 회고도 덧붙였다. 어쟀거나 그러니 '으아니 이 계집이 나으 카와이한 몽주가 보내준 책을 불태우다니!'라는건 픽션.
정도전이 부곡백성들을 막 가르치려 들면서 좌충우돌을 하는데 실제 정도전 본인도 처음에 유배를 왔을때는 오만한 마음으로 백성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나중가니 백성에게 부끄러웠다고 하고 있다. 삼봉의 글 답전보에서 한 노인에게 깨우침을 받고 '노인장을 진정 스승으로 뫼시고 가르침을 받아도 되겠습니까?'라고 하다가 거절 당한 일을 적은 일도 있다.
황연은 실제 정도전이 머물던 집의 보수주인이 맞다. 정도전의 저서 삼봉집에서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갔을 당시 '황연의 집에서 살았다'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정도전은 황연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지만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술을 잘 마셨고 그의 집에서 술을 잘 빚었는데 술을 빚으면 항상 나를 청해 함께 마셨다"라고 기록해 두고 있다. 다만 황천복이라던가 업둥이 관련 내용들은 당연히 죄다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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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제7회 ~ 제8회 ¶
나주부곡에서 정도전이 겪은 중요한 에피소드인 답전보(答田父)[5] 내용이 생략되었다. 작중에선 황천복이나 업둥이 관련 에피소드로 대체된듯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만 드라마에서 새참을 먹다가 농민들이 정도전에게 "나으리는 무슨 죄로 오신 겁니까?"라고 질문하는 건 답전보에서 늙은 농부가 정도전에게 "그대는 무슨 죄로 왔는가?"라고 질문한 것에서 모티브를 따 온 듯한 부분.
이인임이 칼을 차고 명덕태후의 침소에 가서 명덕태후에게 칼을 겨눴는데 실제로 이랬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대역죄다. 거기다가 명덕태후는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는 최종 결정권자였으니. 이인임도 그걸 알기에 태후가 협박에 굴하자 가져온 칼을 선물로 가져온 명나라산 보검이라는 핑계로 바치고 발뺌하였다.
작중에선 최영이 이인임에 의해 어쩔수 없이 신진사대부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원래도 최영이 신진사류에 그렇게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긴 했다. 어쨌거나 우왕 초기 신진사류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건 사실로 정몽주 역시 이 시기 언양[6]으로 2년간 유배를 떠난적이 있다.
이색이 작중 유폐되는데 원래 역사상으로 이색은 1374년에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고 이후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 판삼사사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가 되었다. 이색이 유폐되었다는건 그러니 각색이다.
실제로 정몽주와 이성계의 사이가 돈독한 것은 맞았지만, 이성계가 정몽주에게 성균관에서 조언을 하고 이 일로 이인임한테 이성계가 찍이는 것은 극을 위한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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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제9회 ¶
이 시기 왜구의 침략이 해안가를 벗어나 내륙으로 침투하는 상황이었으니 왜구의 나주침공 자체는 이상한게 아니긴 하지만 정도전이 유배지에서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주변사람들을 모두 잃고 망연해 하는 것은 당연히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박상충이 유배지로 가다가 고신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둔 것은 역사적 사실이 맞다.
임견미가 양광도에 왜구가 침입하자 상원수로 출정하여 실질적 전투는 이성계가 다 했음에도 공을 낼름 독차지하고, 왜구의 잔당들이 삼남 지방으로 갈 수 있다고 이성계가 경고하는 것도 부월을 들어 목에 겨누며 위협해 무시하고 개경으로 귀환한 이후 공을 독차지하면서 최영에게 있는 도성의 치안권도 이인임이 그에게 넘기려 하고 이성계로부터 왜구의 잔당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고받은 최영이 이를 대비하라는 것에 군사적으로 최영에게 짬도 안 되는데도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추태를 보이거나, 왜구의 잔당들이 준동할 가능성이 사실인 걸 안 이인임이 난 화분을 내뎐지면서 최영에게서 치안권을 뺏을 기회를 놓쳤다며, 불같이 화를 내면서 갈굼을 당하는 내용들은 그냥 극을 위해 극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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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제10회 ¶
1380년으로 6년이나 타임슬립하다보니 신진사대부들의 중앙정계 복귀, 지윤과 우왕의 유모 장씨의 숙청이라던가 최영의 홍산대첩, 염흥방의 변절과정, 왜구의 수도 개경 위협을 두고 이인임과 최영간 천도를 두고 벌어진 대립, 정몽주의 일본 사신 파견, 이인임에 의해 우왕의 스승으로 임명된 이색, 경복흥의 탄핵 이후 사망과정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죄다 생략되었다. 다만 명덕태후 승하는 대충이나마 그려낸듯. 경복흥의 사망은 내레이션으로 나오고, 정몽주의 일본 사신 파견은 이인임이 그를 조전원수로 보내려할 때 대사로 언급되었다. 문하시중 경복흥이 축출된 뒤 이인임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여전히 수시중이라고 불리고 있다. 진포해전은 간단히 내레이션 및 승전 장계로 언급되는 수준에서 그쳤고 대신 미니다큐에서 군산시 진포해양테마공원을 다루면서 조명하였다. 여기서 생략된 사건들은 주인공인 정도전과 연결하기가 어렵다는 이유가 큰 것으로 보인다.
작중에선 정몽주가 이색에게 '삼봉이 유배지에 있은지는 6년이요 나주에서 영주로 옮겨간것'이라는 말하는것이 나오고 이후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가는 조건으로 정도전의 경외종편[7]을 언급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가평부곡에서 약 2년을 보낸 정도전은 우왕 3년 고향인 영주에 가서 생가인 삼봉(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을 왕래하면서 4년을 지내다가 그 후 유배가 완화되어 사면하여 편의대로 거주지를 선택하게 하자 삼각산과 부평 등을 전전하며 후학을 기르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성계와 정몽주가 황산에서 왜구와 싸우고 있을 무렵이면 정도전은 아직 영주에 있어야 한다. 작중에서 왜구 침입으로 인해 난민신세로 떠돌게 된 것은 정도전과 이성계, 정몽주와의 관계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각색으로 보인다.
이성계의 경우도 그런데 우왕 3년(1377년) 왜구가 강화도까지 침범하자 조정은 이성계와 변안열 등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경기도통사가 된 이인임의 지휘를 받도록 했었다. 이때 6도도통사로 군을 지휘한 것이 최영이며 1377년은 최영의 홍산대첩 다음해였다. 이성계는 황산대첩이 있기 전에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왜구와 맞서 싸웠는데 본작은 이성계가 함주에만 머물러 있다가 강씨의 꾀병으로 개경에 올라온다는 설정으로 역사와 맞지 않는다. 애시당초 우왕 초기 왜구의 칩입은 고려가 국운을 걸고 싸워야 할 만큼 치열했는데 그 6년의 세월을 다 까먹다 보니 이성계가 함주에서 태평한 세월을 보내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1380년으로 건너뛰기 전에 나주의 왜구를 이성계가 토벌하는 장면이 나왔으니 역사를 아주 무시한 건 아니다.
황산대첩에 중요한 인물이 빠졌는데 당시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장에 종군했고 황산대첩 당시에도 아버지와 같이 싸운 젊은 시절의 이방과가 등장하지 않는다.
작중 아기발도가 고려 조정에 개경을 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서신을 보내는데 이 자체는 실제 사실이 아니나 당시 왜구의 세력은 엄청나게 강하여 남원성 전투 당시 아기발도가 "장차 광주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만큼 사근내역 전투 이후 왜구의 기세가 등등하였다.
남원성에 있던 배극렴이 새파란 부원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며 불만을 가지다, 이성계가 먼저 다가가 고개를 숙여, 배극렴이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게 되는데 당시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있을 법한 일이다, 배극렴이 이성계보다 10살이 더 많다. 훗날 배극렴이 국새를 들고 가서 이성계의 즉위를 청하고 1등공신이 되는 만큼, 불만을 가지던 이도 감화시키는 이성계의 모습을 위한 픽션으로 보인다.
작중 고려군은 여러명의 원수가 등장하는데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 시기 원수란 원래는 유사시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기 위한 임시기구였다. 그러다 공민왕 이후 많은 전란을 겪으며 점차 상설화되기 시작했다. 개인이 원수직을 계속 맡으며 해당 지역이 원수 개인에 예속되어갔다. 더구나 여러 원수가 동시에 한 지역에 임명됨에 따라 지휘체계의 혼선마저 불러왔다. 여러 원수들을 배치하여 전투에 동원하는 것 역시 각 원수가 보유한 전력을 전장에서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앙의 정규군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물론 이성계의 경우엔 원래 동북면의 독립세력에 가까워서 그 자신이 가진 정예사병이 원래 있긴 했다.
왜구들이 세워둔 깃발에 오토모,모리,후호조씨 등등이 있는데, 오토모 가문이야 큐슈의 대영주니 그렇다 치더라도 모리 가문은 이 당시 주고쿠 지방 아키 의 소영주였고, 후호조씨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시점이다. 고려 고증에 지쳐 일본 고증에는 크게 신경쓰지 못했거나 다른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에 썼던 장비들을 재활용한듯하다. 그런데 후호죠씨는 임진왜란 직전에 이미 멸망했다. 점점 미스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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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제11회 ¶
작중에선 이성계가 신중한 태도로 나와서 이지란과 다른 원수들이 갈등을 빚는데 실제 역사상에선 다른 장수들이 다 왜구가 있는 험지공격에 신중한 태도로 나서나 이성계가 분연히나서 "군사를 일으켜 의기를 내 대적함에 오히려 적군을 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지금 적군을 만나 치지 않는 일이 옳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출정했다. 황산길에서의 전투 역시 변안열 등의 구원으로 어렵게 승리를 거둔 극과 달리, 황산 정상에 오른 뒤 주력군을 이끌고 평탄한 길로 진군하던 다른 장수들이 후퇴하는 사이 이성계는 홀로 세 차례나 적을 무찌르며 적의 본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온통 진흙탕이라 함께 뒹굴며 악전고투를 치렀음에도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었던 압도적인 승리였다.
황산대첩의 경우 실제로는 좁은 뻘판과 산속에서 난전으로 진행되었다. 극중에선 이성계가 말을 타다가 중간부턴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데 실제 역사상에선 이성계가 몇번이나 말이 죽어서 계속 바꾸어 타야 할 정도였고 실제 화살을 맞기도 했는데 극에서와는 달리 실제 화살은 왼쪽 다리에 맞은것. 오죽했으면 중간에 난전 상황에서 적 장수가 이성계 뒤로 들어갔는데 미처 이성계가 확인하지 못해서 이지란이 급하게 이성계에게 외치고 바로 적장을 화살로 쏘아 죽였어야 할 정도였고 곧이어 이성계가 적에서 포위되어 기병 몇명과 돌파하여 빠져 나올 정도로 지독한 난전이었다. 이 부분은 극중에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이성계가 부상당한 이지란을 구하지만...
작중에서 이성계는 주로 칼을 쓰지만 역사상으로는 이성계가 대우전과 유엽전으로 수십여명을 쏴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부분은 잘 나오지 않은듯. 다만 각색으로 중간에 왜구가 남원성의 고려군을 희롱할때 큰 화살로 왜구들을 일격에 격살하는 장면이 나오긴했다.[8] 또 황산대첩은 기병도 활약한 전장인데 한국사극의 한계인지 이 부분도 잘 나오지 않았다. 사실 고증대로 하려면 산지를 기병으로 달려가면서 싸워야 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이미 답사한 선비들이 '어떻게 이런 거친 지형에서 기병으로 활약했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이므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울 듯 하다.(…)
아지발도가 이성계가 온 것을 알고 이성계를 언급하는데 실제 역사에선 이성계의 이름을 바로 언급했다기 보단 이성계의 포진을 보고 아기발도가 "이 군대의 세력을 보건대 결코 지난날의 여러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의 전쟁은 너희들이 마땅히 각기 조심해야 될 것이다"정도로 말했다고 한다.
아지발도를 죽인 게 이성계와 이지란의 콤비네이션인 건 맞지만 작중 나온 내용은 어쌔신 크리드과장된 것으로, 원래는 아지발도가 전장에서 날뛰고 있는 가운데 이성계가 보고 투구를 저격하고 이지란이 마무리 샷을 넣은 것이지만근데 이것도 개사기잖아 여기선 이성계, 이지란이 적진으로 말 타고 돌격해서 가만히 있는 아지발도를 화살 콤비네이션으로 죽이고 마무리 샷으로 이성계가 넣었다. 원래 역사상에선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활약상에 감탄해 저자를 사로잡을 수 있겠느냐고 이지란에게 묻자 이지란이 저놈 잡으려면 군사가 상할 거라고 언급하여 그냥 죽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선 그냥 사로잡을만한 상황에서 이지란이 아닌 이성계가 죽이는 게 다르다. 영거리 사격이 멋있긴 하다. 이성계의 활을 부각시키기도 좋고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죽인 곳도 기록에 있는 산 정상이 아닌 평지다.
이성계의 승전 이후 개선 과정에서 역사상으로는 말을 타고 오던 이성계가 최영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말에서 내려 최영에게 절을 했고, 이성계의 절을 받은 최영도 맞절을 하더니 감격에 겨워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공이 아니면 누가 이일을 했겠는가'라고 하자 이성계가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는식으로 말했는데 다시 최영이 '삼한이 일어난것은 이 싸움에 있는데 장차 나라가 누구를 믿겠는가?' 하는 부분이 생략. 우왕이 금 50냥을 하사한것도 사실이지만 역사에서는 이성계가 그 금을 사양했다고 되어 있다. 사대부 중에 이색과 권근이 이성계의 전공을 찬양하는 시를 올린것은 사실같이 시를 짓고도 언급이 안된 김구용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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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제12회 ~ 제14회 ¶
작중 보이는 이인임과 이성계의 극한 대립이나 이성계의 미륵사건 연루, 이성계의 이인임의 명나라 사신강요 등이야 이인임이 이성계를 경계했다는 실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각색들이다. 이쯤에서 극에선 이성계 이색을 만나게 되는데 후일 위화도 회군에서 이색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조선개국 이후 태조가 이색의 목숨을 구명해주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친분이 없진 않았을것이다.
양지와의 에피소드는 1382년에 있었던 미륵사칭 에피소드를 각색한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금이라는 자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여 "만약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이르러 해와 달에 모두 빛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헛된 요설을 퍼뜨려 체포당한 사건을 뜻한다. 당시 이를 계기로 성리학자들은 불교억압의 명분을 얻기도 하였는데 극에서 양지를 구하려고 애쓰던 정도전과 달리 실제 정도전은 이를 매우 깠다. 당시 찬영이라는 유명한 승려가 이금을 비판했는데 정도전이 "석가나 저놈이나 다를것이 뭐냐?"라고 디스하여 입을 다물게 만들기도. 물론 오리지널 캐릭터인 천복이가 개입된 이방원과 정도전의 첫 만남도 픽션으로 둘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첫 만남을 가진 1383년 이후에야 만나게 되었을것이다.
이방원이 이방석이 태어나자 강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가 질색팔색 하는데 사실 기록상 조선 건국 이전까지는 이방원 등 신의왕후 소생의 자식들과 신덕왕후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정몽주를 죽이고나서 이방원이 격노한 이성계에게 꾸짖음을 당할때 신덕왕후를 "어머니 왜 저를 위해 변명해주시지 않나요?"라고 빌자 신덕왕후가 이성계에게 한소리 하기도 했고.이래놓고 나중엔 신덕왕후가 나한테 은의가 없었다고 한 이방원 용의 눈물에서도 이방석의 세자 책봉 전까지는 이방원이 신덕왕후를 극진히 모신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것들을 뒤엎고 처음부터 이방원과 신덕왕후가 대립하는 것으로 나온 것은 이후 세자책봉 과정에서 정도전으로 인해 두 사람이 멀어지는 부분을 간략하게 위함일 수도 있다.
12회에서 염흥방이 정도전을 떠보기 위해 이인임의 명을 받고 정도전의 학당인 삼봉재를 세 번에 걸쳐 때려부수었는데, 정도전이 실제로 귀양에서 풀려난 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후진들을 양성했을 때 그때마다 반대 세력에 의해 학당이 박살난 사건을 어레인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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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제15회 ¶
극중에 이성계가 호바투와 맞서기 위해 출진한 동북면 진중에 방원이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과거합격장인 홍패를 든 채 이성계를 찾아와 과거에 급제한 것을 알리는데 이성계의 반응이 영 냉랭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이방원이 이성계 가문의 첫 과거급제자여서 이성계가 매우 기뻐하였고 이방원의 과거 사령장을 몇 번이고 읽게 했다고 한다. '군인 집안'이라는 열등감을 확 씻어준 아들에 대한 태조의 기쁨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전반적으로 본 작품에서 이성계가 아들인 이방원에게 좀 냉랭한 편인데 실제역사에선 정몽주를 죽인 이후부터 눈 밖에 나기 시작했으며 그전까지는 아끼던 아들 가운데 하나였다.[9] 하지만 작중에서는 이지란이나 정몽주가 칭찬하자 미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장면이나 신이 나듯 어사화를 여러번 돌려보고 만져 보고 하는 행동 등으로 내심 기분이 좋은 듯한 묘사를 보여 주었으니 단순히 반응이 냉랭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단지 실제 역사에선 몇번이고 합격장을 읽게 할 정도로 난리를 피우며 좋아한데 반해 본작의 이성계의 반응이 너무 침착한게 문제일뿐. 이는 제작진이 작중의 이성계의 캐릭터에 맞춘 각색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작중에선 이성계에게 이방원이 무장이 되고 싶다 의견을 피력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문신으로서 일했다. 뭐 실제역사에서도 사냥을 좋아하는 등 무인 기질이 없었던것은 아니지만. 아버지에 대한 동경심과 젊은이의 혈기로 인한 것으로 보면 어느정도 극적 허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방원의 과거 급제에 정몽주에게 가르침을 받은 식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기록에는 없다. 이방원의 스승은 장인이 되는 민제[10]와 당대의 문인인 운곡 원천석이다. 다만 이성계와 정몽주가 친밀했던 것을 감안하면 정몽주가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 정도는 있을 것이다.
작중 최영이 쌀을 가지고 장난을 좀 친 상인을 가혹하게 처벌하는데 정도전과의 극중 대화는 각색이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백성들에게 엄한 인물이었다. 전쟁시 군사들이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곧 참형에 처했으며,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배 2000척(!)을 만드는 과정에서 독단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다고 한다. 또 상인들도 별로 좋게 안 봤는지 벼슬을 구하는 사람에게 "네가 공장(工匠)이나 장사꾼의 일을 배웠다면 절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갈하기도 했고 최영이 갈고리를 들고 상인들에게 호통치는 것 역시 고려사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우왕이 궁궐 지붕 위해 올라가 광포한 행동을 하고 환관을 활로 쏘기도 하는데 실제로 우왕이 궁궐 지붕에 올라갔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극중에서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동북면으로 갈 때 정몽주와 서로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한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 상으로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난 것은 정몽주의 추천 덕분이었다. [11] 그러나 이미 황산대첩 이전에 정몽주가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을 주선하였다가 불발된 사건도 있고, 이후로 가끔 정몽주가 정도전을 극찬하는 말을 이성계에게 하곤 했으므로 역사적 사실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긴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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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제16회 ¶
극중에서 만남을 가진 이성계와 정도전이 그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다. 이방원과도 악연이 있을 뿐더러 이성계와 이지란도 탐탁치 않아하는 눈치. 용의 눈물의 정도전이 태조에게 충정을 다 바치고 자신을 낮추는 일반적인 조선 사극의 충신이었던 것과는 분명 거리가 있는 묘사고 실제 역사에서 정도전이 처음 이성계를 찾아갔을 때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이게 가면 언제 다시 만나나 하며 시를 짓거나(해설로 설명하기는 했다) 이성계가 정도전을 돈독히 대우했던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모습. 정도전이 이성계의 군영을 보며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동남방의 왜구를 치는 것을 이릅니다."라고 둘러댄 것은 실록에 그대로 나와 있는 대사다.
이방원이 떠나기 전에 대학연의의 글귀를 말하고 떠나면서 이성계가 대학연의를 구해 읽는데,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성계가 평소 학문을 즐겨했으며 대학연의를 즐겨 읽었다고 기록되었다. 대학연의는 비단 이성계 뿐만 아니라 태종과 세종도 여러 번 읽은, 여말선초 시기 제왕학의 교과서로 손꼽힌 책이었다.
이방원이 본격적으로 아버지에게 정치적 조언과 계책을 내보이는데 사실 이방원이 본격적으로 이성계 일파의 핵심으로 떠오른건 위화도 회군 이후 20대의 일이다. 이때는 아직 10대로 책을 읽고 과거에 응시하는 나름대로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극중 우왕과 정비의 미묘한 관계가 드러나는데 실제 역사상에도 고려사에 정비의 처소를 자주 드나들고 밤에도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비 열전에는 아예 공민왕의 후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 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를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조정에 올린 '안변책'을 정도전이 선물로 가져간 식으로 묘사되었는데, 기록상에 안변책은 이성계 본인이 직접 지은 글이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12] 하지만 안변책 내용을 상세히 보면 백성에 대한 조치나 내정 개혁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어 신진사대부들의 이념이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다. 정도전과 이성계가 만난 시기와 이성계가 안변책을 올린 시기가 비슷한 것을 감안하면 정도전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어쨌든 근거 없는 묘사는 아니다.
이인임이 이성계를 억누르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붙잡아 놓는 것을 모의하는 장면의 표현이 시대적, 상황적으로 보았을 때 부적절하다.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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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제17회 ~ 제18회 ¶
작중 이인임이 이성계에게 역심이 있다 모함하는데 당대 이인임을 비롯해 이성계를 경계하고 모함하는 이들이 실제 있긴 한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 즉위전 기록 가운데 "태조는 최영과 친밀한 정이 매우 돈독하였는데, 태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로 성하니, 사람들 중에서 우왕에게 무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위급하면 마땅히 누구를 시키겠는가?"라고 한 기록이 있다. 물론 이성계의 석고대죄나 상투를 잘랐다는 같은건 전부 픽션.
이인임과 이성계의 사돈관계, 왕가와의 사돈관계는 실제 있었던 일이 맞다. 이 일로 인해 후일 왕씨가 도륙날때 이성계와 사돈을 맺은 집안은 무사하게 된다. 물론 역모에서 벗어난 후 이인임을 국부로 올린 대가로 그리되었다는 건 픽션.
우왕이 이인임을 아버지처럼 모셨다는 건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동국통감에 따르면 우왕 10년 기록에 "우가 이인임(李仁任)의 처 박씨(朴氏)와 더불어 이인임의 별서(別墅)에 가서 매우 즐기었다. 우가 일찍이 이인임을 일컬어서 아비라고 하였기 때문에 박씨도 역시 어미라고 존대하여 불렀는데, 이때 우가 봉가이(鳳加伊)를 총애하여 항상 이인임의 집에서 유숙하였으므로, 이인임이 별서에 나가서 거처하였다."고 되어 있다. 물론 극중에서처럼 국부급으로 대우하진 않았겠지만.
여기서 봉가이는 덕비 조씨의 본래 이름으로 우왕은 정실왕비 없이 9비 3옹주(九妃三翁主)라는 12명의 비빈을 두었다. 이는 조모인 명덕태후 홍씨가 죽은 뒤 대부분 강제로 차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축출한 뒤 창왕의 생모인 근비와 현비, 그리고 앞서 우왕의 유배행을 동행한 최영의 딸 영비 최씨와 명순옹주를 제하고는 모두 폐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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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제19회 ~ 제20회 ¶
이인임이 병에 걸려서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는것은 역사적 사실이 맞다. 다만 병으로 물러난것은 1387년이며 실각한것은 1388년인데 3년간을 타임 워프해서 인지 이게 합쳐진듯, 어쨌거나 위화도 회군이 있었던 1388년에 졸했으니 건강이 나빴던것은 맞는듯...물론 정사엔 특정 질환에 대한 얘기는 없고 나이가 많고 병에 걸려서 물러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하륜이 이인임을 진맥하는데 하륜이 기본적으로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천문이나 의술, 풍수, 지리 등의 잡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부분에도 전문가 수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 점을 여기서 보여준 각색인듯.
남은이 다시 등장했을 때 푸념하듯이 말똥이나 치우는 궁의 마굿간 담당 하급관리로 지내는 것처럼 나왔지만 실제 역사상으로는 왜구를 잘 상대하여 중앙관직에 복귀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임명된 상태였고 이후에 이름 옆에 관직명이 나오면서 오해가 풀렸다. 이 사복시정은 궁궐 내 마필과 어가를 관리하는 사복시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벼슬이고, 품계로 따지면 정삼품인 고위관직이다.
염흥방이 조반의 땅까지 빼앗다가 최영의 반발을 사는것도 역사적 사실, 본작의 내용도 이를 각색한 것이다. 역사와는 살짝 다른게 극에선 염흥방이 조반이 뭐라하던 씹다가 최영이 조반의 말을 듣고 항의하여 이인임이 돌려줄것을 명하지만 본작에선 이후 염흥방이 최영과 조반을 역모로 몰자고 하는데 실제로 염흥방이 조반을 역적으로 몰긴했다. 역사상에서 최영이 개입하는건 이후의 일. 또 실제 역사상으로 조반이 염흥방에게 애걸하여 토지를 돌려받았으나 이광이 다시 그 토지를 빼앗고 조반을 능욕하였고 조반이 이광을 찾아가 애걸하자 이광이 조반을 업신여기고 더욱 못되게 굴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조반이 이광을 참살, 이후 우왕이 염흥방과 임견미를 제거하기 위해 최영과 만나 논의한것도 사실이다. 나머지 정도전이나 남은의 모습이야 각색이지만...
중간에 고려의 관복이 바뀌는데 이는 1387년부터 명의 관복을 들여서 사용했기 때문,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조선 초기 관복의 모습이 된다. 관복에 관해서는 고증 참조.
쌍매당 이첨이 이 시기에 극에 다시 등장하는데 유배 한 10년가 있다가 1388년에서야 풀려서 그렇다.캐안습
작중 우왕이 국고가 부족하니 염흥방, 임견미 등에게 채우라고 하는데 실제 당시엔 관리에게 녹봉을 지급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후 우왕은 염흥방을 체포하면서 "재상들은 부유하니 녹봉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먼저 먹을 것이 없는 군졸들에게 지급하라."라고 말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염견미는 관리들에게 정해진때 녹봉을 주는게 제도인데 말이 되느냐면서 반란의 빌미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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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제21회 ~ 제23회 ¶
정몽주가 요동에서 명나라에 가지 못하고 돌아온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 맞다. 우왕 13년(1387) 명나라의 요동지역 폐쇄조치에 따라 이듬해 정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 일행이 요동도사의 저지로 들어가지 못했던것. 이후 밀직사사 조림이 요동까지 갔다가 명나라에 입국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왔다.
임견미가 잡히면서 '이인임, 네가 내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네가 날 그르치는구나.' 라는 말을 했는데, 실제로도 했던 말이다. 이는 임견미와 염흥방이 예전에 최영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으나 이인임이 막았었고, 또 최영을 숙청하자고 제안했으나 이인임이 거절했었기 때문이다.
작중 염흥방과 임견미가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잡히는걸로 묘사되는데 임견미는 실제로 군사를 모으려다가 잡힌게 맞지만 염흥방은 조반을 국문하려고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우왕이 의원을 보내 조반에게 약을 하사한 후 곧 본인과 모친 및 처를 석방하고 또 의약품과 가죽옷을 보낸 다음 염흥방을 순군에 하옥시켜버렸다.
작중 나레이션으로 나오지만 1천여 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악질 종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모두 재산을 몰수한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부인들은 고문을 당해 모두 옥중에서 죽었고 사형당한 자들의 자손도 죄다 몰아다 죽이면서 심지어 갓난아이까지도 모조리 강에 던져버리니 숨어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사형당한 자의 처와 딸을 적몰해 관비로 삼으니 모두 3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작중에선 우왕이 이인임의 꾀병과 말에 흔들리면서 이인임을 구하려고 하고 최영이 동정론과 우왕의 명령 때문에 이인임 처분에 소극적인 것처럼 그린 것 같지만 실제로 우왕이 이인임을 구하려 하기 했다기보다도 최영이 적극적으로 이인임의 목숨만은 살려주자고 주장했다. 작중에서 말한것처럼 이인임의 과보다 공이 크다고 한것도 사실. 정확하게는 "이인임이 정책을 올바르게 세워 대국을 섬김으로써 국가를 안정시켰으니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라고 말했는데 최영과 이인임이 둘 다 친원쪽에 가까웠던걸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발언. 또 작중에서 이성계가 이인임을 제거하자고 하며 최영과 극렬 대립하지만 역사상으로 그런쪽의 대립은 없었던듯.
당시 이성계가 염흥방, 임견미에게 등용되어 지금 조정에 이들의 천거로 들어오지 않은 이들이 없으니 굳이 다 쳐내지 말고 재능을 가려서 쓰자고 최영에게 간하고 또 혹형으로 다르릴 필요는 없다고 말했지만 최영이 듣지 않았다 한다. 실제로 드라마 내에서도 이성계가 이색과 대화하면서 최영이 지나치게 가혹하게 형을 집행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작중 이인임이 최후의 계책을 세워 어떻게든 정계에 복귀하려고 하는 장면이 그려지지만 이건 각색이고 실제로는 최영과 이성계의 급습에 도망쳐서는 최영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울부짖다가 그대로 추포되어 귀양크리...이 장면 자체는 23화에 재현된다.
임견미가 최후의 발악으로 어찌 피래미만 잡느냐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론 당시 백성들이 한 말로 이인임이 살아나자 "임견미와 염흥방의 일당 가운데 괴수는 그물을 벗어났다."고 한탄했으며 또, "정직한 최공이 사사로운 정으로 늙은 도적을 살려주었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이 말은 23화에서 윤소종이 유배가는 이인임을 보면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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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제24회 ~ 제25회 ¶
극중에서 최영이 요동정벌론을 제시하자 많은 중신들이 반대하는데 실제 역사상에서 친명파 사대부의 반대가 심했던것은 사실이다.
극중에선 4불가론을 제시했을때 우왕과 최영이 같이 호통을 치며 이성계를 극딜했고 전략상 조언부분은 스킵되었으나, 기록상으론 4불가론을 제시했을때의 분위기는 그렇게 과격하지 않은 편이었다. 우왕도 '듣고보니 그럴싸한데?' 정도로 생각했고, 최영도 그렇게 엄청나게 격정을 내면서 의견을 무시한게 아니라 수시중 이성계의 위치를 생각해서인지 이성계의 앞에서는 동의하는듯 말하면서 나중에 우왕과 독대하여 재설득해 마음을 돌려놓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다만 실제 기록에서 전략상 조언을 할때에는 꽤 언성이 격해졌긴 했다. 게다가 정 원정을 하려고 하신다면 가을까지만이라도 원정을 연기해달라는 이성계의 발언이 완전히 빠졌다. 극중 진행을 위해 압축하다보니 이리 묘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위화도 회군 때 남은이 정도전에게 '회군'이라 적힌 서찰을 받고 이성계에게 회군을 해야한다고 말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남은은 회군 여론을 조성해 이후 '무진회군공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남은이 회군과정에서 회군을 주도하는 명분을 만든것은 사실이지만 정도전과의 연계는 당연히 각색.
건원칭제가 묘사되었다. 최영이 요동 정벌을 선언하면서 연호를 쓰고 우왕을 황제로 받들 것이라 한것. 그러나 사서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기존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로 돌릴 것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각색이 좀 심한 부분이긴 하다. 다만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옛 고려의 영광 나아가서는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위성을 설명하려면 우왕을 황제로 떠받드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긴 하다. 또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우왕을 황제 폐하로 부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또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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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제26회 ~ 제28회 ¶
위화도 회군 과정에서 있었던 회군 요청이나 환관 억류등의 사건은 역사와 그다지 큰 차이점은 없다.
작중에선 정몽주가 회군병력이 개경에 돌입하기 직전 이성계의 군영에 찾아가 그의 본심을 알아보기 위해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선 개경에 돌입한 이성계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것은 정몽주의 스승 이색이었으며 당시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본작에서 잘 나타나지 않는것이지만 실제 역사에선 정몽주 못지 않게 이색과 이성계가 친분이 두터웠던 편.
회군한 공요군과 최영의 근왕군이 개경 도성 내에서 시가전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수창궁 침전에서 1대1 대결을 벌인 것은 당연히 각색이다. 실제 고려사 기록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후원에 있었고, 팔각전에 든 우왕이 최영을 내주려 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며 이별한 후 그대로 체포되어 고봉으로 유배된다. 역사와 대사도 다른데 정사상으로는 이성계가 최영에게 당시 "이번일은 내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말했고 최영은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방원이 위화도 회군 당시 가족들을 데리고 기민하게 피신시킨 공을 세운것은 사실이지만 강씨가 포천[13] 농장에 숨었다가 고려군에게 잡히고 이방원이 구출했다는 내용은 당연히 각색, 사실 이 부분은 용의 눈물쪽 묘사가 더 사실에 가깝다.
시가전 장면을 자세히 보면 수레를 엎어서 길목을 차단해놓았다. 이는 고려사에서도 '각 도로부터 구원병을 징발해 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 수레를 긁어모아 거리 입구를 봉쇄'했다고 언급되는 것으로 깨알고증이다.
윤소종이 이성계에게 한서 곽광전을 바친 것은 태조실록 윤소종 졸기에 언급되어 있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극중에서는 우왕 폐위 관련으로 정몽주가 정도전과 갈라서기 시작하고, 이성계와도 갈등이 생기지만 실제 역사상으로는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올릴 때까지 정몽주는 이성계와 행동을 함께 했다. 이성계 일파로 여겨져서 심지어 반이성계파의 테러 대상 중 하나로 거론되었을 정도. 정몽주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와 갈라선 것은 공양왕 때 이다. 정몽주의 충신 이미지를 강화하고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각색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무장들의 우왕의 폐위 요구에 망설이는 장면 또한 드라마 상 각색이다. 다만 이후에 극중에서 조민수와 이성계가 미는 차기 왕이 달라지는데 실제로 역사상의 이성계는 우왕을 폐하고 아예 다른 왕족을 세울 작정을 하고 있었지만 조민수의 반대로 창왕을 옹립하게 된다. 이때 조민수가 이인임을 불러들여 세력을 강화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인임을 만나 후사를 의논한 장면은 명백한 허구다. 조민수가 이인임의 복귀를 건의한 후에야 그가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었으니 해당 시점에서 조민수는 이인임의 생사여부를 아예 모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우왕이 환관들과 함께 이성계를 치려고 했던 것이 각색 아니냐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고려사에도 언급된 사실로, 그만큼 우왕 입장에선 다급한 상황이었다. 이성계가 아예 함정을 파고 있었다는 것은 각색이며, 실제로는 이 때 이성계와 조민수는 도성 외의 군진에 머무르고 있어서 허탕을 친 것으로 되어 있다.[14]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픽션이 지나친거 아니냐는 글을 올렸다가 진짜 벌어졌던 일이었음을 알고 충격먹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출처 : daum 지식 메뉴에서
드라마 <정도전>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근거가 어느 정도인가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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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두 열심히 봤는데 양호당 할아버지 한줄도 안나오고
정평공 인렬 할아버지 상소했다는 부분 두번 들엇어요
어느 회 방영때인가? 정평공 할아버지께서 어느분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는 이야기 만 잠깐, 나오는데, 계속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