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명이 죽고 나 혼자만 살아 남아
증언자: 홍금숙(여)
생년월일: 1964.(당시 나이 17세)
직 업: 고등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9. 11
개 요
1980년 5월 23일 화순 가는 길목 주남마을 부근에서 18명이 탄 미니버스가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함께 탔던 17명은 모두 사망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홍금숙씨의 증언이다. '주남마을 양민학살'로 더 잘 알려진 사건이다.
두 오빠를 찾아나섰다가
1980년 5월 23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내가 탄 차는 광주를 벗어나 화순 쪽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25인승 미니버스로 모두 18명의 남녀 학생들이 타고 있었지요(여고생 2명, 여대생 2명, 남학생 14명). 남학생들은 M1과 카빈 등으로 무장을 했고 차 안에는 무전기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 같았어요.
이곳저곳으로 널을 구하러 다닌다고 했습니다.
나는 광주공원 부근에서 그 차에 탑승했습니다. 오전 내내 어머니와 함께 전남대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오빠를 찾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다 어머니와도 헤어져 집으로 걸어가던 중 그 차를 만난 것입니다. 그때는 시내 교통수단이 모두 마비되었던 때라 집 방향으로 간다기에 올라탔습니다. 우리 집은 나주 가는 길목인 주월동 옥천여상고 부근에 있었읍니다. 그런데 월산동 대창주유소 근방에서 차가 갑자기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다른 곳에 먼저 들렀다가 나주 쪽으로 간다고 해서 내리지 않고 그냥 타고 있었지요. 나는 박현숙이라는 여고 3년생과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제일 뒷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계엄군의 집중사격
차가 광주천을 지나 지원동을 막 벗어났을 때였어요. 군인 한 명이 도로변에서 정지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일단 멈추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차는 더 속력을 내어 달렸습니다.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차를 향해 총탄이 쏟아졌읍니다. 총알이 계속 날아들자 누군가 차를 돌리라고 소리쳤어요. 차를 돌리려는 순간 기사님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차안에 있던 청년들도 산을 향해 총구를 내밀고 응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더 많은 총탄이 날아왔습니다.
잠시 후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한 청년이 총을 쏘지 말고 각자 총을 높이 들어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남학생들은 총을 흔들었고, 여학생들은 양손과 손수건을 흔들며 쏘지 말라고 외쳤읍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총탄세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총알이 차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집중적으로 쏟아졌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중간으로 이동해 의자 밑에 엎드려 있었읍니다.
귀청을 찢는 총성, 살려달라는 비명, 신음 총알이 차에 맞고 튀는 소리 등으로 차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읍니다. 맞은편의 남자는 내장이 터져 차바닥으로 쏟아진 채로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눈을 꼭 감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한 순간 총소리가 멈추고 사람들의 신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긴장 속에서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떠보았습니다. 오른쪽 팔과 등, 옆구리, 엉덩이, 장단지 할 것없이 몸 전체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다행히도 총알이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온몸에 파편이 박힌 것입니다.
가까이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읍니다.
"죽은 사람을 확인해 봐!"
서너 명의 군인이 차 안으로 올라왔읍니다. 그들은 군화발로 한 사람씩 툭툭 차며 생사여부를 확인했습니다. 뒤쪽에서 한 사람이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사람을 끌어내린뒤 공수들은 다시 차에 올라와 소리 쳤읍니다.
"살아 있으면 무서워하지 말고 일어나라."
그러자 이번에는 앞쪽에서 살려달라는 신음소리가 났습니다.
"끌어내. 그리고 다시 정확하게 확인해 봐!"
나는 죽은 듯이 엎드려 곁눈질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화발이 옆구리로 날아왔습니다. 통증이 심해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지요. 사망자를 다시 확인하고 있을 때 구급차가 와 간단히 응급치료를 받고 경운기에 실려 산속으로 옮겨졌읍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공수부대원이 대검을 확 들이대며 "너도 유방이 잘리고 싶냐?"고 위협했습니다. 교련복 차림의 남학생(소지품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학생증이 나왔다)은 눈이 다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살려달라고 애원했읍니다. 다른 한 분은 상처가 심해 보였지만, 교련복 차림의 학생은 그때 바로 병원으로 옮겨주었다면 살아날 수 있었을 겁니다.
나 혼자만 살아남아
산속에는 군인들이 많이 있었어요. 잠시 후 높은 사람이 와서는 "귀찮게 왜 데려왔느냐? 사살하라"고 했습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두 남자는 손수레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나는 군인 한명의 감시를 받았읍니다. 나를 감시하던 군인이 "앞으로 누가 무슨 질문을 해도 모른다고 대답해라. 나도 너 같은 동생이 있어서 해주는 말이다. 오늘 오전에도 11명이나 죽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한참 후 헬기에 실려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했읍니다. 막사에 들어가 있는데 장성들이 불러 이것저것 캐물었습니다. 특히 도청 안의 상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했습니다. 매일 불려가 똑같은 질문을 받았지만 나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잡혀간 뒤 처음에는 광산경찰서 유치장 독방에 갇혀 지내다가 YWCA 조아라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연행되어 오자 그 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하루는 말을 잘 들으면 집에 돌려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가보니 KBS 기자들 이 녹음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일 동안이나 거절하다가 '별자리'로부터 정말로 집에 보내주겠다는 다짐을 받고 기자들이 적어준 쪽지를 그대로 읽었습니다. 계엄군을 합리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실수를 해 다시 읽곤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녹음이 끝나자 "지금은 보내줄 수 없다"고 약속을 어겼습니다.
석방 후 경찰들의 집요한 감시 속에 살아
가족들에게도 생사여부조차 알리지 못하고 지내다가 1백여 일 후 석방되었읍니 다. 석방 후 적십자병원, 전남대의대병원 등을 전전하며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았으나 온몸에 박힌 파편 때문에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고 발가락에 파편이 박혀 있습니다.
이듬해 다시 1학년으로 복학했지만 경찰들의 집요한 감시 속에서 숨죽이고 살았습니다. 집안 식구들과 학교에까지 협박을 해 학교와 집, 병원만을 왔다갔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가족, 친지, 친구 아무에게도 그날의 일을 말하지 않아 가족들도 구체적인 내용은 국회 청문회를 통해 알 정도로 나는 그동안 철저히 입을 다물고 지냈습니다. 1988년 부상자회보에 수기를 쓰면서 최초로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88년 5월에 당시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을 만나 숨진 15명을 확인사살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암매장 장소까지 가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국회 청문회를 통해 살아남은 부상자 2명도 사살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결국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중 생존자는 유일하게 나 한 사람뿐인 셈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사일을 돕다가 1987년 말 5·18 부상자들과 연락이 되어 계속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여고 1학년의 어린 마음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여러가지 일들을 부상자회 활동을 통해 하나둘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위대한 광주 시민의 긍지를 갖고 열심히 투쟁하며 살고 있습니다. (조사.정리 양선화) [5.18연구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