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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如山房에서 보내는 편지 ⑥
양문규 시인이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한 지 10여 년, 옛 생각 껴안고 나지막하게 엎드려 천태산 여여산방에서 펼치는 마음의 풍경! 그는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오랜 울음을 갈무리해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 그 작고 보잘것없는 초라한 물상들에 끊임없이 눈 맞추며, 공동체적 삶의 숨결을 읽어낸다. 지금 바로 여기, 여여(如如)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양식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맑은 시처럼 길어 올리고 있다.
양문규
아름다운 마무리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에게
자승 스님, 지난밤 빗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일기불순으로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던 산벚나무, 홍도화, 살구나무가 며칠 사이 만개, 꽃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피운 꽃들이 저 비에 다 떨어질 걸 생각하니 안타까웠습니다.
올봄 이상저온과 잦은 비바람으로 일조량이 부족해 과수·채소 농사를 짓는 농가의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때 꽃을 피워야 할 꽃들도 수난의 연속은 마찬가지이지요. 3, 4월의 날씨가 이러다보니 농사가 어찌 제대로 되겠습니까. 거기에다 황사까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듭니다.
오월을 코앞에 두고 오늘도 강풍을 동반한 비와 황사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오후 늦게부터는 천둥번개에 우박까지 내릴 것이라 합니다. 저는 서둘러 산방의 모든 전원을 내리고 노트북과 몇 권의 책만 챙겨 하산하고 말았습니다. 낙뢰로 컴퓨터, 전자제품 등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지요.
자승 스님, 올봄을 불경스럽게 만드는 게 어찌 날씨뿐이겠습니까. MB 최측근의 골 죽이는 망언도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잇따른 ‘좌파 척결’과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큰집 개입’ 사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의 ‘현모양처’ 발언 등 연일 터지고 있는 상식이하의 망언이 그렇습니다. 많은 젊은 목숨을 앗아간 천안함 사건의 원인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국민을 혼란과 갈등, 대립의 장으로 몰아가는 현실이 개탄스럽습니다. 기업 스폰서 검사 사건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힙니다.
무엇보다 이 땅의 정치권력이 특정 종교에까지 줄을 대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고 협박한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자승 스님까지 연루되어 있다는데 있지요. 사건의 전언을 정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이 서울의 봉은사를 총무원 직영사찰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과 관련, 봉은사 주지 명진(60) 스님은 3월 21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외압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명진 스님은 이날 오전 열린 일요법회에서 지난해 11월 13일 아침 프라자호텔 식당에서 자승 총무원장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이 만난 자리에서 안상수 대표가 “현 정권에 저렇게 비판적인 강남 부자 절의 주지를 그냥 놔둬서 쓰겠느냐.”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명진 스님은 이 말을 그 자리에 배석했던 김영국 거사(불교문화사업단 대외협력위원 겸 전 고흥길 의원 보좌관)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또 11월 30일 자승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 직후에 불광사 회주 지홍 스님과 함께 자승 총무원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자승 스님으로부터 안상수 대표가 좌파 주지 운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명진 스님의 전언에 의하면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외압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자승 총무원장과 안상수 원내대표의 조찬 자리에선 명진 스님이 지난해 8월 30일 용산참사 현장을 찾아 1억 원을 전달한 것을 두고, “안상수 원내대표가 ‘돈을 함부로 운동권에 써도 되느냐’고 말하자 자승 스님은 ‘봉은사는 재정이 공개돼 함부로 쓸 수 없고, 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준 돈을 3년간 모아 용산 현장에 전달한 건 어쩔 수 없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명진 스님은 “안상수 대표가 자승 총무원장과 이런 야합을 했다면 원내대표직을 내놓고 정계에서 은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여기에 대해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현 봉은사 명진 스님은 만나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봉은사 조계종 직영사찰 전환문제와 관련 파생된 사태라고 거짓으로 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했던 김영국 거사의 기자회견으로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진 이후 자승 스님과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묵언정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요. 참 씁쓸한 작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승 스님, 저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오늘날까지 불교와 가까이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문학적 소양 역시 불교를 통해 배우게 되었고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여러 스님과 더불어 함께 하면서 나는 누구인가, 참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등을 궁구하며 살아왔지요. 그 가운데에는 항상 부처님 진리의 법이 있었습니다. 생명존중 사상과 자비정신이 그것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거처를 ‘여여산방’이라 이름하고, 그 속에서 뭇 생명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같이하고자 하는 종교 가운데 천주교가 있지요. 불교신자인 전 천주교의 과거 군사독재시절부터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행적부터 작금의 현실인식에 대한 입장을 존경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계에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의료, 대학, 사회복지 등 전반의 사회 기여에 대해 부러움을 갖고 있지요. 최근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결정한 4대강사업 반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는지 모릅니다. “4대강사업이 자연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이라는 우려 표명은 사실 불교가 먼저 했어야 한다는 안타까움도 있었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누가 먼저 했든 “정부의 책임 있고 양심적인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는 성명을 읽으면서 저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긴 부처님의 뜻을 펼쳐야 할 조계종 집행부는 뭘 하고 있는지요. 물론 4대강 생명살림 수륙대제 추진위원회 주최로 조계사에서 조계종 전 교육원장 청화 스님, 화계사 수경 스님,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 불교환경운동화 지율 스님 등을 비롯 불자 1만여 명이 모여 4대강 반대 당위성을 천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한국불교의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를 수호하고 따르면서 펼치는 스님이 많지 않다는데 실망을 금치 못합니다. 물론 한국불교의 명맥을 계승 발전시키는 각 종단의 많은 스님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 최대 종단이라 불리는 조계종의 대다수 큰스님들이 국민은 물론 불자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습니다. 존경받아야 할 스님들이 무엇 때문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걸까요.
자승 스님, 도올 김용옥은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통나무, 1989)에서 한국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도올 김용옥의 한국불교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의 입장에 대해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항상 조계종 분쟁 원인은 불법의 수호와 계승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몇몇 사판승의 사리사욕에서 비롯된 종권다툼, 큰 사찰 주지 빼앗기 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불교의 숭문에는 나무방망이로 목탁을 치는 대신 쇠파이프로 사람이나 유리창을 치면서 도를 닦으시는 스님들이 꽤 많다. 이들을 일괄해서 폭력승이라 하는데, 이런 폭력승단체의 우두머리는 대개 거룩한 큰스님의 꼴을 하고 있다. 이런 쇠파이프스님들의 단체를 이름 지어 자비회(慈悲會)라 한다고 들었다. 스님들의 자비스런 모임, 그들은 주먹이나 돌멩이 쇠파이프 식칼로 佛法의 대자비를 구현한다?
―같은 책 「凡論」 부분
이 글에 대해 혹자는 지난 과거 조계종의 과오로 치부하고 그냥 넘기려고 하는 불자도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만 들여다보십시오. 현재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제기하고 있는 정치권력에 대해 조계종은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에 부합하는 봉은사 조계종 직영사찰 전환을 서둘러 결행한 결과만 있을 뿐이지요. 직영사찰 전환과 관련 봉은사측과의 어떤 절차나 방법 등에 대한 일체의 논의나 동의도 없이 말입니다.
지난 1987년 10월 31일, 봉은사 주지 밀운 스님이 봉은사에서 불교공동위 측(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 한국대학교불교연합회(대불련), 중앙승가대학, 동국대불교도연합, 동국대 석림회, 불교청년회)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태우 후보 당선 기원법회’를 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불교공동위 측의 격렬한 항의가 있었는데요. 밀운 스님은 경찰 병력을 동원 삼엄한 경비 속에서 법회를 강행했었지요. 이 과정에서 승려 12명, 재가불자 11명이 강남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이를 두고 “큰스님 밀운당의 정치소신이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기원하는데 있다할지라도, 또 그런 정치소신을 공표할 민주사회의 권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6·29 직후의 한국사회분위기의 전반적인 상식의 논리를 따라갈 때” 그런 법회 자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불교의 위상 재정립 차원에서 몇 가지 입장을 피력합니다. 한국불교는 “스님들이 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주창하는 스님들이 사찰을 종종 자기의 사유물로 착각하고 있는데” 그 심각성을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조선의 불교는 어디까지나 조선 민중의 것이며, 또 수없는 지성들의 천재적 노력의 축적에 의하여 이 땅위에서 뭉쳐져 내려온 기덩어리”라고 말해줍니다. 따라서 “조계사나 해인사가 조계사나 해인사에 거처하는 스님들의 것,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어느 말 한마디 틀린데 없이 올바른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승 스님, 당시 도올 김용옥이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제기했던 문제들이 해결 되었을까요. 전 아직도 과거의 행태에서 한 발짝도 비껴나 있지 않다고 봅니다. 자승 총무원장과 안상수 원내대표의 만남에서도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혹자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봉은사 조계종 직영사찰 전환 논란은 그렇게 치부해 버리고 넘어갈 사안은 아니지요.
해방 이후 한국불교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요. 특히 조계종의 종정 스님, 총무원장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올 김용옥은 초기에는 종단의 대표권 획득을 위한 종정과 총무원장의 대립을 들고 있고요. 후기에는 임명권자인 총무원장과 각 사찰 문중과의 대립으로 양상이 바뀌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더럽고 추잡한 행태의 분쟁이 끝나지 않고 오늘도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까요. 이는 자비정신의 결여, 무소유의 철학이 사장된데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요. 속된 말로 염불에 맘이 없고 잿밥에만 눈을 두는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자승 스님, 최근 조계종의 최고 수장인 법전 종정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후 스님의 전 재산을 조계종단에 기증한다는 것이었는데요. 조계종 총무원은 종정 법전 스님이 “본인은 본인 사후에 본인 명의의 일체의 재산을 재단법인 대한불교조계종 유지재단에 유증합니다.”라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서명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총무원이 최근 마련한 ‘승려 사후 개인명의 재산의 종단 출연에 관한 령’에 따른 것으로, 이는 스님들의 유산이 속가의 가족에게 상속되거나 사장되는 것을 막고 승가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한국불교 큰스님의 자질을 우려한 것이 입증되는 게 아닐까요. 법전 스님의 재산이 얼마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사업가가 아닌 수도승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재산을 헌납 유언이라니요? 그것도 한국불교의 최고 지도자로 일컫는 종정 스님께서, 그렇다면 다른 큰스님은 어떠하겠는지요. 여기에 도올 김용옥은 “큰스님야말로 구원의 주체가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다.”라고 단정한 바 있는데, 이런 현실이 우리의 큰스님들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3월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의 유언을 다시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정 스님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해 사용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다비식 같은 것을 하지 말라. 이 몸뚱어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 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 달라.” 고 하여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을 선사했던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장례에 대해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강조하면서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며 당부의 말까지 남기셨지요.
자승 스님, 오죽했으면 법정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남겼을까요. 여기에는 나무들에 대한 예의, 생명존중사상도 듬뿍 들어 있지요.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는 유지가 그것이지요. 조계종 원로 스님들 입적 때의 행태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백의 만장을 동반한 화려한 장례절차를 법정 스님은 종종 봐왔겠지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생가까지 복원한 예도 아실 겁니다. 속인인 저도 그 엄청난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눈살을 찌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세계의 지성 가운데 스코트 니어링이 있습니다. 그는 “주위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으로 죽음을 맞는 자세와 사후의 문제를 간단명료하게 적고 있습니다. 먼저 마지막 죽을병이 오면 스코트 니어링은 죽음의 과정이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례절차와 부수적인 일들을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스프루스 나무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마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고 하며 여기에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를 바란다.”(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보리, 1997)고 덧붙이고 있지요.
법정 스님의 장례절차를 지켜보면서 아쉬움도 컸습니다. 법정 스님의 큰 뜻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남긴 유언은 온데간데없이 장례는 진행되고, 그래도 큰스님이라는 분들은 법정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간소한 장례를 진행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전하고 있더군요. 물론 과거 성철 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의 장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무엇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법정 스님을 위해 기도를 하는데 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은 분명 성직자입니다.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가신 큰스님이지요. 그러니 이미 성불한 바 진배없는 게 아닐까요. 장례절차 때의 불교의식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지만 장례 이후 진행되는 49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요. 법정 스님은 진정 원하고 있을까요. 49재가 한국불교의 불교의식으로 자리한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비롯되었든 불제자들이 취할 제도는 아니라 사료됩니다. 부처님 법에도 없는 49재를 어떤 연유로 스님들 스스로 올리고 있는 것인지 자못 궁금합니다.
자승 스님, 한국불교가 언제부터 돈만 되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행하게 되었는지요.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스님은 별로 없는 듯 보이는데요. 명진 스님은 여기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불교 문제점 굉장히 많습니다. 한국불교는 선종으로 봅니다. 그런데 과연 선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제사종, 기도종, 관광종, 입장료종입니다.” 언제부터 한국불교가 돈벌이 수단인 제사, 기도, 관광, 입장료 등으로 업을 삼은 것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자본주의와 관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고요. 모든 게 돈으로 거래되는 불교의식이 그것입니다.
곳곳의 절들을 찾으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무엇인지요. 이절저절 죽은 자를 위한 제사가 한 눈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앞 다투어 극락전, 명부전, 지장전 불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걸 목격할 것입니다. 이게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엔 돈이 모입니다. 조상을 위하는 제사인지라 가족들은 아낌없이 바칩니다. 49재는 물론 천도재까지 ‘지옥에서 극락’이란 슬로건 아래 흥업 중입니다. 그래서 선종 아닌 제사종이라 해야겠지요. 그뿐이겠습니까. 문화재관람료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대립은 또한 어떠한지요. 사찰 경내를 경유하지 않는 등산객들까지 문화재관람료를 받고 있는 실정 아닙니까. 이런 문제는 종종 법정 재판까지 비화되는데요. 동두천 자재암의 경우 법원은 “문화재를 보관 관리하는 곳이 대부분 사찰 내부인 점을 비추어 사찰내로 들어와서 문화재를 관람하는 자에게만 관람료를 징수함이 타당하며 단순히 사찰 소유의 땅을 지나간다는 이유로 문화재도 보이지 않으며 문화재를 관람할 의사도 없이 단순 등산만을 목적으로 한 순수 등산객에게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하는 것은 위법이다.”라는 판결이 있었지요. 그래도 지금 자재암을 비롯 많은 사찰에서는 막무가내로 돈만 챙깁니다. 거기다가 더욱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는데요. 문화재관람료 명목으로 지리산 자락의 천은사는 성삼재를 넘는 도로를 막고 돈을 받고 있습니다. 이게 한국불교 ‘입장료종’, ‘관람종’의 실체이지요.
자승 스님, 이제부터라도 한국불교는 미혹에서 각성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법정 스님이 존경한 분 가운데 간디가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에서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이라는 간디의 어록을 빌려 불필요한 것들을 경계하며 홀가분한 마음을 견지 합니다. 간디가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아름다운 인간의 삶으로 비추는 데는 무엇보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으로 옮겼기 때문 아닐까요. 쓸데없는 것 가지지 않고 “모든 것 다 버리고 혼자서”(『수타니파타』) 가신 법정 스님 또한 존경받고 아름다운 건 바로 이 때문이겠고요.
자승 스님, 무소유의 정신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아니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와 지성들이 추구했던 정신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조계종의 큰스님들이 가진 모든 재산은 지금 당장 조계종에 환속시키나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큰스님들의 개인 소유의 사찰을 바로 공찰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큰스님들의 문중을 등에 업고 관리하는 사찰들을 모두 돌려받아 조계종에서 공정하게 유지 운영해야 합니다. 조계종은 교구 본사는 물론 모든 사찰의 재정을 투명하게 운용토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타종교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신도회 중심으로 사찰 운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불교가 맑고 깨끗하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큰스님이라 불리는 대덕들께서 불자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지못할지라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먼저 불교와 정치의 그간 부적절한 관계를 완전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불교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불교의 본래마음으로 국민과 불자로부터 사랑받는 불교, 자비로운 불교, 존경받는 불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어리석게 살아가는 중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룰지 실천으로 보여주었으면 합니다. 진정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큰 부자인 큰스님을 모시고 법문을 듣고 싶습니다.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날을 가까이 두고 다시 한번 맑고 향기로운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봅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남긴 말씀을 조용히 되 뇌이며 두 손 모읍니다.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등.
―『시에』(2010,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