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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53간절하면 이루어집니다.(마 20:29-34)2017. 7. 30. 프롤로그
-지중해에 피그말리온이란 젊은 조각가가 살고 있었다.
볼품없는 외모를 지녔던 그는 사랑에 대해서는 체념한 채, 조각에만 정열을 바쳤다.
-그러다가 자신도 언젠가는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심혈을 기울여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했다.
그 조각은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여인상이었고, 그는 정성스럽게 다듬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여인상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사랑의 감정으로 싹터갔다.
그래서 매일 꽃을 꺾어 여인상 앞에 바쳤다.
-어느 날이었다.
섬에서 자신의 소원을 비는 축제가 벌어졌다.
피그말리온은 신께 그 여인상을 사랑하게 되었노라며, 아내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여인상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손에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놀란 피그말리온이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자, 조각상에서 점점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며 사람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피그말리온의 순수한 사랑을 받아들인 신이, 그 조각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조각상이 살아 있는 여인으로 변하자, 피그말리온은 결혼을 하고 파포스라는 딸을 낳았다.
-로젠탈과 제이콥슨은 누군가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 기대, 예측이 대상에게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을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뭔가를 기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해도, 마음속에서 믿고 행동함으로써 상대를 자신의 기대대로 변하게 만드는 신기한 능력이 우리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기뻐하는 과학 : 동아시아, 2010] 이란 책이 있다.
상명대학교 강상욱 교수가 쓴 책인데, 과학을 하며 느낀 과학 현상과, 기독교와 불교에 나타난 가르침의 유사성을 모아, 이렇게 책으로 낸 것이다.
그 책의 5장에 ‘간절하게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강교수는 <모든 종교가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전한다>며, 그 말을 들은 어떤 친구의 의문을 전한다.
그 친구는 “간절히 바라서 이루어진다면, 한 달 내내 아무것도 안 하고, 로또 1등 당첨시켜 달라고 눈물 흘려가며 기도하면 이루어지겠네?” 라고 놀린다.
그에 대해 강교수는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에, 기대기만 하면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꿈 측면에서, 이 말이 과학적 심리적으로 지지를 받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예를 들었다.
한 고교생의 소원이 외국어 영역에서 1등급을 받는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 바람은 매우 간절하여 매일 기도하며 절실하게 바랐다고 하자.
그 학생의 바람이 그렇게 간절했다면, 집에 오면 TV나 인터넷으로 시간을 때우겠느냐는 것이다.
너무나도 간절하면 무언가를 찾게 된다.
당장 주변의 외국어영역 고수를 찾아가 방법을 전수받고, 매일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배울 것이다.
-너무나도 간절한데, 그날 해야 할 양을 채우지 못했다면, 잠이 오겠느냐는 것이다.
그 학생이 너무나 간절한 나머지, 그 날 해야 할 양을 하지 않고 잠들었다면, 그건 진정으로 간절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그날 해야 할 양을 소화하지 못했는데, 잠이 잘 오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1등급에 도달하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성적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교수는 자기 경험을 들려준다.
자신은 대학원 시절 석박사를 마치고, 박사 후 과정(Post Doctor)으로, 미국의 MIT(메사추세츠공과대학)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많아야 1~2명 가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가겠느냐”며 주위에서 의아해 했다.
그런데 자신은 이상하게 당시 MIT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간절했다.
-그런 마음에 대학원 시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고, 결론은 더 좋은 논문을 많이 쓰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아이디어와 성실한 실험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매일 책과 논문을 공부하며, 그날 해야 할 실험이 끝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MIT에 너무 가고 싶어서 단 하루도 소홀히 보내지 않았다.
힘들고 아이디어가 실패해서 의기소침할 때도, 졸업 후 MIT에서 연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다시 도전했고, 그렇게 6년이 지난 후 드디어 합격 통지를 받았다.
-강교수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자기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사례라는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그 다음이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나오며, 그렇게 살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몇 천배는 올라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매우 절실한 마음 상태를 우리는 ‘간절하다’ 라고 표현한다.
간절하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매우 지성스럽고 절실한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
정성 ‘간(懇)’ 자에 갈/문지를 ‘절(切)’ 자를 함께 쓴다.
한자 의미대로 따져보면, 정성을 갈고 문지르는, 그야말로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루어지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간절한 것이 먼저라는 사실이다.
간절해야 이루어진다.
간절함으로 이루는 것이다.
간절하여 이루면 기쁨이 배가 된다.
-올림픽 같은 세계 대회에서의 메달이 왜 귀한가?
왜 선수들이 메달을 따고 눈물을 흘리는가?
쉽게 딸 수 있는 거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무나 간절하여 이루었기 때문에, 눈물 나게 기쁜 것이다.
-사시 제도가 올해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존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지만 결국 사라진다.
예전 시골 동네에서는 사시에 붙으면 동네잔치를 했다.
사시를 한 번에 붙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방의 쓰라림을 몇 번씩 맛본다.
그럴수록 간절함은 더해진다.
그런 간절함으로 사시 합격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충분히 동네 잔치할 만하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다.
예수님은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계신다.
한 번 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알고 가시는 길이다.
단순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는 것과, 어떻게 죽임을 당할지까지 알고 가는 것은 또 다르다.
주님의 마음은 당연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 속도 모르고 청탁을 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둘은 핵심제자다.
예수님의 제자 중 3인방에 들어간다.
요한은 별명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였다.
-그럼 3인방 중 베드로만 쏙 빠지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자들이 두 제자에게 분노했는데, 아마 베드로가 가장 펄쩍 뛰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껄껄 웃으시며, 다른 제자들을 달래셨다.
최고의 리더는 섬김의 리더라는 것을...
참된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것을.... “최고의 리더는 섬김의 리더입니다.”“최고의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입니다.”
-그래서 아들 청탁의 일은 해프닝으로 끝났고 교통정리가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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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일행이 여리고를 지나고 있었다.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예수님 생각해서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예수님 위로해 드리고, 예수님께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꼭 엄마는 중병에 걸려 죽어 가는데, 자기 배고픈 것만 생각하고, 젖꼭지를 물고 놓지 않는 갓난애 같다.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들이나 우리나 큰 차이가 있을까 싶다.
-다 자기 살기 바쁘다.
주님은 뒷전으로 밀린다.
주님이 일번이 아닌 자기가 일번이다.
교회가 일번이 아닌 자기 가정이 일번이다.
주일이 일번이 아닌 자기 취미활동이 일번이다.
십일조가 일번이 아닌 생활비 지출이 일번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큰 무리였다.
십여 명을 큰 무리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꽤 상당한 숫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께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주님께 헌신할 마음도, 주님께 충성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따랐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주님이 일하실지 모르니, 그들은 잠시도 주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 숫자가 100이면 뭐하고, 1000이면 뭐하겠나...-------------------------------------------------------
-몸이 성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래도 양호하다.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맹인 두 사람은 길 가에 앉아 있었다.
늘 그 자리에 나와 있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동선을 미리 파악하고, 누가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는지 모른다.
그건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그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지, 환경적인 요인으로 맹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면, 광명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상상만 하겠지만, 살다가 시력을 잃어 맹인이 되었다면, 생활하기에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역시 그것도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들 곁을 지나가게 되었고, 그들이 그걸 알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왜? 간절했으니까...
그들은 눈 뜨는 것이 간절했다.
자기 평생에 두 눈으로 광명세계를 보고픈 간절함이 있었다.
-그렇다. 간절하면 꿈이 생긴다.
간절하면 불타는 소원이 생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그게 진정한 간절함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진다.
간절함의 깊이가 점점점점 더해진다.
-왜 기도하다가 마는가?
왜 몇 번 기도하다가 중간에 관두는가?
간절함이 없어서 그렇다.
말로는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아직은 살만해서 그렇다.
간절하면 버틴다.
진짜 간절하면 죽을힘을 다해, 기도의 자리에서 버틴다.
-맹인에게는 다른 사람이 안 보였다.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게 중요하다.
이게 간절함이다.
정말 간절하면 다른 사람이 의식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기도하면서 자꾸 옆 사람이 의식된다면 덜 다급한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면 응답되려고 하면 아직 멀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성경에서 “간절히”가 빠진 기도는 생각할 수 없다.
간절히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맹인이니까 다른 사람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예수님께만 집중할 수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다는 최고의 약점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아쉬움이 있어야 예수님을 찾는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예수님도 부럽지 않다.
그게 다 자기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안다.
그러나 인생에 하자가 생기면 예수님을 찾는다.
어쩜 그래서 주님이 우리 환경을 흔드시는지 모른다.
-어느 날 환경이 흔들리면, 예수님 찾으라는 사인으로 알라.
예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라는 사인으로 눈치 채라.
-맹인이 눈에 뵈는 게 없이 무대포로 달려드니, 누가 그들을 막아서겠는가?
때로는 그런 무모함도 필요하다.
계속 재기만 하면, 아예 시작도 못할 수 있다.
-맹인은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는가?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니까, 몸을 사리게 되고 소심하게 된다.
제자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잃을래야 잃을 게 없으니, 인생의 전부를 걸고, 간절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다.
-맹인의 간절함은 소리의 크기에서도 알 수 있다.“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이 이 소리를 얼마나 크게 했을 거 같은가?
예수님 주위에 큰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큰 무리가 조용히 주를 따랐을까?
그랬다면 맹인들이 예수님을 조용히 불러도 됐다.
그런데 30절에 보면 “소리 질러” 라고 했다.
-“엄마” 이 정도는 소리 질렀다고 하지 않는다.
“야, 너 왜 소리 지르는데...” 할 정도면 “엄마” 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엄마를 향해 차가 돌진해온다면, 그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를 것이다.
“엄마~”
-어떤 사람은 소리 높여 부르짖어 기도하면, “아니, 하나님이 귀라도 먹었대? 하나님이 주무시기라도 한 대? 왜 그리 소리를 질러대?” 라고 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또 맞는 말도 아니다.
성경에는 “부르짖으라”는 말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간절하면 부르짖게 되어 있다.
간절하면 소리 지르게 되어 있다.
속에 불타는 간절함이 있는데, 조용히 속삭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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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맹인들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니, 무리가 그들을 꾸짖었다.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잠잠하라”고 꾸짖어봤자 소용없다.
간절한 사람에게는 그게 안 통한다.
오히려 그럴수록 간절함이 더 커진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라. “더욱 소리 질러”
그렇다. 그게 간절함이다.
누가 뭐라고 한다고 입 다문다면, 진정한 간절함이 아니다.
소리 질러서 안 되면, 더욱 소리 지르는 게 간절함이다.
-간절하면 포기를 모른다.
간절하면 장애도 극복한다.
간절하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자기들을 향해 꾸짖는 사람들은 큰 무리다.
숫자만 많은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은 두 눈이 멀쩡한 이들이다.
하지만 맹인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담대했다.
그게 간절함이다.
-간절함에서 담대함이 나오는 법이다.
간절한 사람의 입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같은 말로 반복하여 소리 질렀다.
새로운 말을 하려고 긴 생각에 잠기지 않았다.
그들이 반복하여 지른 소리는 짧고 강렬했다.
-사실 이보다 좋은 기도는 없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면 그걸로 끝나는 것 아닌가?-------------------------------------------------------
-맹인들의 이 짧은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이 첫 번째 소리에 반응을 안 하셨다.
예수님이 못 들었을 거 같지 않은데, 그냥 지나치시려고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첫 번째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예삿소리가 아니다.
한 맺힌 소리다.
간절함이 절절히 흐르는 소리다.
안 들어주면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거 같은 소리다.
-예수님이 그들의 첫 번째 소리에, 왜 반응을 안 보이셨을까?
그들이 어떻게 나오나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 안에 있는 간절함을 테스트하신 것이다.
그들이 눈 뜨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소원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육신을 입고 있는 예수님은, 여러 가지 제약으로 모든 사람을 고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을 하셔야 했다.
간절함이 있는 사람부터 고쳐주시기로 하는 거였다.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고침받아도 그만 그렇지 않아도 그만이다.
고침 받아도 감사가 작다.
그러나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고침 받아야 한다.
고침 받으면 큰 감사를 한다.
-첫 번째 소리를 외면하신 예수님께 실망하여, 그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관뒀다면, 어떻게 될 뻔 했는가?
예수님이 본심은 그게 아닌데, 가끔 맘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그것에 속으면 안 된다.
그게 믿음 테스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게 간절함 테스트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다.
-그 때 맹인처럼 더욱 소리 질러야 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주님이 두 번째 소리도 못 들으신 척 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 번째 더욱 소리 질러야 한다.
-그렇게 언제까지 소리 질러야 하는가?
주님이 머물러 서실 때까지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소리 질러 기도해야 하는가?
응답받을 때까지....
-간절하면 물러서지 않는다.
간절하면 기도 기권하는 법이 없다.
주님이 머물러 서실 때까지, 주님이 응답의 말씀을 하실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들에게 이 말은 꿈에라도 듣고 싶었던 말이다.
간절함에 포기하지 않고 소리 질렀더니, 평생에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꽝(?)이 없는 로또를 쥔 기분이었을 게다.
-그들의 심장은 마구 쿵쾅거렸다.
잠시 후면 광명을 얻게 된다.
푸른 하늘을 볼 수 있고, 공중의 새를 볼 수 있다.
푸르른 초목을 볼 수 있고, 널따란 들판을 볼 수 있다.
기어 다니는 동물을 볼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걸어 다니는 사람, 가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자기를 고쳐준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대답해야 했다.
물론 어렵지 않은 대답이다.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대답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에게는 이 한 가지 대답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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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 입을 맞춘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제 잠시 후면 평생의 한을 풀게 된다.
그 동안의 한 맺힌 소원을 이루게 된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답을 하면서, 자신을 마음에 그렸다.
광명을 얻고 어린애마냥 기뻐 뛰는 자신을 마음에 그렸다.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마음에 그림을 그린다.
그리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린다.
결국 그 마음의 그림대로 된다.
-산악인 엄홍길이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심상사성(心想事成)이라고 한다.
마음이 그리는 대로 일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엄홍길은 히말라야 8,000m 이상 16좌 등반에 성공한, 세계 최초의 산악인이다.
그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22년 동안, 무려 38번의 도전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 후배 6명과 셰르파 4명을 잃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6좌 등반에 도전하고 완등을 간절히 바라며, 노력했기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꿋꿋이 꿈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는 그의 말이 울림을 준다.
그게 간절함의 능력이다.
마음에 그림을 그린 후,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 그 그림이 현실이 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셨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긍휼의 심장을 가지셨다는 말을 기억하는가?
긍휼의 심장을 가지신 예수님이,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눈은 눈이되 볼 수 없었던 눈, 시신경이 죽어 있는 눈을, 생명이신 예수님이 손으로 만지자 곧 보게 되었다.
특별한 치유행위를 하시지 않았다.
그냥 만지기만 했는데, 죽은 시신경이 살아나 시력이 회복되었다.
생명의 주님에 의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그들은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뭐라도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도, 빈 몸뚱이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몸으로 예수님을 따랐다.
-와츠의 고백에도 나온다.
찬송가 143장 5절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가사처럼 몸 밖에 드릴 것 없어서, 이 몸 바치는 것이다.
가진 것 빼놓고, 떼어놓고, 숨겨두고,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면 안 된다.
그에 대한 경고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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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은 오늘 여리고를 빠져나가는 길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났다.
그래서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됐다.
그들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생명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그럼 우리는 이미 운명이 바뀐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영적 맹인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눈뜨게 할 능력은 없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주님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거야말로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간절함도 필요하고, 자식을 키우는 것에 대한 간절함도 필요하고, 삶의 문제 해결에 대한 간절함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간절함이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함보다 크거나, 자신의 영적 성장보다 앞서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