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계도반, 광덕 사형님
如玄正見|부산 금정산 정수암 주지
1.
1959년 가을, 내 나이 스물네 살 때였다. 나는 군에서 제대하는 길로 바로 부산 범어사로 출가했다.
나는 일찍이 고향 제주도 애월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며 서당에도 다녔고 선도(仙道) 수련도 해 보았지만 영 마음이 차지 않아서 마침내 불도에 몸을 담기로 결심하고 입대했던 것이다.
나는 군에서 제대할 무렵,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산으로 들어가야 하겠다고 출가의 결심을 했다. 결심을 하고 보니 막상 어느 절로 가야 알지가 막막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제대 군인의 몸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내 인생의 시작이 될 절집 찾는 일을 시작했다. 우선 나의 근무 부대가 있었던 강원도에서부터 남쪽으로 내려가며 절마다 들러 보고 마음에 드는 절에서 머리를 깎으려고 나름대로 옹골찬 계획을 세웠다.
그 처음 행선지로 오대산 월정사 산내 암자인 중대에 갔는데, 그때 마침 거기 잠시 머물고 있던 선객 응담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출가에 대한 결심을 그 스님께 말씀 드렸다. 내 이야기를 응담스님께서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시종 들으시고는, 한마디로 갈 곳을 짚어 주었다.
부산 범어사로 내려가라고 했다. 그때 응담스님의 말씀이 “청년이 미리 범어사에 가 있으면 나도 이번 결제(1959년 가을 동안거)는 범어사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곧 내려가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의 원래 계획은 강원도에서 아랫녘으로 내려가면서 차례차례 여러 절을 둘러본 뒤, 내 마음에 쏙 드는 산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처음 오대산 월정사 중대를 찾자마자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때 응담스님이 어찌나 소신있게 요지부동으로 내가 살 곳을 이야기해 주시는지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2.
나는 그 길로 범어사에 행자로 들어가서 처음에는 입장객에게 표를 파는 매표 일도 했고, 금정산에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막는 산감소임도 했고, 범어사 후원에서 공양주.갱두.채공까지 두루두루 하심공부를 거쳤다. 절집 풍속을 몸으로 익히고 배운 뒤 그 다음해 3월 보살계 때(음 3월 14일 저녁) 보제루에서 열대여섯 명의 행자들과 함께 사미계를 받았다.
그 당시 범어사 주지는 지효 사형님이 하고 있었고, 광덕 사형님은 아직 고 처사로 있을 때였지만 은사스님의 안팎 심부름으로 바깥 출입이 잦았다. 그런 광덕 사형님을 처음 대한 나의 느낌은 그 모습과 위의가 어찌나 청초하고 훤출 했던지 당대의 이름난 고승 같았다. 비록 신분은 처사였지만 삭발염의하고 대중과 함께 생활했으니 처사라는 호칭만 부르지 않았다면 고승대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처사라고 불러서 매우 의아한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한동안 시간이 지나서야 그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실 우리 같이 평범한 행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계를 받고 싶어서 입산하자마자 오직 수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데 그 당시 광덕 사형님은 무려 10년이나 처사(행자)로 생활했던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근기로구나 하는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자꾸만 반복해서 생각해 보고 사형님의 얼굴을 몇 번 이나 다시 쳐다보았다. 아무튼 나는 그러한 사형님과 함께 계를 받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몰랐지만 뜻밖에도 수계 도반이라는 귀한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범어사의 삼월 보살계 산림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또 범어사만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래서 으레 행자들은 삼월 보살계 때 사미계를 받아 출가의 길로 들어서곤 했는데, 역시 나도 삼월 보살계 산림 회향 하루 전날인 1960년 3월 열나흘(음) 저녁에 계를 받았던 것이다. 그날 저녁 은사스님(동산대종사)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계를 설하여 마치시고는 청풍당에서 들어가시면서 후원을 향해 알지 못할 누군가에게 큰소리로 “여기 계 받을 사람이 있는데 왜 나오지 않느냐?” 하고 꾸지람을 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고 처사를 향한 일갈이었다.
그제서야 은사스님께 효심 깊기로 이름난 고 처사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드디어 그 다음날(음 3월 15일) 새벽예불이 끝나고 대웅전에서 광덕 사형님과 정업스님 둘이서 은사스님께 계를 받게 되었다.
3.
수계 후 나는 바로 도감 소임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판승(帶妻)들이 물리력을 동원하여 범어사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한 떼로 들이닥쳤다. 사판승들은 사전 모의를 하여 범어사 탈환 작전계획을 세우고 그날 감행했던 것이다. 사판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던 우리 범어사 대중들은 광덕 사형님을 사태수습 책임자로 정하고 모든 권한을 맡겼다.
사형님은 모든 대중들에게 우왕좌왕 하지말고 수행자답게 장삼과 오조가사를 수하고 여법하게 평소의 일과를 지키도록 했다. 우리는 사형님의 요청에 따라 사내의 모든 대중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사 장삼을 수하고 평소처럼 아침공양을 하고 대중 청소도 했다. 범어사 대중 누구 하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나 싸워야 한다는 흥분 없이 차분하게 자기 자리를 지켰고 또 일과를 지켰다. 다만 달라진 것은 일상복이 아닌 수행자로서 더욱 여법하게 가사 장삼을 차려 입은 법복 차림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한 무리의 사판승들이 제각기 손에 무엇을 하나씩 들고 기세등등하게 올라왔다. 그렇지만 그들은 범어사 대중들의 모습을 대하는 순간 그만 맥이 풀리고 어이가 없게 되고 말았다. 범어사 대중도 맞받아서 인상을 쓰거나 고함을 지르고 팔을 걷어붙여야 일이 되는 것인데, 그런 기미가 전혀 없으니 오히려 머쓱하기만 했던 것이다.
광덕 사형님은 사전에 대중의 처신방식을 확인하고 난 뒤 사판승들이 몰려오자 그들의 대표자를 보제루로 안내하여 다담상을 차려 정성껏 대접하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얘기만 했다고 한다. 서로 이해가 상충할 수 있는 사안은 아예 꺼내지도 않고 대의 명분만 거론하고 담론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 자리에서는 어느 누구도 인상 쓰거나 부딪칠 일이 없었다고 했다. 보제루에 대표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장시간 담론을 하니 밖에 있던 소위 행동대원들도 시간이 갈수록 경계심도 풀어지고 적개심도 사라져 범어사 대중들과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서 농담도 하고 평화롭게 이야기를 주고받기까지 했다.
안팎으로 서로에게 평안한 기운을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아무런 불상사 없이 일은 종결되었다. 자칫 충돌하여 큰 사건이 될 뻔했던 일이었는데도 광덕 사형님의 지혜로운 판단과 수행자다운 현명한 대응방식을 통해 사태는 가라앉았고 그들은 무사히 내려갔다.
4.
또 1963년 여름에는 한국대학생불교 연합회 수련대회를 범어사에서 개최하여 전국에서 모인 젊은 학생들이 보제로가 비좁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아마 내가 잘 모르긴 해도 그것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시발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일 역시 광덕 사형님이 아니었으면 그 당시 범어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1965년에는 은사스님이 열반에 드셨는데, 그때 전국각지에서 사부대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영결식과 다비식을 엄숙하게 봉행했다. 그 모든 과정을 필름에 녹화하였다가 어느 날 저녁 보제루 앞마당에서 방영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영사기로 필름을 찍으면 화면만 찍히고 소리는 녹음이 되지 않은 무성 테이프이기에 따로 변사가 필요했다. 보제루 앞에서 방영했던 은사스님 영결식 장면의 변사는 사형님이 맡았다.
흐르는 물처럼 도도한 해설, 적절한 즉석 느낌과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효심의 열변은 사형님의 초롱초롱한 목소리를 타고 대중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범어사 마당 가득 울려 퍼진 사형님의 단심(丹心)은 끝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대중들의 가슴을 막히게 했고 소나기처럼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5.
그뿐만 아니다. 사형님은 『선관책진』을 번역하여 우리 출가자들에게 읽게 하여 공부의 길을 열어 주었다. 『선관책진』뿐만 아니라 사형님의 손에는 항상 조사어록이나 경전 번역의 원고 뭉치가 떠나지 않았음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었다. 그 당시 사형님은 선학연구회와 역경원 설립에 뜻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일에 몰두하여 정진하고 있었다.
또 은사스님의 사리탑을 조성하기 위해 사형님은 몸소 지리산 연곡사 등으로 뛰어다니며 자료를 모았다. 사리탑에 대한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서도 마침내 원만히 조성되었던 것은 역시 사형님의 지혜로운 판단력과 열성 어린 노력의 힘이 컸다고 본다.
그와 같이 범어사나 종단의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혼자서 감당했던 사형님, 그러한 사형님의 마음을 그 당시 나이 어린 나로서는 미처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세계였다. 나와는 생각하는 방법이 달랐기에 길이 달랐고 그러므로 자연 서로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사형님이 불국사나 봉은사에 계실 때도 모시지 못했다. 그랬지만 사형님은 나를 볼 때마다 항상 따뜻한 말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깊은 관심과 배려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비록 모시고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사형님은 나에게 든든하고 편안한 의지처였는데 막상 금생의 인연이 끝난 지금에 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허전하고 쓸쓸한 심정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6.
이제 고고한 학(鶴 )같은 사형님을 처음 만난 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가까워 오고 있다. 사바에 머물며 중생교화의 장부대업을 더하셔야 할 분이 표연히 떠나신 뒤의 적막감은 크나큰 슬픔이 되어 북풍 찬바람으로 내 가슴을 파고든다.
철부지 나와 함께 수계하신 사형님은 현실에 안주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무상(無常)의 법을 설하시기 위해 길을 서둘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형님의 상좌 송암화상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창가의 서안에 앉아 지난 일을 곰곰 행각해 보니 세월이 너무나 빨리 흘러갔음이 애석하기만 하다. 나는 마치 천애의 고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이미 내 나이도 작은 나이가 아닌 때문일 것이다. 만단의 슬픔을 접고 가슴속에 응어리를 풀어낸 감회의 일단을 서투르지만 여기에 옮겨본다.
부처님의 교화전적 이강산에 두루펴니
넓고크신 덕화위덕 많은중생 의지했네.
미묘법문 지혜광명 시방세계 비추오니
거룩할사 크신은혜 겁전겁후 찬란해라.
하늘보고 땅을치며 불러봐도 대답없어
남아있는 우리들은 애간장이 끊기누나.
사바세계 어서와서 많은중생 위하여서
자등명과 법등명의 일대사를 밝히소서.
2001년 12월 18일 금정산성 정수사에서
如玄 焚香 合掌
첫댓글 큰스님의 행적을 여러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글입니다.
대처승과의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부분입니다.
대립을 대립으로 대하지 않고 늘 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화와 지혜로 나아가게 하신 모습이 큰스님의 모습이십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대립을 해결하시는 방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습니다. 세찬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살이 더 나그네를 무장해제시킨다는 것.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자비와 지혜의 큰스님 감사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일상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범 답안릉 보는듯 합니다.
늘 그립고 그리원 광덕큰스님입니다.
이렇게 인연 됨에 늘 감사드립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역시 대단하신 분입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
여법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좌복을 내려와서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 것인지 그대로 보여주신 듯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일상의 모습으로서 반야를 아는 것, 반야로 보는 것, 반야를 행하는 것...모두 보현으로 보여주십니다. 스님들께서 금강경 법회유인분을 설하시며 금강경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신 이유도 아마 이런 까닭이겠지...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