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오후예배 때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수요예배 때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 두 말씀을 연결해서 믿음에 대해서 정립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간 사건을 신앙의 타락이라고 보느냐, 아니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애굽으로 갔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저번 주에 살펴본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믿음이 없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네 본토 친척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 고 할 때 그가 이미 믿음을 갖고 있어서 '네'하고 믿음으로 떠난 것이라면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것은 절망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생애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출발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에 도달할 때 아브라함은 결국 믿음으로 본토 아비 집을 떠났고 또 말년에 얻은 아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떳떳이 바칠 수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약코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여러 정황을 통해서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므로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아브라함과 마찬가지고 세움을 입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보시면 애굽에 내려갔던 사건이 만일 우리가 전제를 할 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분명히 타락입니다. 믿음이 떨어진 것이 됩니다. 그러면 결론도 달라져야지요. '보라, 그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고 애굽에 내려가자 그가 거기서 어떤 수치를 당했는가? '이런 생각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이 믿음의 타락이 아니라면 애굽에 내려가서 아내를 빼앗겼던 사건을 무엇이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느냐하는 어려움도 생깁니다. 저번 주 주일오후 예배 때 강조한 것처럼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면 이 말씀을 다시 풀어볼 필요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기근을 통해 아브라함을 애굽까지 떠 밀어내셨는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 일을 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본문을 추적해 봅시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하나님의 꾸짖음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꾸짖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꾸짖게 된 것은 창세기 17장에서부터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렇게 말씀을 시작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하시니 아브람이 어떻게 합니까? 엎드립니다. 그런데 이 꾸중은 16장과 15절 이야기를 근거로 나옵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17장은 무얼로 시작되느냐 하면 '아브람의 나시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무엇을 꾸짖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낳기 훨씬 전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그 시점부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것은 단 한 가지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는 이 사건입니다.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손이된다'는 약속이 15장에서 나옵니다. 1절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이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약속을 하갈을 통해서 얻고 싶어 했습니다. 거기에 대한 꾸중을 17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그가 이스마엘을 얻은 나이가 팔십 육세인데 이것 꾸짖으러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즉 십 삼년간을 침묵 해 버리십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집을 떠나 가나안에 올 때 유일하게 그의 위안이요, 힘이요, 의지할 이는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십 삼년간을 침묵 해 버리시고 나타나지 않으시면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고 하신 것은 분명히 꾸중입니다. '너는 아직 왜 나를 못 믿느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12장은 꾸중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에 내려간 것은 믿음을 저 버리고 간 징계라는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깊이 있게 생각해야 될 문제는 아브람이 애굽에 갔다 온 후 아브람이 어떻게 변했느냐하는 문제에 초점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아브람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롯과 헤어지는 것이고 하나는 가나안 전쟁 속에 그가 감히 끼어든 놀라운 담대함입니다. 롯과 헤어졌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번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아브람이 본토친척 집을 떠날 때도 혼자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가족 조카까지 끌고 나와야했든 상황 배경을 설명 드렸습니다. 이 시대에는 자기 목숨을 자기 힘으로 지킬 수밖에 없는 때였습니다. 애굽에 내려가면서 사라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말하여야 할 만큼 살벌한 시대입니다. 자기아내와 혈연관계가 없고 안면이 알려지지 않은 곳에 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조카인 롯과 헤어지는 결단을 합니다. 그리고 롯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갔을 때도 연합군으로 형성된 적진에 318명의 식솔을 데리고 가서 구해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은 여기서 자기 목숨 하나도 버티고 있기도 바쁜 상황입니다. 여기서 감히 누구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입니까? 이런 정황을 우리는 쉽게 아브라함이니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버립니다. 이것은 편견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서 그 배짱이 생겼는가? 애굽에서 입니다. 애굽에서 어떻게 이런 배짱이 생겼습니까? 그가 애굽에 내려 갈 때는 신앙을 논할 그런 수준에 와 있지 않았습니다. 저번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어떤 종교적인 성향으로 꿈에 본 환상이 너무 생생해서 가기 싫지만 떠밀러 온 셈입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 번 나타났습니다. 하란에서도 나타났고 세겜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이 분이나 의지하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들려서 아브라함은 자연스럽게 물이 있는 곳 자기 양때를 먹일 수 있는 곳인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지요. 가면서 생각하니까 자기 아내가 걱정입니다. 너무 예쁘니 아내를 뺏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은 뻔한 일이였습니다. 동생이라고 하면 오빠에게 후하게 대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라고 하면 남편을 후하게 대접하고 아내를 빼앗아가는 법은 없지요. 그래서 동생이라고 하자 그렇게 짜서 내려갑니다.
가서 정말 빼앗겼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가만히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어겼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그럴 쳤다 그래서 그가 회개했다 이런 생각은 좀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회개한 장면이 없습니다. 오히려 바로왕이 회개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회개합니까? 그 당시의 바로하면 전 세계의 통치자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시시한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당시 바로는 로마왕 보다 알렉산더 보다 강합니다. 그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하나 뺏은 것 때문에 밤새도록 괴롭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다 데리고 가라' 그리고 금은 보화까지 줍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에게 '너 때문에 내가 죽을뻔 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하나님과 관계없이 이 사건을 통해서 가장 놀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 시길래 바로가 이렇게 터진단 말인가?'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을 도박하듯이 '모 아니면 게' 이런 식의 믿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끊임없이 설득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설득에 녹아내리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끊임없이 가르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본을 보이면서 우리를 설득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믿음을 설명하면서 잘 못된 부분이 이것입니다. '믿지 않고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일단 믿어 놓고 이야기 합시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 같지만 굉장히 어리석은 말입니다. '당신이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갈 때 운전사를 믿고 타지 않습니까? 그 버스가 대전역 가는 것을 믿고 타지 않습니까? 터널을 지날 때 터널이 무너지지 않을 것을 믿고 타지 않습니까?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일단 믿어놓고 이야기 합시다'이렇게 믿음을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확률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 않아서 예배드리는 것은 이 지붕이 무너지지 않을 것을 믿고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수확이고 확률이지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어버렸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었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인격으로 우리에게 설득하십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전 세계인들이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주 예수를 믿으라 안 믿으면 죽인다'이래보십시오. 안 믿을 사람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찾아오셔서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내놔라 그러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겠다'하는 상거래가 아니란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바로 사건에서 믿음의 눈을 뜹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하는 것을 처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감히 롯과 헤어지는 결단을 합니다. ' 우리가 싸울 필요가 어디 있느냐 너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너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그가 무엇을 믿고 무슨 배경으로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기근에 쫓겨 애굽으로 간 자가 말입니다. 애굽에서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단한 분이시다 어쨌든 바로보다 세구나' 이것을 배우고 오는 것입니다. 롯이 사로 잡힌 것을 보자 그래서 들고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생활과 애굽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가야 되지 않는 곳으로 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틀림없이 간섭하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그 수준에 이르지 않는 사람에게 심지도 않고 거두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되지않은 것을 미리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면서 내가 갔다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라고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이가 다섯을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이가 둘을 남기고 한 달란트 받은 이가 하나를 남깁니다. 하나 받은 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인이여 저는 주인이 곧은 사람인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이것을 땅에 묻었다가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어찌하여 변리라도 얻어낼 수 있게 은행에라도 맡기지 않았느냐'이렇게 꾸짖어 십니다. 주지 않은 것으로 남기라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섯을, 둘을, 하나를 줍니다. 그것을 이 시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배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얼마만큼 이해하십니까? 다섯만큼? 둘만큼? 하나만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설득하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라고 알게 하신 부분만큼은 여러분의 책임의 한계입니다. 하나를 맡기고 다섯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맡기지 않고 찾지도 않습니다. 그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우리에게는 성장을 차근 차근 한 계단씩 올라가는 지속성이 있어야합니다. 성경일독도 그런 관점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성경을 도대체 몇 독을 했습니까? 말씀을 한 장 한 절 보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훈련을 시키실려고 하는지, 어는 부분을 취하 실려고 하는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겸손한 경청이 있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의욕만 있으면 안 됩니다. 물론 의욕이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균형을 잘 맞추어야합니다.
저가 목요일 아침 일찍 강원도로 갔습니다. 대학원총동문회 임원 수련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화콘도에 도착해서 좀 쉬었다가 곧 바로 P.C방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맡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얼마나 정신없이 했던지 저녁식사 시간도 모르고 한참 설교준비를 하다가 그 유명한 곰치국을 먹지 못할 뻔 했습니다. 핸드폰이 와서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 주에 조는 사람만 있어봐라, 이 고생을 하면서 설교준비 했는데' 하루 동안 속초에 있으면서 설교마무리를 못한 것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잘 놀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다른 목사님들은 미리 설교준비를 했거나 초안을 잡아 놓았거나 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니까 ' 내가 참 어리석구나 '하는 생각이 더는 것입니다.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설교준비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하루 하루 성실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심을 것이 있고 하루 거둘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굉장히 엉뚱하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곤란을 겪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비 오는 날 반가와 하는 삽살개 입니다. 온 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하얀 와이셔츠 품속에 뛰어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지 않는지 점검해야 됩니다.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안기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의욕을 가지는 것은 대단히 좋습니다. 의욕도 없고 균형도 잡히지 않고 지혜도 없다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의욕적으로 일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그 의욕 앞에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설득시키고 계신 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 신앙을 비교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바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그래서 하루하루 성실히 성장해가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혹시 애굽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힘을 내세요. 여러분들에게 직접 경험하게 하시든지 아니면 엎에 계신 분을 통해서 경험케 하십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은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왕이 죽을 뻔한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저희교회도 바로왕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바로도 있고 창세기 15장에 와 계신분도 있고 17장에 와 계신분도 있고 22장에 와 계신분도 있습니다. 성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시며 간섭하시며 설득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저가 속초이야기를 한번 더 해야겠습니다. 동문회임원수련회를 주관하시는 분이 강남에 큰 교회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마 가끔씩 성도들과 교역자들과 다녀간 적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프로그램을 다 짜고 또 식당을 지정해서 예약도 해고 유명한 음식이 무엇이며 맛있는 식당이 어디며 이런 것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희들이 곰치로 만든 물곰탕과 조계로 만든 섭국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주로 성계알 비빔밥, 자연산 광어, 육회, 등심 뭐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강남지역사람들은 이런 것 별로 좋아안합니다. 주로 특이한 음식을 좋아하는데 특별난 웰빙 음식을 찾아다닙니다. 그 중에 강원도에서는 물 곰탕과 섭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 곰탕집은 아무리 자리가 남아도 예약을 안 하면 손님을 않 받는다고 합니다. 제 옆에 앉은 목사님이 물 곰탕 매니아인데 그 맛이 기가 막히다고 입이 마르도록 설명을 합디다. 자기는 강원도에서 주문을 해서 먹는데 이 식당에서 맛처럼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잘 드시는지, 그런데 물 곰탕재료가 곰치입니다. 이 곰치는 어부들이 잡으면 재수 없다고 버립니다. 아무 쓸모없는 고기입니다. 살도 물렁물렁하면서 맛도 전혀 없습니다. 이런 것을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이 주어다가 쉽게 구할 수 있는 콩나물이나 부추같은 것을 넣어서 끌인 것이 물 곰탕입니다. 아무나 먹는 것이 아니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어부들이 버린 고기를 주어다가 끼니를 연명하기 위해서 먹든 것이 곰탕이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섭국은 섭조계가 주 재료입니다. 섭조계는 아주 작은 조계류인데 이것도 먹지 않고 버리든 것입니다. 조계류에서는 그의 쓸모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빈민들이 주어서 밀가루 넣어 끌인 것이 바로 섭국입니다. 그런데 요쯤 그 부자로 사는 강남권사람들이 먹어 보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옛날 맛을 찾아서 먹는 경우가 있고 하여튼 이것이 인기입니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이 먹든 것이 지금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못 먹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쓸모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붙들어서 때가 되면 이 시대에 큰 역사를 이루는 복된 심령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끄집어내어 위대한 인물, 그가 축복하면 축복을 받고 그가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못 배웠지만 아무리 연약하지만 아무리 가난하지만 하나님이 때가 되어 쓰실 때는 엄청난 일을 감당하실 줄 믿습니다. 요즘 모유은행이라고 있습니다. 모유저장병원이라고도 하고요. 이곳에서는 모유를 저장해서 보관하는데 유효기간이 1년이나 된답니다. 젖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모유저장 병원에 가서 모유를 주면 모유 준 사람도 젖이 부풀지 않고 고통을 당하지 않아서 좋고 또 모유가 나오지 않는 아이에게 모유를 공급해서 좋고, 그런데 이 모유를 먹고 자란 아이가 어떤 위대한 인물이 될지 누가 압니까? 그 아이의 건강을 유지하고 또 저항력을 키워주어 튼튼하게 자라게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면 이것 또한 유대한일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셔서 이 땅에서 계획하시고 이루시고자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를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반응하느냐하는 문제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며 은혜를 베푸는 분이시며 얼마나 전능하시며 얼마나 복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계획과 목표와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말씀에 그 권위에 얼마나 순종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실 것이며 도와주실 것이며 붙들어 주실 것이며 영광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힘들어도 오늘 어려워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요.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즘 날씨가 겨울 같지 않고 봄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원료비도 싸게 먹히고 살만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저주입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이것이 복만이 아닙니다. 겨울이 겨울 다와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삶을 사셔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묶어서라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 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날마다 성장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