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롤리 핑거스는 위기 상황 때 마다 무차별로 등판해 fireman이라는 닉네임을 유행시켰으며 브루스 수터의 등장으로 closer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후 9회에만 등판해 경기를 마무리한 데니스 에커슬리는 토니 라루사가 추구한 one-inning closer 개념을 확립했다.
최근 L.A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 에릭 가니에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냈다. 바로 ‘automatic closer’. 자동으로 경기가 마무리된다는 뜻이다. 그가 등판하면 경기가 끝난것과 다름 없다는 의미다.
가니에는 올시즌 전반기 막판, 연속 세이브 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난 2002년 8월 26일(미국시간)부터 시작되어 84번의 세이브 찬스를 모두 성공시킨 것이다. 종전 기록은 탐 고든이 보스턴에서 세운 54연속 세이브 기록이었을 정도로 가니에의 기록은 군계일학이었다. 그 대단하다는 제국 양키즈의 마리아노 리베라도, 포커 페이스의 대명사 트레버 호프만도 엄두를 내지 못한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도 조 디마지오의 56게임 연속 안타와 더불어 결코 깨지기 힘든 불멸의 기록이 아닐까 싶다. 마무리 투수의 대명사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데니스 에커슬리는 가니에의 84연속 세이브에 대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기록이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지난해 마무리 투수로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당분간은 그 누구도 깨기 힘든 84연속 세이브라는 대기록을 세워 29세란 나이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우뚝선 가니에는 보통 메이저리거와는 다른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캐나다 몬트리얼 인근의 마스카치라는 소도시에서 출생한 가니에는 다른 대부분의 캐나다 인들 처럼 자연스럽게 아이스하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도 누구못지 않아 고교 시절 하키와 야구를 병행했다. 아이스 링크에서는 거친 수비수로, 마운드에서는 파워 피처로 활약한 가니에는 캐나다 주니어 야구 대표팀의 일원이 되면서 야구에 정착하게 됐다.
그의 구위를 눈여겨 본 메이저리그의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그를 94년 드레프트 30라운드에서 지명했다. 하지만 가니에는 화이트삭스와의 계약을 뒤로하고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세미놀 컬리지에 진학했다. 불어를 사용하는 캐나다 퀘벡주 출생으로 영어가 익숙치 않았던 가니에는 대학 진학 후,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물론 유럽계 사람들에게 영어를 정복하는 일이야 우리보다 몇배 쉽긴 하지만 가니에는 영어 테이프를 24시간 귀에서 떼지 않는 등 운동 못지않은 피나는 노력으로 1년만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게 됐다. 이런 미친듯한 영어 공부는 무슨 일이든지 독기를 품고 달려드는 가니에의 성미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이다. 결국 가니에는 95년, L.A 다저스와 아마추어 프리에이전트로 계약하며 드디어 메이저리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전형적인 파워 피처인 가니에는 박찬호가 L.A에서 한참 활약하던 1999년, 선발 투수로 더블A 텍사스리그 MVP가 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해 5차례 빅리그 선발로 등판해 1승 1패, 방어율 2.10을 기록했다. 2000년 15경기, 2001년 24경기에서 빅리그 선발로 등판했지만 성적은 그의 위력적인 구위에 비해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그중 2001년에는 6승 7패에 방어율 4.75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겼는데 한가지 주목됐던 점은 삼진과 볼넷 비율이 2.83(볼넷 46 / 삼진 130)으로 매우 높았던 것. 짐 트레이시 L.A 감독이 그를 마무리 투수로 염두하기 시작한 중요한 이유였다.
2002년부터 풀타임 마무리 투수로 전향한 에릭 가니에는 드디어 자신의 진가를 과시했다. 이후 2시즌 동안 총 107세이브를 기록하며 짧은 기간에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마무리 투수야말로 가니에에게 천직이었던 셈이다.
마무리는 가니에게 천직
90마일 후반대에 이르는 강력한 직구. 엄청난 각을 형성하며 떨어지는 커브와 체인지업을 가진 가니에는 지난해 경기당 15개의 탈삼진, 피안타율 .133 등 그의 구위는 말로 표현못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이런 좋은 공을 가지고 있는 그가 왜 선발 투수로 뛸 당시에는 지금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보통 마무리 체질인 선수가 선발에 적응하기 힘든 이유로 체력적인 문제와 집중력 등 정신적 문제가 거론되는데 가니에는 후자에 속한다. 가니에는 청소년기에 야구 글러브 보다 하키 스틱을 잡은 시간이 더 많았는데 이것도 한 가지 이유이다. 아이스하키는 골키퍼를 제외하고 한 선수가 한 번에 뛸 수 있는 시간은 1~2분에 불과하다. 룰로 정해진게 아니라 엄청난 체력 소모로 그 이상은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키 경기를 보다보면 수시로 선수들을 교체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가니에는 이런 짧은 시간에 몸에 남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9회에 등판해 1이닝 동안 자신이 가진 100%의 에너지를 발산해야 하는 마무리 투수와 하키는 그래서 비슷한 면이 있다.
가니에는 스스로도 “선발로 나오면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고 생각하게 된다. 그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고 말한 바 있다.
두번째, 그가 마무리로 성공한 이유는 승부사적 기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역시 하키와 관련있는 부분이다. 하키에서 주로 수비수를 맡았던 가니에는 두드러지게 저돌적인 선수였다고 한다. 원래 하키란 스포츠가 바디 체킹이라 불리는 몸 싸움을 빼면 남는게 없다고 할 정도로 매우 치열하고 거친 스포츠다. 이런 하키에 익숙해져 생기게 된 가니에의 파이터 같은 기질은 야구에서 마무리와 가장 좋은 매치를 이룬다. 몸싸움이라고는 거의 없는(특히 투수에게는) 야구에서 그나마 가니에를 만족시킨것은 1~2점 차로 긴장이 고조된 순간, 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경기를 끝내는 희열 뿐이었다.
가니에는 거친 플레이로 하키 선수 시절부터 달고 다니던 goon(깡패란 뜻)이란 별명을 아직도 갖고 싶어한다. 컬리지 시절, 가니에를 지도했던 를로이드 시몬스씨는 가니에를 가리켜 “성질있는 선수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가니에는 “선발 투수라면 긴장을 풀고 차분해야 하는데 내 셩격에서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너무 지루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공격적이다못해 거칠기까지 한 가니에의 승부사적인 모습은 그의 위력적인 구위와 더불어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성장시킨 원동력이었다.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플레이는 간혹 경기를 망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니에는 84경기 연속 세이브 기록이 말해주듯 오히려 그런 기질로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가니에가 30대 후반에 되더라도 지금과 같이 경기를 끝내고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저는 때로 9회 투아웃 투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관중들이 모두 기립해 박수를 치고 고함을 치기 시작할 때 잠시 마운드를 벗어납니다. 그 소음들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죠. 그때 내 몸 속에서 뭔가가 끓어 오르고 더욱 승부욕이 생기곤 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다음 공에 대한 생각으로 마운드를 벗어날 줄 압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관중들의 환호성을 듣고 그것에 짜릿함을 얻습니다. “ (에릭 가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