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경찰서장 관사(長水警察署長 官舍)
종 목 : 등록문화재 제 216호(전북)
명 칭 : 장수경찰서 관사
지정일 : 2005. 11. 11 지정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286(방촌길 21)
장수경찰서장 관사 전경
오늘은 장수경찰서 관사를 소개하려 한다 장수골 문화답사기 마지막편이다
지난 몇 개월동안 눈이오나 비가오나 열정 하나로 돌아봤던 장수골 문화재 뒤돌아본 세월의 빠름을
다시금 느껴본다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란걸 알기에 미련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위하여 전진하련다 이 곳의 장수경찰서 관사편을 마지막으로 장수군 등록문화재 32곳 답사를 모두
마치려고 한다 지난세월 돌이켜보면 우여곡절도 많았다 포기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 많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답사기행을 마칠수 있음에 진정 감사하다 같이사는 삶
더불어사는 삶 인생 살아가는게 뭔지를 깨달게해주신 모든분들께 큰절을 올린다 아직도 내 고향
장수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널리 알려지지 않고 가볼만한 좋은곳이 무궁무진하다
차후 공부를 더하여 못다한 장수골 소개를 하고자 노력할것을 약속한다.
장수경찰서 관사는 장수군청 민원실 앞 오래된 은행나무가 마치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듯한
명당터에 위치해있다 민원실 앞 주차장 서쪽방향 누가봐도 일본식 건물임을 알수있다
이곳의 정확한 표현은 장수경찰서장 관사라 한다 장수경찰서 관사는 장수리 남동마을 예전
장수파출소 자리에 새롭게 지어져 직원들이 사용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이 곳은 장수리 준비마을이다 장수리는 예전에 비석이 많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래서 비석거리라 불렀다 이 곳은 비석거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 이라해서 중비라 불렀고
훗날 준비라 고쳤다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는 일곱개의 행정마을이 있다 교촌, 준비, 중동 ,하비
남동, 북동, 관두마을이다 장수에 살면서도 때로는 헤깔리는 장수리 행정구역을 현존하는 큰 건물을
표기로 하여 마을을 알아보고자 한다.
교촌마을 - 장수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교촌(校村)이라 한다 관주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으며 장수향교, 장수초등학교, 장수군청 있다 일정시대에는 장수리 1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준비마을 - 장수 비석거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농협하나로마트, 장수우체국, 장수교육지원청
장수중학교, 장수군산림조합등 있다.
중동마을 - 1989년 준비와 중동을 분구했다 교촌, 남동, 북동사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중동마을이라 했다 장수장로교회, 장수축협마트, 방촌공원, 농협중앙회 장수군지부가 있다.
하비마을 - 장수 비석거리의 즉 준비마을 기준하여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하여 하비라 칭했다
장수경찰서, 덕산장여관, 행복한농부식당이 있다.
남동마을 - 장수 남산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동네 장수읍기준 남쪽의마을 이라해서 남동이라
칭했다 장수침례교회, 장수통일교회, 장수한전이 있다.
북동마을 - 마을이 형성될때 부근이 뽕밭이었다 장수천을 기준으로 냇가의 건너편은 앞동네라
부르고 냇가의 안쪽은 뒷동네라고 부르다가 뒷 동네가 북쪽을 향해있는 마을이라해서 북동
이라 칭했다 북동은 장수리 면적의 반을 차지할만큼 큰 마을이다 장수읍 중앙로 상가의
주를 이루는 대부분 상가가 북동이다 진미식당, 장수농협, 늘푸른약국, 장수치과, 버스터미널
장수성당, 한사랑의원이 있다.
관두마을 - 원래는 북동이었으나 북동이 너무커서 2009년에 분동하였다 관두산 아래쪽에 있는
주공아파트 단지이다 장수읍에서 유일하게 아파트 독립단지로 행정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소형 서민 임대아파트이며 4개동 378세대를 이루고 있다.
준비마을에 있는 장수경찰서장 관사는 정문앞에 등록문화재 안내판이 있고 정문은 철재문이며
안으로 들어서면 면적은 총 538제곱미터(162평)이라한다 이 곳은 1934년 일제 강점기에 당시
경찰서장 관사로 건축하였으며 해방 후 지금까지 관사로 계속 사용하는 곳은 전국에서 오로지
이곳 뿐이다 비록 일정시대에 지은 건물이지만 서양식 건축 양식과 일본식 건축 양식의 특징이
함께 나타나는 조금은 특이한 건축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중복도를 통해서 각 방에 연결되는 일식
가옥의 평면 형식을 취하였으며 현관을 비롯한 전면 외벽은 시멘트 몰타르로 마감하였고 측면
일부와 후면은 목재 널판을 사용하였다 내부 평면의 방 구성과 배치는 현대시대 변화하는 생활
방식에 따라 많이 바뀌었지만 외관은 예전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며
역사적· 건축학적 자료로 가치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지난 2005년 11월 11일 등록문화재
21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장수읍 전경
장수군 등록문화재 답사를 끝으로 장수읍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자 한다 장수땅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궁금하다 아마 한반도 이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장수땅에도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문헌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부터 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이 문헌상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이기에 장수도 그렇다 장수에서 아주 오래전 구석기시대 유물이 인근의
계남면과 산서면에서 발견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구석기시대 때부터 장수땅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으로 보는 장수읍은 삼국시대에는 백제 영역으로 우평현의
관할구역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757년<경덕왕 16년>에 군현의 명칭을 바꿈에 따라서
우평현을 고택현으로 개칭했으며 고택현 관할구역에 있었다.
삼국시대의 현은 지금의 군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940년(고려태조23년)에 고택현을
장천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현청(장수군청) 소재지를 천천면 남양리 앞 덕들 평전에서
장수읍 선창리로 옮겼다 근세 조선조초 1413(태종 14년)에 장천현을 장수현으로 고치고
현청 소재지를 선창리에서 장수리로 옮겼다 이 시기 장수읍은 장수천 기준으로 북쪽과 싸리재
남쪽 일원을 신촌읍 내방이라 부르고 장수천 남쪽과 수분령 북쪽 일원을 신촌읍 남방으로 불렀다
1895년(고종 32년)에 전국에 23부 331군을 두는 지방관제 개정으로 방을 면으로 고치면서
신촌읍 내방을 수내면으로 신촌읍 남방을 수남면으로 개칭 하게되었다.
장수읍 지명변경 흐름을 정리하면
삼국시대 백제 우평현 소속→통일신라 고택현 소속→고려시대 장천현 소속 →조선조초 장수현
소속 →신촌읍 내방과 남방으로 구분하다가 조선시대말 수내면/수남면으로 개칭함
근세들어 1914년 3월에 부. 군. 면 통폐합의 지방관제 개정으로 수내면과 수남면을 병합해서
장수면으로 불렀으며 이때부터 면이 말단 행정 기구의 중요 역할을 했다 즉 다시말해 1895년
(고종 32년)부터 1914년 3월까지의 장수읍은 수내면과 수남면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수남초등학교 관련 지명을 봐도 알수 있다 현재는 수남이란 지명은 없다 그러나 장수읍남쪽방향
개정리, 용계리 쪽을 수남이라 부른다 위에서 근거한 말이다)
훗날 1979년 5월 1일 장수면을 장수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매년 5월 1일은
장수읍 승격을 기념하기 위해서 읍.민 전체가 하나되어 체육대회 및 기념행사를 한다 그리하여
매년 5월1일은 장수읍민의 날 이다.
지리적으로 장수읍은 백두대간(소백산맥)이 남으로 힘차게 뻗다가 무룡궁재
(용이춤추는형상-계남면 장안리)를 분기점으로 맥을 이어서 노령산맥의 종산 영취산이 서쪽으로
높이 솟았는데 여기서 다시 맹호출림격으로 장안산 지나 힘주어 뻗은 관주산과 남산(현논개사당
위치한 곳)이 마치 대호의 자웅처럼 마주보는 언저리에 천년행화지로 알려진 장수고을 터를
이루어 놓았다 장수읍의 지형은 북동쪽으로 장안산과 법화산이 가로질러 북쪽은 계남면에
접해있고 동남쪽은 장안산과 수분령이 경계가 되어 번암면과 접해있고 서북쪽은 팔공산과
노령산맥이 가로질러 산서면과 진안군과 접해있고 북쪽으론 왕대들을 경계하여 천천면과
접해 있다.
장수읍 지도
물줄기를 보면 수분령에서 발원하여 금강의 최상류를 이룬 남장천과 덕산의 길목인 밀목재에서
발원하여 동촌을 지난 동장천은 장수리 하비에서 합류해 장수 큰 들의 젖줄 역할을하며 들의
변방을 돌아서 천천면으로 흐른다 남장천과 동장천을 합류한 물줄기를 일명 장수천이라 한다
도로는 南(번암)과 北(계남면)으로 관통하는 19번 국도와 서쪽의 산서면과 북쪽의 천천면으로
연결되는 719번 지방도는 장수읍의 동맥 역할을 하며 장수읍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8㎞지점에
있는 장안산의 일원과 용추만풍(장수팔경)으로 유명한 덕산계곡은 천하의 절경이다.
전라북도 동부 산악권에 위치한 장수읍 동경 127“ 북위35” 13개 법정리와 43개 행정마을로
이루어졌다 장수군의 총 면적 5,319,852㎡ 중 장수읍은 1,169,443.4㎡이며 장수군 총면적의
약 22%를 차지한다 연간 평균기온 11도 정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약 1500㎜이다
장수군 인구가 1960년도 8만이 넘었으나 가속화된 도시화 현상으로 해마다 줄어들어 2015년
2월 통계자료 장수군 인구는 23,317명이고 장수읍 인구는 7,507명이다 군 전체의 약 32.2%
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해마다 외국인 인구가 늘어난다 아마도 다문화 가정이 늘어난다는 증거다
장수초등학교 수남초등학교의 학생수를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예전에 촌은 대략 10여호로 혈연집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장수일원에는 황희 후예인 장수황씨가
있으며 장수읍 용계리는 진주강씨, 안양마을 백장선생의 후예인 수원백씨, 선창리 음선마을은
전주최씨등이 살고있다 언어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3도 방언을 쓰고 있다 대부분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으나 말의 끝을 약간 길게 빼는 것은 충청도 사투리가 가미되어 비교적 호감성
있게 들리며 표준말에 가깝다 세종때 훈민정음시 ㅇ과 ㅅ을 같이 썼는데 장수는 ㅇ를 ㅅ으로 쓰고
있는데 가을은 가실, 여우→여시, 무→무시 하였고 ㄱ음은 탈락되어 길→질, 기름→지름으로 하고
있다 또 까→껴, 니다→서유 합니다→합니껴, 그랬습니다→그랫시오, 새우→새비, 배→나락
처녀→가시나 총각→머시매, 애매하다→거시기 라고한다 사시사철 새소리와 꽃으로 인심이
후하고 언어도 부드럽다.
장수의 농사 흐름도 많이 변모했다 50~60년도 주요작목은 구식 농사법을 답습했다면 1970년도
부터 벼를 비롯해서 양잠농사가 활발하였고 80년도에 담배농사가 왕성 하였다 1990년대들어
특용작목 접하면서 선진 농사법으로 발전했다 2000년대부터 장수의 특산품이 되어버린 장수사과
장수한우를 비롯해서 토마토, 고추, 오미자를 특화 하였다 장수의 5적(다섯가지 빨강색 농산물)
이라일컷는 사과, 한우, 오미자, 토마토, 고추 명품화 되었다.
장수읍 법정리 마을현황(13개 법정리와 43개 행정마을)
1. 장수리(교촌, 준비마을, 중동마을, 하비마을, 남동마을, 북동마을, 관두마을)
2. 노하마을(노하, 신기, 왕대, 판둔, 서동(장수타워팰리스))
3. 동촌마을
4. 두산마을
5. 선창마을(양선, 음선. 남선(근로자아파트))
6. 덕산(덕산, 범연)
7. 수분리(수분, 송계)
8. 노곡마을(신리, 대리, 상중, 하중, 신촌, 하리)
9. 용계마을(용계, 안양)
10. 송천리(송천, 이교, 구락, 용추, 송학골(송학뉴타운))
11. 개정마을(개정, 농원, 하평, 와동)
12. 대성리(원대성, 대덕, 구평, 필덕)
13. 식천리 43개의 작은 행정마을이 존재한다.
~ 장수에서 호롱불 최 용 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