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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사 정리(18세기 중반까지) 장창호 선생
- 구령.소라의 옛 영토 가야향(伽倻鄕)
춘양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구령(駒令) ·소라(召羅) 두 소국의 영토였다. 지금의 춘양면과 법전면에 걸쳐 존재했는데, 지형은 산으로 에워싸인 험지지만, 운곡천을 비롯한 물이 풍부하고 하천 주위로 좁고 긴 논밭이 이어져 있어 작은 나라의 입지 조건으로선 적합하기도 했다.
구령국(駒令國)은 지금의 춘양면 소재지 북쪽으로 30여 리에 있는 도심의 황터 마을에 자리를 잡고 그 뒷 편에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성곽을 쌓았다. 골짜기 좌우와 앞뒤의 산등성이에 성터가 완연하다. 성곽은 관적령산(串赤嶺山) 위에 있었으며, 계곡 삼면(三面)은 골짜기 어귀가 험준하여 앞으로 트인 쪽만 잘 방어하면 외부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까지도 성문을 쌓은 두 개의 큰 추춧돌이 남아 있었으며, 남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에도 산 위에 작은 돌로 쌓은 성이 있었다. 그 돌성 중앙에는 장군단(將軍壇)의 터 흔적이 보인다.
각화사(覺華寺)의 동네 입구인 석현(石峴 현지명 배고개)을 경계로 하여 또 다른 소국인 소라국과 이웃하여 존재했다.
한편 소라국은 지금의 법전면 소천2리의 조래에 터를 잡았다. 운곡천 하류의 소라촌에는 궁궐과 감옥터라고 전해지는 큰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다. 소천2리의 어풍대는 소라왕이 전투에 패하여 쉬었던 곳이라고 하며, 춘양면 소로리는 小魯國(작은나라)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본소로에는 도심왕(구령국왕)이 병사 30명으로 소라국을 쳐서 돌다리 남쪽에서 크게 패했다고 전해지는데, 본소로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고려조에는 소라부곡이었던 나라.
두 소국은 이웃하여 살면서 전투를 하기도 했는데 소라국이 이겼으리라 추정되는데, 구령국 강역 내에 소라리라고 불리는 마을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온 이유이기도 하다.
두 소국은 먼저 고구려의 강역에 속했다가 신라에 복속되면서 가야향(加也鄕)이라 불리웠다. 삼국사기 열전이나 대동지지 등에 두 소국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신라 5대 왕인 파사 이사금 시절 쯤에 신라에 복속되고주1)이후로는 가야향(伽倻鄕)으로 불리웠을 것이라 추정된다.
주1)삼국사기 본기 파사이사금 편에는 백제의 나이군(奈已郡,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춘양과 가까운 실직국(悉直國, 울진. 삼척)도 병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령.소라국은 규모가 작아서 기록에서 뺏을 거라 추정한다.
-춘양현으로 승격, 그러나 안동의 속현
고려 왕조가 개창되면서 가야향은 소수의 사람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음서나 문.무과를 통해 중앙 관료로 진출하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춘양 김씨의 시조 김이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김이는 128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음서를 통해 등용되었는데, 아명은 김지정(金之琔)이고, 고친 이름이 김정미(金廷美)인데, 충선왕이 김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충렬왕,충선왕,충숙왕 세 임금 밑에서 고위관료를 지냈다.
또한 충렬왕 때에 이 지역 출신으로 군인이 되어 전법총랑 호군전객령(典法摠郞 護軍典客令) 벼슬에 있던 김인궤(金仁軌)가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공을 세웠다. 김인궤는 충렬왕 10년 왕을 호위하여 이곳에 내려와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공로로 고향인 가야향(伽倻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때 가야향은 춘양현으로 승격되었다. 김인궤는 명실공히 춘양에서 조세권(수조권)과 역 징발권, 그리고 세습이 가능한 지역통치 호족이었다.
가야향 사람들은 신분상 양인이지만 군현(郡縣)에 거주한 일반 농민에 비해 차별을 받았다. 신분 상승을 적극 희망하는 가야향 상민들은 김인궤를 도와 홍건적을 물리치는 공로에 기여함으로써 현으로 승격되고 정상적인 조세를 내는 농업이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인궤는 중앙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기에 수조를 걷고 호수를 관리하는 등의 행정업무를 춘양현 호장을 비롯한 향리들이 관장하고 있었다.
김인궤의 공으로 충렬왕 때 먼저 가야향(加也鄕)이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되었고 이어 충선왕 때는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 덕산(德山)부곡은 재산현(才山縣)이 되었으며 다음으로 충혜왕 때 환관인 강금강(姜金剛)이 원나라에서 수고한 공으로 그의 고향 퇴관(退串)부곡이 내성현(柰城縣)으로 승격되었듯이 1300년을 전후하여 이지역의 향.부곡은 현으로 승격된 곳이 많았다.
춘양현에서 나고 자란 삼척 본관의 김인궤 가문은 조선왕조 건립에 반대하여 고려왕권 수호의 입장에 있었고, 조선이 건국되자 식읍이 박탈되었다. 이 때에 춘양은 무주공산이었고, 지역 향리들이 지역 통치를 좌우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조 중반까지 지속된다.
속현 춘양에 사는 상민은 세금은 내지만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민으로서의 혜택은 없으며 ,오히려 안동부의 관리와 지역 향리들의 이중 침탈을 받았다.
속현을 침탈한 예는 인동에서도 보여진다. <인동 현감(仁同縣監) 이우양(李遇陽)은 속현인 약목(若木)에 기생을 두고 항상 왕래하며 음행(淫行)하고 군자미(軍資米)로 공전(貢錢) 을 바꾸어 대납(代納) 하고 그 값을 민간(民間)에서 징수> 하는 등 주현 현감이 속현을 침탈하는 것은 일상화된 듯하다. (단종 1년 1월 10일 1453년)
왕조실록에는 속현을 <한두 호장(戶長)이 주관(主管)하므로 그 백성들을 소요(騷擾)스럽게 하여 폐단을 일으킨 것이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보고하기도 하고(태종14년 7월), <아전(衙前)들만 그대로 속현(屬縣)을 지키게 한다면, 아전의 무리들은 꺼림이 없어서 욕심을 마음대로 부려 백성을 침해하여, 백성에게 끼친 폐해가 또한 과중하게 될 것>(세종 17년 7월)이라는 등 <주·부·군·현의 관리가 그 속현(屬縣)을 침탈하는 일이 있어, 속현의 백성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밤낮으로 직속 수령을 얻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토지의 넓이와 백성의 다소를 헤아려서 수령을 파견>하기를 원하는 관리들의 청원이 나온다. (세종2년1월 9일,1420년)
조선왕조는 중앙집권 통치를 완성하기 위해 속현을 주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실시하고 지방 수령을 파견하였지만, 춘양은 계속 안동부의 속현으로 남아 있게 된다. 아마 토지도 좁고 주민의 수도 적어 세수가 보잘 것 없는 춘양은 조선 말기 봉화군으로 통합될 때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속현으로 남아 있었다고 보여진다.
속현이 주현으로 승격 되는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는 토지와 인구수이고 다음으로는 그 지방출신의 공로로 승격되는 것이 그 것이다. 고려조나 조선 초와는 달리 후대로 갈수록 토지와 인구수 기준이 더 크게 작용하였고, 반드시 조정회의에서 결론을 내었다. 춘양은 조정회의에서 한 번도 주현승격이란 논제로 올라온 적이 없었다.
고려말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집권이 이루어진 때부터 태종 조까지 시기별 도별 지방관(감무)의 설치를≪세종실록지리지≫에 의거하면 다음의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구분\도별 | 경기 | 충청 | 경상 | 전라 | 강원 | 황해 | 평안 | 함길 | 합계 |
공양왕대 | 5 | 3 | 21 | 3 | 2 | 2 | 36 | ||
태조∼태종 | 3 | 6 | 2 | 3 | 1 | 2 | 1 | 18 | |
합 계 | 8 | 9 | 23 | 6 | 3 | 4 | 1 | 54 |
(우리역사넷, 1)속현의 주현화에서 재인용)
경상도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23개의 속현이 주현화되어 지방관(감무)이 파견되었다. 인구가 적은 춘양은 제외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안동대도호부편에는 춘양(春陽)의 호수는 42호, 인구가 105명이라고 나와 있고, 주현인 봉화은 243가구 1160명으로 춘양의 10배 정도였고 속현인 내성의 호수는 83호, 인구가 3백 71명로 나온다 . 이는 조세를 걷기 위한 통계로 10세 이하 아동, 노비나 유랑민 등은 인구 통계에서 제외되었다. 춘양의 세수 가구는 실제는 더 많았을 것이다. 향리와 지방관이 결탁하여 조세를 착복한 사례가 속현일 경우에 주현보다 훨씬 많았다고 보는게 정설이라면 가구 수도 50%를 늘려 보면 60여호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조선시대 인구변동과 경제사>를 집필한 Tony Michell에 따르면 조선 시대의 실제인구수는 호구수에다 7.95를 곱하면 오차 10%내외에 근접한다고 한다. 계산하면 세종 때 춘양인구가 480명에 근접하는데, 임진란 직전까지 인구증가를 고려하면 7-800여명의 사람들이 지역에 거주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지만 조정에서 볼 때 주현으로 승격할 인구로는 부족했었을 것이다.
큰 변화의 단초 임진전쟁
1592년 임진전쟁 초기 봉화, 영주, 예안, 풍기에는 왜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군의 침입로가 부산-상주-충주에서 조령을 넘어 한양으로 입성하는 것이었기에 경상도 북부 지역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당시 춘양이나 소천의 주민들은 일본군의 침입에 대해 믿지도 않았고, 적개심도 별로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실록에는 <사족(士族)들은 험한 지역을 의지하여 병란을 피하고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에서는 (일본이 침입했다는 말을) 믿지도 않고 의도를 의심하여 모두 ‘만약 군사를 모으면 적을 불러들일 뿐이다.’고 생각하여 전혀 군사를 모으는 자가 없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실재로 조선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던 해안가 지역을 제외하곤 특별히 일본군의 침입과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족들은 일본을 성리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개한 종족으로 여기었기에 일군을 야만적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지만 사족의 세가 거의 없었던 춘양에선 반일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지도 않았다. 사족의 세가 큰 내성현에서 사족의 거병이 논의 되었다.
침입전쟁이 시작된 지 약 4개월이 지난 시점인 1592년 7월 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5만의 적이 평안도와 함경도를 유린한 뒤 이듬해 봄 3천의 병사를 데리고 남하해 강원도 삼척부를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경상도 북부를 공격하였다. 이 때 일본군장군은 기요마사 산하 제4군에 속했던 모리 요시나리였다.
당시 류종개는 부모 상을 당해 내성현인 상운 문촌에 왔다가 같은 내성에 사는 임흘, 김중청과 힘을 합해 600명의 의병을 모집, 무장시켰다. 동몽교관 용담 임공 묘지명(童蒙敎官龍潭任公墓誌銘)에는 <류종개 및 김중청, 윤흠신ㆍ흠도 형제와 함께 모의하여 처음 춘양에서 병사를 일으켜 여 수백여 명이 모였으니 이른바 내성병(奈城兵)이라 일컬었다> 柳宗介及金中淸,尹欽臣,欽道兄弟。協謀倡義。始自春陽起兵。召募得數百餘人。所謂奈城兵也。
*임흘은 1557년(명종 12)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582년(선조 15)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뜻을 버리고, 1587년 경상도 안동부 내성현 용담리로 이주하였다
이후 한달 동안 병사들을 훈련시키던 류종개는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를 거치며 울진에서 광비령을 넘어 춘양, 예안으로 진출을 시도한 일본군을 맞이하여 의병 약 500여 명으로 맛섰다. 7월 26일 화장산의 노루재와 살피재에 복병을 두어 일본군이 오는 걸 기다렸다가 선봉대를 기습해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29일 일본군 본대가 온다는 첩보를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조래(助羅)의 물가로 나아가 구원병을 기다렸으나 구원병은 오지 않고 오히려 조선인으로 변복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치열한 전투를 펼쳐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도 1천600여 명을 잃는 많은 손실을 입었고, 결국 왜군은 춘양 예안 안동을 점령하지 못하고 영양을 거쳐 울진항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임흘, 김중청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지금도 법전면 어지리에는 그때 왜적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목비골'이라는 지명이 있고 왜적의 목을 나무에 달았던 곳이라 하여 '달래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의병 참여자 개개인의 인명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춘양에서 의병 모집을 했으니 춘양 주민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500여명의 손실에다 일본군의 행로였이자 전투장소인 소천 쪽에서 농민들 또한 많은 피해를 입었음은 당연하다. 단 의병 지도부에 내성출신의 사족이 다수였던 관계로 내성병(奈城兵)이라 지칭했다.
춘양 도심엔 당시 류종개의 8촌 형인 류운룡이 노모와 가솔을 데리고 피란차 와있었는데, 일본군이 노루재를 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류씨 일가의 안위와도 연관이 있었을것이라 짐작된다.
류종개 부대의 소천 전투는 7월 말 3일간 일본군의 경상도 북부 지역 진입을 지연시킨 전투로서 종국에는 중과부적으로 비록 패배하였지만 안집사 김륵은 류종개의 지연전으로 확보한 시간을 이용하여 조선군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소천 전투와 이어지는 방어전의 성공으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침공이 좌절되면서 이 지역은 안정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동별읍향병과 같은 대규모 의병 부대를 조직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경상도 지역 조선의 반격의 주요 근거지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군과의 전투로 춘양과 소천의 상민은 500여명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의 상주로 인한 부역이나 지배 통치는 받지 않았고, 임란 후에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게 되었다. 이런 인식의 확산은 10승지로서 춘양을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속현의 정리작업에서도 계속 속현으로 남아 몸집을 불리는 춘양
춘양을 비롯한 속현은 자체적으로 행정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현을 맡아 다스리는 현사(縣司)를 비롯하여 토착향리 등이 있어 소속 주현 수령의 지휘를 받았다. 춘양은 현사를 호장이 겸임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안동부사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지만 호장과 안동부사나 부사 밑의 관리가 결탁하면 춘양주민의 수탈은 배가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하겠다. 또한 관노비(官奴婢)도 있었고, 향리에게 지급된 현리전(縣吏田), 현의 사무.경비를 위해 지급된 토지인 공수전(公須田)과 공관(公館) 그리고 향교(鄕校) 등을 보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태종실록,14년 7.4 1414년)
지역사족의 발달이 미미한 춘양현에선 주현화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향교를 개원하려는 열의도 미흡했으리라 짐작된다. 춘양지 저자 김진우는 숫제 고려 말에서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거주하는 사대부가 전혀 없었다(自麗末至本朝中葉 絶無士大夫居住者)고 개탄하기도 한다. 이렇게 지역사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중앙조정의 지원도 없이 춘양에는 절터에 향교를 건립하였고 향교의 전답을 소작하기위한 마을도 형성되어 300여년 전에 마을 이름을 향교동이라 불렀지만, 실상 향교는 개원하지 못하고 마을 이름으로만 남아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임내(속현,향.소.부곡)를 일체 혁파한다는 것이 조정회의에 사간원에서 건의하였고 그 시행방법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하자며 의정부에 내려 논의케 하였다. < 임내(任內)를 혁파한다는 법이 《육전(六典)》에도 기재되어 있는데, 가끔 주군(州郡)에서 그냥두고 혁파하지 않은 고을이 있어서 모든 부세(賦稅)의 염출(斂出)과 요역(徭役)을 일체 임내의 이속(吏屬)에게 맡기므로, 이속이 권리를 잡게 되어 자기 사정(私情)을 부려 백성들을 침노하기에만 힘써서 온갖 폐단을 만들어 백성이 원망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임내를 일체 혁파하고 직촌(直村)으로 만들어서 간사한 아전이 위세를 함부로 부리지 못하도록 하여 백성들을 편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세종실록, 25년 5.16)
조선왕조는 속현의 정리 작업을 ‘속현의 주현화’, ‘소속의 이동’, ‘병합’, ‘직촌’ 등의 형식으로 진행하였는데, 춘양은 혁파 대상인 속현이면서도 오히려 주위 속현을 병합하여 몸집을 키웠다. 소천현을 임내로 두었던 것이 그것이다. 조정의 방향과는 반대로 진행된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 사족의 입향지로 최우선 고려 대상인 춘양
속현 춘양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토호적 성격의 향리들 입장에선, 지방관의 파견에 의한 주현화나 혁파(직촌화)는 오히려 그들의 지위가 저하되고 권한이 축소된다고 판단한 반면, 일반 상민은 향리와 소속 주현의 이중착취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 속현의 주현화가 지역 상민의 처우개선이란 효과가 있지만, 지방관을 파견해 수령이 직접통치하게 되어 토착향리는 지방관의 보조적 지위로 격하된다. 고려조의 속현은 향리의 수장인 호장(戶長)이 지방관의 통치를 대신하고 있었고, 조선시대의 호장은 명칭 상으로는 향리 중의 우두머리였지만, 고려시대와는 달리 여러 향리 직임 중의 하나로 관아의 땔감을 공급하고 책임지는 정도의 지위로 낮아졌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인 춘양과 같은 속현(屬縣)에서는 향리가 모든 행정 공무를 집행하였기에 향리들은 주현으로의 승격에 소극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춘양은 이족의 지역통치가 용이한 곳이었다.
조정에서는 수령의 파견 계획이 있을법도 하지만, 조세수입도 미미한 춘양 지역에, 인력도 부족한 조선왕조는 끝내 주현으로 승격시키지 않고 속현으로의 차별을 일상화하게 되었다. 속현으로 수령이 없는 가운데 지역의 통치권은 17세기 전반까지 토착향리 가문에 있었다.
고려 때부터 지역 명문사족으로 행세하던 봉화금씨는 조선초부터 봉화현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였고 이들의 위세는 봉화현에서 가장 위세가 있었다. 이퇴계는 장남의 혼사로 사돈이 될 금씨댁에 갔다가 금씨 문중 사람들에게 혹독한 냉대를 당할 정도로 당시 금씨는 봉화 일대에서 행세하는 토박이 양반 가문이었다. 이들 봉화금씨 중 일부가 춘양으로 살러 들어왔지만 그 세력은 극히 미미하였다.
다음으로는 봉화와 내성에 있던 안동권씨와 거촌의 광산 김씨,그리고 우계이씨 정도가 임진란 전에 일부 입향하였지만 힘도 약하고 겨우 자리잡고 사는 수준이었다. 여전히 지역통치는 이족들의 행정적 힘이 훨씬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초에 쓰여진 춘양지 저자 김진우는 <고려 말에서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거주하는 사대부가 전혀 없어 황무지가 되고 말았는데, 문헌으로 증명할 길이 없으니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라며 춘양에는 사족이 임진왜란 전에는 전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임진란과 병자호란 이후 춘양지역에 사족들이 대거 입향한다. 이웃 봉화와 내성에서 특히 많이 입향하고, 안동부나 영남 북부지역 여러 현에서도 대거 춘양으로 들어온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한양이나 근기지역에서도 많이 입향하게 된다.
왜 17세기에 춘양이 사족들의 입향 최우선 지역으로 되었을까?
임진란과 호란 이후 춘양을 입향지로 선택한 사족들에게는 세거해 살면서 사족으로서의 권위 유지를 할 수 있는 조건을 제일 조건으로 보지 않았을까 보여진다. 따라서 춘양에 입향하려는 사족 입장에서 보면 춘양에 대한 세거와 품위유지 조건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 속현이었던 춘양은 지방수령의 통제와 간섭이 없었기에 수령권과 대립할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서인이나 이후의 노론의 관료독점이 이루어진 현실에선 수령권과의 대립이 없다는 것은 사족들 입장에선 중요하다.
둘째로 위에서 보았듯이 춘양은 임진란 이전에는 세거 사족이 봉화현에 비해 세력이 극히 미약했다. 봉화금씨나 안동권씨등이 봉화나 내성에서 다덕재를 넘어와 터를 잡고 있었지만 지역을 통치할만한 세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들은 사당이나 서원도 세우지 못했고, 향교나 향약이나 양안을 운영할만한 결집력도 없었다. 입향 사족들이 볼 때 토착 사족들의 수나 결집력 정도를 감안하면 크게 반목하지 않고 연착륙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세째로 이족들의 통치권도 내성현과 비교하면 많이 약했으리라 짐작된다. 같은 속현인 내성현의 경우엔 대단한 권위와 힘을 지닌 권벌 가문도 향리들 영역인 내성현 경내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당시로선 경내를 벗어나 달실에 자리잡게 된다. 의성김씨도 역시 경내를 벗어난 해저리에 자리를 잡는다. 광산김씨를 비롯한 제법 세력이 있는 사족들도 거의 경내를 벗어난다 . 내성현의 이족들은 현 경내에 거주하면서 관의 업무를 보기 때문에 대체로 경내는 이족들의 집단적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임진란 전 춘양 경내는 안동권씨, 봉화금씨, 광산김씨 등 일부 사족들도 이족들과 별다른 마찰없이 세거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춘양에선 이족들의 집단적.행정적 위세도 상대적으로 약하고 사족들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임란과 경신. 을병 대기근으로 춘양의 농민들이 대거 탈농하여 묵은 땅이 많았는데, 또한 십승지로 알려질 정도로 외부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다. 타지역에서 입향하려는 사족들 입장에서 보면 안전한 지역의 땅을 헐값에 구입할 수가 있다는 매력적인 조건이 갖춰진 곳이 춘양이었다.
한마디로 당시의 춘양현은 사족들이 입향하여 자리잡고 지역의 통치세력으로 부상하기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지방관의 간섭이나 힘이 미치지도 못하는 속현인데다가 토박이 사족의 세력도 약하고, 향리들의 발호도 상대적으로 적은 춘양, 땅값도 헐하고 여기에다 십승지 중 하나로 알려질 정도로 난을 피해 살기가 적합한 지역이었기에 입향지로선 최고의 조건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1, 통치력, 吏族에서 지역 사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사족들의 대거 입향이 이루어진다.
남양홍씨, 진성이씨, 진주강씨, 안동권씨, 전주이씨, 이외에도 봉화나 내성에서 이주해온 사족들도 많다.(춘양지 참고할 것) 춘양에 입향한 사족들은 입향 당시에는 봉화나 내성 쪽으로 내려온 사족에 비해 경제력이나 세력이 약했다.
내성에 일찍 입향한 권벌 가문은 노비가 300여명이 넘었고 토지도 2312두락 약 70ha인 반면(권벌 사후에 작성된 和會文記의 분재기 내용 중), 춘양 법전에서 가장 번성한 가문이 된 강씨 가문은 입향할 때 때 20여명의 노비에 묵은 땅 일부만 사들여서 세거하는 등 비교가 되질 않는다. 춘양 녹동에 입향한 이동표 가문은 더욱 경제력이 약했다. 입향한지 얼마 안되어 이동표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사돈인 달실의 권두인의 지원에 힘입어 겨우 장례를 마칠 정도였다.
사화를 피해, 전쟁을 피해, 또 서인들의 집권과 노론의 소수 가문에 의한 정치 독점으로 인해 정권 참여에 배제된 많은 사림 출신 유학자들은 삶의 근거지를 찾아 춘양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동족이나 동학의 인연을 찾아 지방으로 낙향하는데, 춘양은 십승지의 하나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특히나 노론성향의 지방관의 간섭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겐 큰 매력으로 보였다. 17세기 중후반 이후 속속 입향하여 세거지를 확보하고, 지역 내 토착 가문이나 새로 입향한 가문들과 혼반관계를 맺으며 서원을 세워나가기도 했다.
춘양의 도연 서원은 이런 정치적 관계의 산물이다. 지역에 입향한 사족들은 연합하여 춘양에 서원 건립을 추진한다. 김성일이나 류성룡이 아니라 남인이면서 소론에게도 큰 거부감이 없는 한강 정구를 제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그들은 춘양경내의 토착 사족들과 마찰을 하지 않으면서 경내에 입주하기도 했고, 더 이후에 입향한 사족들은 경내를 벗어난 지역에 동성 반촌을 세울만한 토지를 구입하거나 개척하면서 논농사 중심으로 경제적 기반을 잡아나갔다. 아직 상업이나 수공업이 활발하지 못한 춘양에선 모내기 논농사가 가장 큰 수입이었고, 사족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입향한지 한 세대 정도에 이들은 춘양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반면 지방관의 엄호를 받지 못하는 이족들은 힘이 약화되면서 지역사족의 지배체제가 전일적으로 이루어진 지역이 된다. 이는 주위의 봉화현이나 내성현과도 구별되는 특징이다. 봉화현은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이고, 내성현은 속현이지만 이족들의 힘이 강한 지역이었다. 내성현의 경우 사족들은 현의 경내는 향리가문이 틀어쥐고 있어서 경내에는 입향하기가 어려워서 경내를 벗어난 장소로 입향 또는 집성촌을 형성하게 된다. 반면 춘양은 경내는 물론 그 외 지역까지 사족 집성촌을 형성할만한 곳이면 거의 사족들이 할거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춘양은 토지가 황폐화 되자 축적된 식량이 없는 농민들은 농토에서 떠나서 유랑걸식을 하거나 산속으로 들어가 산민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전국적으로 볼 때 170만결에 해당하던 토지가 임진왜란 후에는 54만결로 축소되었는데, 지역 농민들의 농사짓는 땅도 70%는 줄어들고 묵은 토지는 황폐화되었을 것이다. 농민들의 이탈을 막으려고 조정은 호패법을 시행했지만 지방관이 없는 춘양에선 거의 실효를 거둘 수가 없었다. 더욱이 전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 죽거나 돌아오지 못하자 춘양은 토지는 있지만 농사를 짓지 않는 농지가 많아졌다.
이러한 시기에 타 지역 사족들은 가솔을 끌고 논농사 짓기 편한 곳부터 터를 잡고 세거한다. 한 두 세대가 지난 시기 즉 17세기 중 후반에 오면 지역의 유력한 사족으로 자리 잡고 지역 통치권을 장악했다고 보여진다. 입향사족들은 다른 사족들과의 혼반관계, 집성반촌 형성, 서당 및 서원 건립, 양안작성 및 향약 실시 등을 통해 사족들 간의 결속을 기하고 이족들을 확실하게 통제해갔던 것이다. 오랜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한 사족 중에는 그 체모를 유지할 수 없으리만큼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잔반들도 생겨났지만, 집성반촌에 거주하며 양안에 이름을 올리고 서원에 출입함으로써 사족으로써 최소한의 체통을 지키기는 것도 힘을 행사하는데 한몫 했으리라 여겨진다.
임진란 이전에 거의 존재하지 않던 사족들이 50-60년이 지난 17세기 중반이면 지역의 통치권을 확보하였으며 토착향리들은 그야말로 실무담당 이상의 힘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 속현이면서 이웃 소천현을 병합하다.
양란 이후 춘양에 대거 사족이 입향하고 세거하며 통치권을 확보한 사족들은 점차 이웃한 안동부의 속현이었던 소천도 통치영역으로 확대했다. 속현인 소천도 자체행정기구와 토착향리가 있었지만, 결정적 차이는 지역사족의 결집과 힘의 차이였다. 춘양은 지역 여론과 토착향리를 좌우할만큼 사족의 힘이 생겼지만, 소천현은 사족들의 입향도 적었고 결집력도 춘양에 비해 약세였다. 소천은 춘양보다 더 험지이고 개척 가능한 논밭도 적었기에 사족들의 입향이 적었고, 점점 사족들의 힘의 관계에서 춘양에 밀리면서, 결국 춘양에 병합되기에 이른다.
한편 같은 속현이었던 내성은 속현이면서도 결코 주현인 봉화에 밀리지 않고 계속 속현으로 존재했다. 내성은 사족들의 수나 결집력 측면에서 볼 때 봉화현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안동권씨와 의성김씨, 광산김씨 등 내성 거대사족들은 수령을 비롯한 지방관이나 관료들의 간섭을 아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성에 세거한 사족들의 입향동기와 직접 관련이 있다. 또한 내성현의 행정관리들인 토착향리들은 주현으로의 승격도, 속현 혁파나 병합에 대한 것도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에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내성의 사족과 이족은 서로 갈등하는 가운데도 속현을 파하고 주현에 병합하거나 없애는 것에 반대하고 속현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대한 이해관계는 일치하였다.
17세기 중반이후 춘양현의 사족들은 서원도 만들고 집성반촌도 많아지고 동약이나 양안도 이루어져 사족들의 세력이 지역의 통치권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사족들의 힘으로 볼 땐 주현으로의 승격을 추진할 법도 하지만, 이 시기 서인(노론)의 권력 독점화 현상이 길어지고 따라서 서인출신 지방관의 파견이 지역사족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지역 사족들은 주현으로의 승격이 아니라 이웃 속현인 소천을 병합하는것에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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