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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와 세속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세속 정신구조의 두 국면
세속 정신은 언제나 행복감의 풍조와 함께 진보를 시작하는 것같다. 18세기 하반기 초 계몽주의가 전성기를 맞을 때 들뜬 분위기가 사회 속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서구 문화 속에 그와 동일한 정취가 이미 스며든 것같은 양상을 본다. 그 시기에 교육받은 엘리트들은 의식적으로 계몽사상과 인간성에 대한 낙관론을 서로 연결시켰다. 오웬 채드윜(Owen Chadwick)은 1898년의 Encyclopaedia Britannica의 광고문을 인용하는데, 그 광고문은 "예술과 과학과 산업의 현대적 진보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높이 드러내고 "빛이 어떻게 퍼져 나갔는 지를 말해주겠다"고 장담했다. '어느 곳에서나 심령들이 깨어나고 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인간성이 잠재적으로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나타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상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의 잔악성과 폭군적으로 혁명의 힘을 추구한 것이 냉정하게 생각하도록 영향을 끼쳤다. 후에 프랑스 역사 편찬의 분위기가 미첼레(Michelet)의 낙천론에서 히퍼라이트 (Hippolyte)의 낙담론으로 선회한 것과 다윈의 진화론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던 분위기가 잦아드는 쪽으로 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와 유사한 효과를 발하였다. 세기가 바뀌는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 사이에 유물주의(唯物主義)를 유포한 자들이 나타나 기술 세대의 상대성과 무의미성을 눈치채던 문화 비평론자들을 위하여 길을 닦아 놓았다. 칼 하임(Karl Heim)은 주도적인 학문들 속에서 분위기가 침잠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표호하는 20세기 사람들"이 금방 터질 위기에 놓인 분화구 위에서 춤을 추고있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어느 신학자는 두드러진 방식으로 문화적인 기후를 포착하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죽었다. 그러나 새로운 두려움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들어온 것이다( "Weltangst")..." 문화를 찬탄하던 것이 문화를 경멸하는 쪽으로 변한다. 모든 세속화의 종착지인 어두운 문은 비관론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폐한 후에 이제는 우주의 고아가 된 것에 대하여 소리를 지르고들 있다.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독자들이 읽기 쉬운 책을 아주 잘 쓰는 사회학자로서 지식인들에 대하여 조예있는 안목을 가졌는데, 지식인들은 "권태로움에 시달려 정말 지치기로 유명한 자들이라" 고 어느 시점에서 지적한 바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버거는 세속화의 다른 측면에 대하여 "야만적인 초자연주의에 몰입되어 있으면서 얼마나 이상한 종교성이 이러한 그룹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지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초현대인들은 운명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발전시키며 "의미"를 찾는 데서 미신으로 시선을 돌리며, 계몽주의를 새로운 반계몽주의 속에서 완전하게 하려 한다.
그러한 분위기의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괄목한 만한 경우는, 최근 서유럽에서 세속적인 낙천론이 붕괴되는 것이다. 60년대 사람들은 경제적인 급작스런 호황기를 맞아 무제한적인 진보와 인간의 능력을 확신하는 풍부한 정신 구조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제1차 오일 위기와 도저히 해결될 성 쉽지 않은 경제적 난제들을 직면해 경제 침체의 시기를 맞고 핵전쟁의 위협을 새로이 인식하게 됨에 따라서 상황은 변하였다.
오늘날 서유럽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친 모습들과 음울함,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인도나 라틴 아메리카에 훨씬 더 큰 난제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전에 기세를 자랑했으나 이제는 옛스런 나라들이 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특징짓는 것은 "유럽형 비관론(Euro-Pessimism)"과 "소망의 부재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미래가 없는 세대로 말하고 있다. 모든 창조적힘이 없어졌다. 인간은 자기의 정착할 거처를 잃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렸고, 이제는 자기가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나아가고 있다. 「방청금지(Huis clos)」와 「구토(La nausee)」 에서 언급한 사르트르(Sartre)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누구나 60년대에 기세를 올렸던 "소망의 원리"와 "소망의 신학"은 어떻게 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 원리와 신학이 20년도 못되어 옛 것이 되어 버렸는가?
방향감각의 상실과 낙담은 새로운 괴이한 신앙들의 발흥을 다시 가져왔다.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은 이렇게 관찰한다. "화란에서 가장 세속화된 지역 중 하나인 암스텔담은... 동시에 군소 이단들로 포위되어 있다." 사람들은 점괘와 마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점성술은 서구에서 가장 진보된 나라들에서 싹트는 산업이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을 버린 곳에서는 사단의 종교가 그 다음임을 인류는 발견한다. 롴 음악이 연주되는 장면에서 보듯이, 사단 종교가 문화적 표현의 전체 영역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세속사회는 재빨리 두려움과 미신의 희생물이 된다. 사람들이 시대의 분위기에 영합하지 않는 터전 속에서 정착지를 상실함에 따라서 말이다. 이러한 전망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 "세속주의 뒤에는 무엇이 오는가?"
"Anomie" 또는 사회 구조들에 대한 전망들
종교는 또한 조직적인 결속을 규정하고 있으며 한 사람이 사회적인 면에서나 개인적으로 "전체에 대하여" "일관성 있는 관계"를 가지도록 보살펴 준다. 사회학자들은 종교적 윤리야말로 "너희는 모든 불의를 삼가고" 누구나 그 이웃을 돌아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옛 교훈의 줄기찬 시인임을 알아차린다.
두르크하임(Emil Durkheim)과 함께 시작된 현대 사회학이 복음서의 종말론에서 두드러지게 그려진, 이른바 사회를 지탱시키는 끈을 세속적으로 와해시키는 세속성을 표현하는 말로 anomie를 선택해야 했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만한 일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사회학자들과 철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세속화가 진행되는 와중에서 사회를 지탱시키는 망(網)이 붕괴됨을 인지한다.
예를 들어서 경제 분야에서 이 점은 분명하다. 그 경제 분야 속에서 종교적 윤리가 지시하는 전통적인 지표의 굴레를 벗고 소유자가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하는 책임을 유기시켜 버림으로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불러왔다. 결과적으로 사회가 그렇게 여러 조각으로 분열됨에 따라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비참함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순전히 계층간의 싸움이 역력하게 벌어졌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속화가 무르익어감과 함께 그에 때를 맞추어 불길한 민족주의(nationalism)가 일어남을 지적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분열이 일어나는데 이미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바 있다.
보다 최근에 사회의 기본 단위가 되는 가정의 붕괴가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15∼20년전에 사회학자들은 가정이야 말로 세속화를 크게 둔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여기서도 역시 사회적인 와해가 진행 중이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는 결과는 "anomie" 이다. 우리가 이제야 인식하는 것이지만 주님의 예언 내용이 20세기 전반기 초의 예술이나 음악이나 미술이나 문학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는데, 그것이 바로 "anomie" 곧 원자론적 (元子論的) 사회 생활이다.
이 anomie는 개인의 자유가 방만하게 분출될 때 처음 지각되는 이른바 도덕적 공감대의 파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죤 스터트 밀(John Stuart Mill)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개인 마다 자기의 도덕성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져야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어주어야 하며, 그럴 수 있음을 기본 원리로 가정한다.
그러나 프레드리히 니체(Fredrich Nietzche)같은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서 종교 뿐 아니라 도덕성도 역시 "민중의 아편"이며 천재를 말살하려고 만들어진 것이라고 선포하였는데, 그것은 어찌 된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함께 살겠는가? 절대 가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모든 행동은 방자해지고, 아돌프 아히만 (Adolf Eichmann)과 테레사(Teresa)수녀는 다만 자기 나름의 개인적인 편향을 나타낸 것에 불과할 것이다.
니체는 세속화와 무정부주의가 함께 가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회구조에 대한 믿음이 함께 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함께 감을 알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여전히 원리를 믿고 있기 때문에 신(神)을 제거하지 않게 될까 겁이 난다..." 사회적인 구조든 그렇지 않은 다른 구조든 모든 구조의 와해는 사람에게 전적인 자율성을 제공할 수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 자율성이 궁극적인 자아 실현을 용이하게 하고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만족을 손쉽게 가져 올 수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계몽주의는 기독교의 유산 즉 개인성과 탁월한 은혜를 기독교의 본질적인 유대로부터 단절시켰다. 그리하여 계몽주의는 개인주의로 변이되고 통제되지 아니하는 암종과 같은 성장을 하여 나갔다. 같은 방식으로 형제애는 타격을 입어 집산주의(collectivism)로 변해가고 있다. 전체적인 발전 양태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기독교와 문화에 대한 헤 겔의 종합적인 판단을 거부하며 일어난 "젊은 헤겔파"(Young Hegelians)의 철학 학파의 여러 진보 형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각 위치가 개인 인격의 자세로 굳어지고, 전체는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만들어진 나뭇 가지 모양의 도표를 나타낸다.
스트라우스(D. F. Strauss)는 최고의 성경비평을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과 연관시키고있다. 포이에르바하(L.Feuerbach)는 모든 종교 비평을 다 싸잡아서 '나와-너' 관계의 우상화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 다음에 바우어 (Bauer) 형제들은 무신론자들이고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마지막 소산은 쥴리어스 스터너(Julius Stirner)의 "유아론(唯我論, Solipsism)" 철학인데, 그의 「유일자(唯一者)와 그의 특질(The Only and His Property)」이라는 책에 서 그 철학이 아주 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계몽주의와 함께 뚫린 길이 말하자면 스터너에서 완성된 셈이다. 그 초창기에 루소(Rousseau)의 생애는 이미 그 종말을 어렴풋이 인정했다.
역사가인 제임스 히치콕(James Hitchcock)은 현명하게 다음과 같은 관찰을 한다. "세속화된 개인의 궁극적인 요구가 그 개인에게 도덕적인 자율성을 절대적으로 허락하는것"인 한에서는 현대 영혼들이 겪는 가장 근본적인 질병은 유아론이다. 그것은 무한하게 자아를 확장시킴으로써 빈 우주를 채우려고 극성을 부리는 것이다. 스터너의 「유일자와 그의 특질」이라는 책은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정치적 경륜의 비밀을 온전히 폭로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유일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지구의 인구를 격감시키지는 못하니, 논리적인 결론은 그것이 냉전일지라도 시민전쟁을 초래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결과들을 파하려고 사회주의의 선언을 통하여 안간 힘을 쓴 것을 이미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란 이론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와해가 가져온 급증하는 영적이고 물질적인 대가의 뚜렷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납세자가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편의의 차원에서 가정 뿐 아니라 국제질서의 매우 분명한 짐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사람들이 더 이상 피를 흘리려 들지 않는 때가 온 것이다. 이 세상적인 인간 책임성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목표를 세우려는 여러 시도들이 실패한다. 역학적 관계에 대한 공감적인 여론과 과학의 "방법(How to)" 이 도덕성이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하여?" 라고 던지는 질문에 대하여 거듭 되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원론은 공통적인 규범이 존재하지 않고는 그 어느 사회체계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 물론 이러한 막다른 궁지를 점증하는 제도주의로 대처할 수 있다. 종종 제도주의를 대신 하여 들어서는 더욱 눈에 거슬리는 것은, 필요하다면 힘으로라도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통합을 모색하자는 어찌할 수 없는 공중 열망의 부상이다.
로베스삐에르(Robespierre)야 말로 세속화를 신성화로 반전시킨 고전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통합 의 개념은 "이로운" 독재라는 이른바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자신들에 대하여 내릴 수 없는 포기와 검약의 결심을 우리 대신 할 수 있는 독재자 정치라는 제안과 함께 나타난다. 다수 대중들이 목표와 가치의 혼란에 직면하여 "이렇게 그냥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라고 느끼기 시작할 때 모습을 드러내며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소위 '이로운 독재자' 타입의 인물이다. 사회 분위기가 급박하게 변하는 것을 때로는 자유의 개념이 위치를 바꾸는 데서 인식되기도 한다. 소위 자애로운 독재자가 강림하기 전에 처음 내거는 가장 현격한 슬로건은, 이제 자유는 못쓰게 되었고, 거의 음란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의 잠재능력에 대한 확신이 압박하는 사회적인 난제들을 해결 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느낌과 두려움에 자리를 내주게 되고, 그것이 곧 도래할 독재정치의 동일한 궁극적 목적들을 이롭게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될 때 영락없이 그러한 슬로건이 나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만이 "anomie" 의 이러한 역사적인 귀추들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다. 브라이언 윌슨(Bryan Wilson) 은 옥스포드학파에 속한 사회학자로서 "세속 사회에서의 종교"에 대한 그의 연구서 끝에서 스스로 사회 풍조가 주목할 만하게 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는 그의 저서 전체를 통하여 종교의 사멸을 은근히 조소하며 종교가 다시 사회 공중의 문제에 간섭할 수 있다는 그 어떠한 조짐도 피하려고 하는 것같은 인상을 준다. 마치 "세속적인 세계는 종교가 없이도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같이 말이다. 결론 부분에 가까이 나아가면서 그는 생각이 매우 깊어진다. 그는 지적하기를 기독교는 "친족 그룹과 이웃 사랑의 정신을 확장시켜 보편화되고 비개인적인 선한 의도를 가져왔다"고 하였다. 역시 '일반적인 개별적 정직이라는 내면화된 강한 의식'을 가져오는 데도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기의 소명에 대하여 이해 관계를 따지지 아니하고 헌신하게 하는 데도 기여하였다-많은 사회 통제를 불필요하게 만들고 우리의 현재 문화를 가능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모든 자질들을 가져오는 데도 기독교는 기여하였다고 그는 지적한다.
공예배 의식법과 신학이나 교회의 사회생활이 타락할 때는 교회가 관계된다. 그러나 윤리문제는 전혀 다르다. 그러한 도덕적 차원들이 이제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도덕 자본의 채무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일단 과거 종교의 지속적인 영향력이 더욱 쇠퇴해 가는 때에 제도적인 강제성 없이도 우리 사회의 타입이 공중질서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것인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미 범죄와 공중의 무질서의 급증을 목격하게 되고 앞으로 그러한 양상은 더욱 가세될 것이 뻔하다.
윌슨의 옥스포드 동료인 데이비드 마틴(David Martin)은 유럽의 세속주의 자취를 따라서 나타나는 방향감각의 혼미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한다. "....다원론의 확장은, 예전의 통합형식이 시도되고 통제력에 있어서 자체를 재확립할 조건들을 만들 것이다. 또는 다원적인 성향이 위험천만하게 무정부상태와 사회분열의 상태에까지 확장될 것이다. 동유럽의 일원론(一元論)체계가 이미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 진공상태와 사회적 와해를 힘입어 매력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든 무정부는 흔히 전제주의적 재통합의 조짐이 된다."
그러면 국가는 도덕성의 강화를 들고 나올 것이고 하나님 자리에 사회생활의 도덕성을 보장하는 자를 세울 것이다. 곧 국가는 전체주의적이 된다는 말이다. 국가는 외경심과 경외심을 고취시키려고 애쓸 것이 틀림없으며 가능하면 하나님과 꼭 같이 모든 것을 알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비밀 경찰을 세워 개인적인 문제 안에서 객관적인 도덕법을 대표하는 양심의 자리에 그것이 자리를 잡도록 한다.
그러한 국가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좋아하느냐는 누구나 이미 알아차릴 수 있다.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아니면 그 둘이 서로 혼합된 형태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접근방식 중 어느 것이든지 사회적인 결속력을 회복시키고 생활의 공통성을 강화시키는 쪽을 입법화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1933년의 독일의 재통합이 필요한 모든 교훈을 주었다.
오늘날 세속화가 틀림없이 가져올 위협적인 귀추들을 가장 잘 인식하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회학자들인 것같다. 덜 종교적인 것은 논리적으로 더욱 강제적인 것을 의미함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들은 윌리암 펜(William Penn)이 유명한 말- "국가들은 하나님이 다스림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군들이 다스릴 것이다" -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 최근 역사에서 정보를 수집하여 얻은 진실이라면 세속주의는 종교 뿐 아니라 인간성의 원수이다.
이러한 탐구 속에서 어느 곳에서나 표출되는 문제는 이미 오래된 문제이다. 곧 도덕성 없이도 준법정신이 있을 수 있으며, 종교 없이도 도덕성이 존재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도덕성과 준법정신의 문제에 관하여, 백년 전의 세속주의자들은 큰 규모에서 본다면 개인의 손에 도덕적 결정을 맡길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학교에서 도덕성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때 그들은 동기 부여의 문제로 치달아 갔다. 그들의 물질주의적인 세계관과 사건들의 자연스런 역사는 긍휼의 자질을 지원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세계관은 아우스비츠 수용소를 몰아낼 수 없었다. 니체는 후에 인과율(因果律)과 우연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인간다움과 형제애를 가지라는 권면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통해서 스트라우스를 조롱하였다. 맑스주의는 여전히 이 딜레마를 가진 채 고전하고 있다. 볼테르(Voltaire)는 "하녀들 앞에서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도덕성의 기초로 신앙이 필요하다고 부추겼다.
말하자면 칸트가 작업조건 중에서 난제를 시험하고는, 도덕성은 언제나 종교로 연결되고 언제나 종교를 의지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채드윅(Chadwick)이 진술한 바와 같이 프랑스 지식인 부르네티에르(F.Brunetiere)는 삶의 과정 속에서 존재론적으로 이 논증을 끌고 나가, 처음에는 무신론자로서 시작하였으나, 사"회는 도덕적 규범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종교없이 되어 나갈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교회로 돌아간다. 사회 가 종교없이는 꾸려나갈 수 없는 것은, 도덕성의 책임성과 도덕성의 중추는 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며 그룹이나 국가는 사회 평가의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배도와 회심의 순환
우리가 관찰하는 바는 타락한 세상에서 도덕적 부식의 "자연스런" 과정이요, 하나님의 보전하심과 소독, 정화, 갱신의 방책이 아니었다면 결국 인간을 산산조각 낼 부패의 성향이다(엡4:22). 이 하나님의 방책들은 시편 104편 30절에서 찬미한바 새롭게 창조하시는 일을 명백한 역사적인 사건들로 이해하면 아주 잘 지각될 수 있는 것들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이 방도들은 그 종류에 있어서 다양하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대로 인류의 흩어짐 뿐 아니라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의 소명은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실증된 인간의 모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보아야한다. 우리가 최근의 역사를 살펴보면, 때때로 갈수록 가공할 규모로 커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세속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의 환희가 종식을 고하였다. 아마 영원하신 하나님의 긍휼로 돌아가는 문화, 민족, 창조적인 소수의 또다른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도의 소작농 비유(눅20:9이하)와 탕자의 비유 (눅15:11이하)는 세속화의 그 이중적인 결과를 지시하는 것같다. 그러니 우리는 배도와 회심의 순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초기 사사(士師)시대에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험한 바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진보된 그룹에 해당하는 이들은 러시아의 지식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민족주의의 허구 적인 약속들을 거쳐 허무주의로, 허무주의에서 맑스주의적 사회 재통합으로, 결국 낡아가는 맑스주의 사회의 미몽과 수정을 지나서, 이제는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가는 수가 증가하는 와중에 있다. 고리체바(Tatiana Goricheva)의,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현란케 하는 하나님을 말할 위험성(Dangerous to Speakof God)이란 최근의 책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첫번째 조짐을 발견한다. 그들의 증거를 통하여 서구 사회는 다시 한번 빛의 길과 다메섹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은혜로운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
바람직한 몇 가지 반응들
2.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제안하는 바는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하나의 "대안"도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안이나 거절의 차원 그 어느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안" 이 반작용은 아니어야 한다. 상황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것을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1933년의 독일의 정치위기 상황에서 바르트(Barth)의 "오늘날 신학적 실존"에서 생각해보자. 기독교적 선언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같이" 진행되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안은 말의 형식에 있어서 엄격하여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내용은 어떤 세속적인 인식론(認識論)의 그릇에 담아져서도 안된다. 더 나아가 교회는 세상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하며, 신약성경의 진행질서를 따라서 거룩하지 않는 곳에서조차 거룩한 삶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엡4:17이하;딛2:12이하).
3. 이러한 기초 위에서 기독교의 동질성과 기독교의 외적인 확장을 위하여 세가지의 조치가 필요하다. 기도와 지속 적인 교제와 선포이다.
(a) 첫번째 임무는 기독교의 동질성의 중심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곧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 사랑의 표현이다. 세속주의에 대한 극한 대립임에 분명하다.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인간본성과 인간본성이 행하고 있는 경로를 아뢴다.
기도는 견고함과 굳셈을 야기시키고 필요한 안내에 복종한다. 독일의 작가 어니스트 윙거(Ernst Junger)는 소동하는 시대 속에서 민족적 사회주의 제국의 와해를 이렇게 지적하였다.
"사람들, 체제에 의하여 규격화되고 표준화되는 것을 피하도록 특별히 단순한 사람들을 돕기위하여 무엇을 추천 할 수 있는가? 기도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일지라도 수단의 핵심이 된다. 이것은 비상한 소득과 거대한 주권에 복종한다. 이는 역시 모든 신학을 떠나서도 진리이다.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 실패하고 가장 용기있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려 해도 허사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바른 길과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조용하게 조언해 주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기도하는 사람임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기도는 시각을 회복하기 위하여 도움울 주며 오스귀네스(Os Guinnes)가 "현대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라고 부른 것을 가르쳐 준다. 기도는 "총체적으로 생각하나 부분적으로 행동할" 용의를 갖게 도와 준다. 지각있는 기도의 열매로서 주어지는 올바른 시각은 동료 신자와 세상에 대한 사역의 선결조건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성화 생활과, "근신하고 의롭고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리려는" 기꺼움(딛2:12), 곧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려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표준에 충실하려는 기꺼운 자세, 일반적인 흐름에 관대하지 않고 양심적으로 살고 인간다움에 등을 돌리지 아니하려는 자세,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악에서 물러나려는 자세 등과 기도가 부합될 필요가 있다(딤후2:19). 세속주의와 투쟁하지 않고는 그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도 있을 수 없다. 제멋대로 굴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잊으려는 의지와 맞싸우지 않고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란 전혀 없다. 세속주의와 제멋대로 굴려는 자세와 하나님의 일들을 잊으려는 것이 이 시대 정신의 특징이다. 또한 그 투쟁은 매일같이 깨어 하나님께 충성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하기 위한 싸움을 수반한다.
(b) Diligite dominum... Veriliter agite, et confortetur cor vestrum(하나님을 사랑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을 굳세게 하시리라)-이것은 시편 31:24이하를 번역한 벌게이트(Vulgate)역이다. 그 시편 전체는 자기를 대적하는 환경 속에서 용기있는 행동이 가능함을 확신있게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15:58에서 사도 바울이 형제들에게 격려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두번째 임무는 동질성과 기독교의 외적 영향력 확대를 함께 도모하면서 "형제들을 굳게" 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눅22:32;행14:22 등). 그 일 은 불꽃이 일어나는 걸 보면 거기에 대고 바람을 불어 대게 힘을 기울인다. 그리고 신뢰의 방향으로 어떤 분별 있는 움직임을 지원하고 그리스도인다운 행실을 강화시키고자 애를 쓴 것이다.
이는 그 목적에 도움을 주는 작은 세포 그룹이나 소그룹의 의식적인 계발을 통하여 표현된다. 브라이언 윌슨은 종교로부터 연유되는 그 어느 선함도 "분파 종교" 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마 이 말을 교회와는 연관을 맺지 않는 소그룹의 열심인 사람들로 구성된 오염되지 않는 기독교를 의미한 것같다. 그는 오늘날의 교회와 교단들 "내의" 그와 유사한 그룹들의 조직망을 과소평가하며, 초기 경건주의와 웨슬레파 사람들의 "교회 내의 작은 교회" (ecclesionla in ecclesia)를 전승한 사람들을 과소평가한다. 그것이 제도적인 우둔함과 사회 결속력의 와해를 대처하는데 성공적이었던것 만큼은 사실이다. 데이비드 마틴은 하우게아니즘(Haugeanism)의 광범위한 영향 력과 노르웨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 그에 상응하는 운동에 매혹을 느낀 것같다. 여기서믿음은 보증자일 뿐 아니라 고상한 여러 인간관계의 원천임이 다시 입증된다.
(c) 끝으로 선포이다. 이는 기독교의 확장과 관련된 것이다. 먼저 그것은 사실들을 망각하고 있는 세속정신을 향하여 의로우시고 긍휼어리신 하나님의 실체를 조용하게 다시 재천명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환경 속에서 종교는 여전히 하나의 주요한 주제로 인정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문제(죽음의 문제와 같이)는 아주 관심 밖의 문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와 같은 사회 뿐 아니라 개인들도 사실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를 대면해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빌2:15)를 향하여 다시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교회의 임무다. 교회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음" 을 생각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근거임을 알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임무들을 추구할 때 교회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빛을 나눌 등불이 될 것이다(마5:15). 교회는 가루 속에 들어있는 누룩같이 행동해야 할 것이며 놀랍도록 풍성하게 자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둥지틀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임무를 수행해 나가면서 창조명령을 받아 자기들의 소명을 행사할 뿐 아니라 "주의 전(殿)을 짓는데 도와야" 한다(슥6:15). 한편 당신의 피조물들을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기꺼히 참예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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