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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초보첼로 원문보기 글쓴이: rubato
Zoltan Kodaly :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주 Op.7 (첼로 Schiefen)
코다이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주 Op.7
Zoltan Kodaly, 1882~1967, 헝가리
1. Allegro-serioso ma non troppo - 2.3 전악장
Guido Schiefen, cello - Axel Strauß, violin
2. Adagio - 3. Maestoso 졸탄 코다이 (Zoltan Kodaly, 1882~1967)
Zoltán Kodály (1882 케츠케메트-1967 부다페스트) 헝가리의 작곡가. 집시음악의 영향을 받은, 실내악을 즐겨 연주하는 음악가정(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올린 주자, 어머니는 피아노 주자)에서 태어난 그는 갈란타와 나지손바트(현 슬로바키아의 토르나바)에서 중등교육을 마쳤다. 나지손바트에서는 대성당의 합창대에 가입했고 음악도서관에 빈번히 드나들었다. 첼로를 독습했고 부다페스트에서 문학 연구를 계속했다. 또 프란츠 리스트 음악아카데미의 쾨슬러 야노스(Koessler János)의 클래스(작곡)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벨라 바르톡과 알게 되었다. 바르톡은 1945년 죽을 때까지 코다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1905년에 교수자격을 취득한 그는 민요의 스토로프구조에 관한 박사논문을 위하여 헝가리 각지를 취재하기도 했다. 1906년에 문학박사가 된 코다이는 파리에 가서 파리 음악원의 Ch. M. 비도르의 강의를 청강하여 드뷔시의 음악을 알게 된다. 1907년 피아노를 위한 클로드 드뷔시의 모티브에 대한 명상곡(Méditation sur un motif de Claude Debussy)을 작곡하게 되며, 같은 해 프란츠 리스트 음악아카데미의 음악이론 교수가 되어 1940년까지 그 지위에 머물렀고 또한 1908년 이후에는 작곡과 클래스도 담당했다. 1906년 이후 그는 바르톡과 산도르 엠마 Sándor Emma와 함께 헝가리 농민음악을 수집하고 악보로 남기기 위한 체계적 연구를 실현하는데, 1910년 8월 3일에는 산도르 엠마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이후 반세기동안 그의 반려자이자 협력자가 되었다. 코다이는 작곡가인 동시에 교육자, 민요연구가, 음악학자, 저널리스트로서 활약하였고 근대 헝가리 음악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1921년 빈의 유니버셜 출판사가 코다이 작품의 독점출판권을 사들였고, 1925년에는 그의 아동합창을 위한 작품의 연주회가 열려서 성악대위법의 거장으로서의 명성은 확고부동해졌다.헝가리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완고한 인물이자 아주 어릴 때부터 합창과 친숙해지도록 하는 음악교육법을 만든 사람이었던, 그리고 사는 동안 존경받는 역사의 한 사람이었던 코다이는 호르티백작이 이끄는 반혁명세력으로부터도, 또 제2차대전중에는 나치스 당국으로부터도 주목받는 존재였다. 코슈트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세계 주요 대학들의 통신회원, 국제 민족음악학회의 회장 등을 지낸 코다이는 반세기 이상 동안 조국의 문화적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다. 서유럽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작품은 대략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바흐에서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를 거쳐서 드뷔시에 이르는 전통을 총괄하는 고전적 형식의 작품들의 재통합이며, 다른 하나는 우선 교육적으로 필요하다고 기록했던 약 1500곡의 합창곡들이다. 그리고 후자에는 팔레스트리나 예술이 헝가리 민요의 선율적, 리듬적 요소들이 접촉하여 소생했다는 시각도 있다.
코다이의 창작활동은 우선 실내악을 대상으로 했는데, 작품으로는 두 곡의 현악4중주곡 (1908~09, 1916~18),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주곡(1914), 두 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비올라를 위한 세레나데(1918~20), 그리고 특히 첼로를 위한 2곡의 멋진 소나타하나는 피아노반주가 있었고(1909~10), 다른 하나는 첼로 독주를 위한 것이었다(1915)가 있다. 이 마지막으로 든 무반주 첼로소나타는 하프, 치타르, 그리고 집시 오케스트라로도 연주되며 어떤 경우에도 바흐의 전통을 계승하는 웅대한 서정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발트바우어케르펠리(Waldbauer Kerpely) 현악4중주단의 멤버에 의해 코다이의 작품은 잘츠부르크, 빈,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연주되었고 그로 인해 코다이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3년에는 헝가리의 시편(Psalmus hungaricus)이 초연되었고 코다이는 헝가리의 청중들에 의해서 민족적 영웅의 전통을 노래하는 음악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같은 계열의 작품으로는 부다의 터키의 지배에서 해방된 250주년 기념제에서 초연한 부다바르 테 데움(Budavári Te Deum, 1936),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 1944), 제네바 시편 제114편 (Geneva Psalm n 114, 1952)이 있다. 코다이의 교향작품은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여름날의 저녁 (Nyári este, 1906)은 1929년부터 1930년에 걸쳐서 개작되었으며, 마로스제크 무곡(Marosszéki táncok, 1930)은 본래는 피아노를 위해서 작곡된 것으로 건반음악의 절정을 이룬다. 1927년에는 두 곡의 빛나는 작품이 태어나는데 하리 야노슈(Háry János)에서 발췌한 관현악곡과 극장서곡(Szinházi nyitány)이 바로 그것이다. 1933년 부다페스트에서 초연한 갈란타 무곡(Galántai táncok)을 세상에 널리 소개한 것도 토스카니니였다. 1939년에는 빌헬름 멘겔베르크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관현악단에 헌정되었던 헝가리 민요의 선율에 의한 변주곡(공작새는 날았다: Felszállott a páva, variáciok egy magyar népdalra)을 초연했고, 프레데릭 스톡(Frederick Stock)은 시카고에서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을 초연(1941)했다. 마지막으로 F. 프리차이는 1961년 루체른 음악제에서 토스카니니의 기념식에 헌정된 교향곡 C장조의 초연을 지휘했다. 얼핏 보면 보수적으로 보이는 코다이의 관현악 양식은 헝가리의 리듬, 자연선율에 기초한 화성, 고전적 구성, 그리고 인상파의 수법 등 많은 요소의 통일 위에 이룩되어 있다. 그의 음악은 독일 낭만주의와는 얼핏 보면 대조적인 야나첵의 악상처럼 종종 쾌활하고 건강한 활력이 넘치고 있는데, 그는 다만 어두운 기질이나 자기 표출의 의지가 아닌 그 작곡기법만을 배웠을 뿐이다. 코다이의 방대한 합창작품을 망라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5개의 탄툼 에르고 (5 Tantum ergo, 1928), 10곡의 가곡(1929, 가사 렌젤 라슬로(Lengyel László)와 푼큐슈돌로 (Pünküsdölö), 아동합창곡의 성전이 된 헝가리의 비치니아(Bicinia hungarica)의 네 개의 노트(1937~42), 무반주 혼성합창을 위한 웅대한 조곡 마트라의 풍경(Mátrai Képek, 1931), 카라드의 노래 (Karádi nóták,) 휴식을 취하는 공작새, 츠리니의 부름(Zrinyi szózata) 등의 작품이 있으며, 이상은 극히 변화가 많은 코다이의 합창작품의 일단을 보여주는 예인데 샹송, 발라드, 콩트, 민요의 선율을 사용한 마자르(헝가리)적 악센트를 가진 농민생활의 정경, 성서적 또는 영웅적 주제를 그리고 있다. 코다이의 극작품, 특히 하리 야노슈(1925~26)와 실을 잣는 밤(Székely fonó, 1924, 트란실바니아의 실잣는 여인;개정 1932, 1948)은 그가 즐겨하는 서정시적, 권선징악적, 그리고 극적 생명력을 보여준다. 오늘날 코다이가 남긴 문화유산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바흐와 팔레스트리나의 전통, 그리고 민요 선율의 자연스러운 노래의 종합에 의해서 이 작곡가가 예술음악에 대한 기여를 미래의 세대가 완전히 인식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음악교육에 코다이 방식이 스며드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코다이는 20세기 합창음악의 창시자로서 이름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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