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어른이 그립지 않겠는가
박윤호
지난 일에 매몰되면 새로움이라 할 수 없다
신한국운동의 신(新)은 설 입(立)자 밑에 나무목(木), 그 옆에 도끼 근(斤)의 합성어로 살아있는 나무에 도끼질 한다는 뜻이다. 둥지나 가지는 도끼에 잘릴지라도 그루터기는 남아 거기서 새움이 돋기까지 온갖 고통을 인내하며 새싹으로 돋아나는 아픔과 질고의 시간이 있듯 우리도 집착한 습관에서 새 품격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려면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몸에 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렵더라도 세상은 변하고 달라졌다. 지난날이나 과거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새로움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요즘 늙은이들은 근현대사를 살아온 세대들이다. 직간접적으로 지난 시대를 체험하고 경험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역사관도 몸에 익혔고 옳고 그름도 분별할 줄도 안다.
그래서 ‘어쩌다 어른’이 아니라 ‘어른다운 품격’으로 승화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은 매너와 품격으로 검증되기 때문에 대접받을 수 있는 위치가 되려면 매너부터 먼저 갖추어야 한다. 품격 없인 약속된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명품은 장인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품격 또한 인간이 디자인한 최고의 고귀한 모습으로 가꾸고 다듬어져야 한다. 세상은 예의를 지키고 격식을 차리는 일이, 능력이나 실력 못지않게 중요성을 갖게 때문이다. 국가 간에도 그렇지만 개인의 일상도 마찬가지이다.
교양도 배워야 품격 있는 행동이 나온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정한 법이나 약속을 지키는 행위를 할 줄 알고 지켜야 한다. 그럼에도 위반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음주운행도 그렇고 신호등 지키기도 그렇다. 아예 깜박이도 켜지 않고 멋대로 휘젓고 차를 모는 일도 그렇다. 유행처럼 번져 주변을 챙기기도 힘 드는 세상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홀로서기다. 교양도 배우지 않으면 품격 있는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매너가 중요하지만 대수롭게 여긴다. 지킬 도리마저 우습게 안다. 공부도 중요하고 자유분방한 개성도 중요하다. 끼를 키우는 정신도 좋지만 최소한 됨됨이에 필요한 기본 태도는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가끔 환승역에서 통행인들이 다니는 꼴들을 보면 미친 듯이 뛰고 설친다. 늙은이조차 가방을 메고 끌차를 끌고도 허둥거리는 모습은 어른답지 않다. 만원이라는 신호가 떠도, 밀고 닥친다. 늦게 탄, 자기는 잊고 먼저 탄 사람들이 내려 주기를 바라는 이들을 보면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는 짓들을 행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배려도 없고 너그러움도 없다. 뭣들이 그렇게 바쁜지, 바쁘면 좀 일찍 나서든지. 지옥행 열차라도 먼저 타야 직성들이 풀리는 모양이다. 인간의 본성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잠들고 싶다. 한 순간만 늦추어도 여유롭고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일상이 바쁜 이들을 보면 어느 여행 작가가 쓴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라는 이야기 한 꼭지를 전해주고 싶다. 오체투지로 라싸까지 1년을 길에 나선 승려의 모습이나 몽고 초원의 길에서 낙타를 따라 나선 유목민의 걸음을 걸어보라고….
내게도 문제는 있다
늙은이에게도 문제는 있다. 가진 자는 가졌다는 유세로, 없는 자는 없다는 구실로, 무식한 자들은 무지한 고집으로 버티고 살지만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연륜에 걸맞은 모습이나 진정성도 부족하다. 늙어도 잔머리 하나는 잘 굴리고, 잔재주 부리고 약빠르다는 소리를 듣고도 무관심하다. 흡사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듣고, 제 자랑만 늘어놓는 풍조도 고쳐야 한다.
지하철에는 ‘노인석’이 없다. ‘노약자석’이다. ‘노인’과 ‘약자’들을 위한 자리다. 늙은이의 전용물은 더더욱 아니다. 젊은이도 사정이 생기면 앉을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나이를 빌미로 추태나 속태는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어둔한 몸짓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처음부터 질서조차 무시하거나 외면하면서 대접만 받겠다는 생각은 늙은이로서 자질부족이요 품위 손상이다.
연금을 받으면서도 무료급식소나 복지관 식당을 기웃거리는 것도 그렇고, 전철을 타고는 자리가 없다는 핑계로 젊은이들이 앉은 자리로 다가가서 넌지시 자리를 강요하는 행위도 볼썽사납다. 뿐만 아니다 물을 마실 때마다 새 종이컵을 빼 쓰는 것도 삼갈 일이다. 아무리 공짜라도 말이다. 제 것처럼 아껴야 한다. 젊은 것들의 버릇장머리를 탓하기 전에 어른답게 처신을 바로 해야 마땅하다.
출마를 앞둔 후보자들의 홍보지도 그렇다 국회의원만 되면 온 나라를 제 수중에 두듯 해결하겠다고 장담이다. 그게 가당키나 하나.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도 없지만 이런 사람이 왜 이제 출마하는지, 이런 후보를 유권자들은 왜 낙방시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흡사 이솝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늑대가 왔다’는 목동의 거짓 외침은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이다. 쓰레기 하나라도 조심하고 재활용품의 분리수거랑 음식물의 잔반 처리도 두 손 대지 않도록 우리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질서를 지키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나 가난을 숙명처럼 달고 살았기 때문인지 도처에 이런 병폐들이 늘여 있다. 공짜라면 떼거리로 찾는 늙은이라 하더라도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다는 생각이다.
복지란 이름으로 거지근성을 키우는 일은 근절되어야 마땅하다. 그렇게 살면 무슨 낙이 있고 무슨 보람이 있을까. 복지국가로 자처하던 그리스나 베네수엘라를 보라. 지금 거지나 다름없다. 국유재산을 팔고도 못살겠다는데도 강 건너 불구경처럼 볼 것이 아니라 내 발등의 떨어진 불덩이로 고민해야 한다,
입만 열면 무상복지요 공짜 타령이다. 돈의 출처는 모르쇠다. 무지한 자들은 모여서 하는 말이 키운 열 자식보다 한 번도 거르지도 않고 용돈 챙겨 준다고 웃음판이 벌어졌다. 거지 근성으로 신명이 났다.
망해도 좋고 공산주의도 좋다는 인간들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줄로 착각하지만 세상이 바뀌면 싹쓸이 대상, 1순위이란 것을 알고나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깨 볶듯 까불대는 짓들이 참으로 가관이다.
중요한 건 내 삶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이다. 지하철 역 근처, 엘리베이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탈 사람이 저 만치에서 뛰어와도 닫힘 버튼을 잽싸게 누른다. 나이 들수록 더 바쁘지만 말이다. 그래도 간혹 기다려 주는 이도 만나지만 제 혼자만 타고가면 뭐그리 대단하고 위대한지, 이게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이요 생태이다 그렇게들 살아서는 안 된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스로 닫힐 때까지 기다리면 좋으련만…. 아예 ‘닫힘’ 버튼을 없앴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길을 걸을 때도 골목길에서나 시장판에서도 우측통행이란 표지도 붙이고 바닥에 글씨까지 써 놓았지만 모두들 외면한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앞에 사람이 오거나 말거나 멍텅구리 휴대폰에 코 박고 사는 인간들이 흔해 빠진 요즘이다. 통행인이 많던 적던 누가 보거나 말거나 우측통행은 몸에 배여 있어야 한다. 성질 못된 인간들처럼 살 일이 아니다. 보도매체들도 거든다. 광고비 수입에만 눈이 팔려 저급한 문화를 양산해도 자제하는 기관보다 부추기는 기관들이 더 많아 보인다. 시청에 넋 놓고 목매는 어리바리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명심해야 할 일은 아무리 외국어가 능숙해도 됨됨이가 곧지 못하면 받아줄 상대가 없는 것이 세상이다.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하는 자들과는 같이 지내기를 싫은 게 인간의 본성임을 명심해야 한다.
거만한 품새는 금세 풍긴다
졸부나 졸모들의 행동거지만 보아면 금방 알게 된다. 타인을 무시하는 거만한 품새가 풍겨 나오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쉽게 유행을 따르겠지만 됨됨이를 보면 드러나게 마련이다. 제 새끼들은 보육기관에 새벽같이 맡기고 반려란 거창한 이름으로 동물들을 끼고 유유자적하는 것은 제 자유겠지만 동물보다 못한 처지 놓인 우리 아이들만 불쌍하다. 유태인의 ‘탈무드 황금률 방법’을 한번쯤 보았으면 한다, 별은 밤에만 빛난다는 사실 말이다
오랜만에 듣고 본 훈훈한 이야기는 인천 산곡동에 산다는 한 노인이 동사무소를 찾아 와 무상쓰레기봉투를 받으러 오면서 요즘 생계비도 받고 김치도 반찬도 쌀도 받아 너무너무 고맙다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주고 싶어 하고는 검정비닐봉지 하나를 두고 갔다. 나중에서야 담당자가 열어보니 5만 원 권 100장이 들어 있었다. 담당자는 의아해 노인에게 연유를 묻자 “그 돈은 이미 기부했으니 동사무소에서 알아서 하고, 나한테는 이유도 묻지 말고 신분이 알려지는 것도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노인은 동사무소에서 관리하는 생활보호대상자였다. 없는 사람의 실행이라 직원들은 놀랐고 의아했다. 쉽지 않은 일을 행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순수한 양심의 발로(發露)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도움을 받지 않아도 그 돈을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도와주라는 뜻일 게다. 참으로 어르신답다는 생각이 종일 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요즘 정권의 선심 행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아온 나로서는 그 노인의 선행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소득만 높다고 성숙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마당도 쓸고 주변도 닦았다. 어른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줄도 알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았다. 그래서 ‘우리’라는 문화도 있었고 예의염치도 보며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에게 이익 되면 호들갑을 떨고, 이익이 없으면 주먹 쥐는 세상으로 변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더 성숙되어야 하고 어떻게 성장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소득만 높다고 저절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만 추구하면서도 소중한 인간의 품격은 잃어버려서는 결코 일류가 될 수가 없고 대접또한 받을 수 없다.
강의를 듣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빈자리는 없었다. 서서, 읽던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누가 팔을 톡톡 치며 앉으라고 한다. 사양했지만 “그래도 책 읽는 사람이 앉아야지요.”한다. 책을 본다는 이유 하나로 자리를 양보해 주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희끗희끗한 머리로 보아 칠십은 넘은 것 같다, 그런 어른이 그립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도 분명히 그런 어른이 계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