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시오, 숙부! 참으로 오랜만이오.”
성군이 황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한다.
“마하(麻訶)! 옥체 일양만강(一樣萬康) 하시옵니까? 소신이 불민하여 용안을 흐렸나이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하하하! 벌이라니요? 그 먼곳에서 짐을 보고자 오신 분을 어찌 벌한단 말이오? 상이라면 또 모를까. 어서 이리로 오르시지요! 가만, 귀공은 뉘신가?”
왕이 성군의 뒤에 있는 이현을 보고 불현 듯 하문(下問)한다.
“예, 마하! 소신의 손자이옵니다.”
그러자 이현이 앞으로 나서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한다.
“마하! 불초 소신 김이현이라 하옵니다.”
“오오! 현질(賢姪)이 아닌가? 어서 오라. 참으로 보고 싶었도다.”
왕이 정자를 내려와 웃으며 이현에게 다가온다.
이현은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여 몸둘바를 몰라 더욱 허리를 숙인다.
왕이 다가와 옥수를 내밀어 이현의 손을 덥석 잡는다.
“마하! 옥체가 상하실까 심히 우려되옵니다. 옥수를 거두시옵소서!”
이현은 잡힌 손을 빼지도 못한채 전전긍긍 하고 있다.
“하하하! 괜찮도다. 짐이 현질을 만나 기쁘기 한량없으니 무엇이 대수인가?”
왕이 웃으며 손을 이끌어 정자위로 올라가자 성군이 그 뒤를 따른다.
“현질의 용모가 이리도 수려할 줄이야. 가히 누이와 매형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음이니 천하에 뉘있어 이를 견줄 것인가? 당연히 태양지체(太陽之體)를 이어 받았으렷다?”
“예, 마하! 거기에 무극(無極)과 천강(天剛)을 더했나이다.”
옆에 있던 성군이 이현을 대신해 대답을 한다.
“뭐요? 무극과 천강을 더해. 으하하하! 무극천강태양지체라니! 고금을 통털어 다시 없던 신체가 아니오? 태양지체만도 범인의 오성(悟性)을 열배나 뛰어 넘거늘 이는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것이오?”
“예, 마하! 소신의 능력으로도 헤아릴수가 없사옵니다. 무극이 영(靈)을 관장하고 천강이 체(體)를 관장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하나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아직은 그 능력이 다 들어나지 않고 있사옵니다.”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니, 그것은 또 무슨 말이오?”
“예! 무극과 천강은 불사화령지기(不死火靈之氣)를 얻어야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수 있으나 아직까지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불사화령지기라! 숙부의 능력으로도 찾지 못한다면 천하에 누가 있어 그것을 찾는단 말이오? 알았소. 짐이 군사를 풀어 천하를 다 뒤지라 명하리다. 현질을 위한 일인데 짐이 무엇인들 못하리오.”
“마하! 그것은 범인이 찾아도 알수가 없사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몸으로 느낄수도 없으니 오직 무극천강태양지체만이 알아볼수 있습니다.”
“하면, 현질이 직접 그것을 찾아내야 한단 말이오?”
“예, 마하! 저 아이에게 맡겨 두시옵소서! 하늘의 연이 닿는다면 찾아질 것이옵니다.”
“알겠소, 숙부! 숙부의 말이 그렇다면 짐이 그리하리다. 하나 짐이 아무것도 할수 없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료. 복본의 염원이 현질로 인하여 당겨질줄 알았는데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
“황공(惶恐)하옵니다, 마하! 하나 소신이 신명을 다하여 마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아오니 심려를 거두시옵소서!”
“고맙소, 숙부! 짐은 언제나 숙부를 믿고 의지할 뿐이오! 한데, 아직까지 아무런 징조가 없소? 또 누이와 매형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소? 따로 연통(聯通)이 온 것은 없소?”
“예, 아직까지 그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고 있사옵니다. 아들 내외는 지금 흑소의 대륙에 머물러 있으며, 그것이 있을만한 곳은 전부 누비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다 짐이 부덕한 탓이오. 태조 임금께서 갈라진 삼한(三韓)의 무리를 하나로 합치라는 명에 따라 탄의 지위를 성(姓)으로 부여받고 국호를 다시 코리라 하였건만 정작 삼권(三權)은 한번 사라진후 아직까지 그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소. 짐에게 삼권이 없으니 몽의 무리가 짐을 없수히 여겨도 능히 이를 대적할 방법이 없소. 본디 한핏줄이라 크게 대적치 아니 하였으나 그 도가 갈수록 더해가니 이제 마땅히 짐이 나서 그동안의 잘못을 엄히 따져 묻고자 하오. 그들이 우리의 강토를 수차례 침탈하고 동족을 살상하여 시산과 혈해로 변하였어도 무지하고 어리석은 탓이라 치부하여 참아낼수 있었소. 하나 도저히 묵과하지 못할 일은 그들의 무리 가운데에 카라코룸을 세워 스스로 천부삼권(天賦三權)의 주인임을 참칭하니 수만년에 걸쳐 이어져온 복본의 염원이 이로 인하여 그 빛을 잃었소. 하여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죄과를 낱낱이 따져 물은 후 후대에 이를 반드시 전하고자 하오. 처음부터 우리에게 삼권이 있었다면 그들이 어찌 그토록 방약무도한 짓을 할수 있었겠소. 하나 안타깝게도 태조께서 시작하여 짐에 이르기까지 수백년동안 삼권의 출현을 기대하였으나 짐이 부덕한 탓인지 그 모습을 비치지 않는구료. 본디 부리의 후손들은 코리의 장손이라 형제들의 안위를 보살핌이 우선이라 여겼으며, 설사 서로간에 마찰이 있다 하여도 먼저 무력을 일으켜 형제들을 핍박하지 않는 것이 도리라 여겨왔소. 짐 또한 이를 지키기 위하여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고 무력을 쓰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으나 언제까지나 삼권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을수만은 없소. 하니 숙부께서는 짐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 답을 이른 시일내에 주어야 할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마하! 소신의 죄가 참으로 넘치고 크옵니다. 하나 수만년에 걸쳐 이어져온 염원을 한순간의 판단으로 그르칠수는 없사옵니다. 부디 통찰하시어 크고 깊게 보옵소서.”
“짐이 어찌 숙부의 심정을 모르리오. 역대의 임금님들께서 겪으신 번민이 또 어찌 짐만 못하리오. 참으로 감내하기 어렵소이다, 숙부!”
“그래도 참아내셔야 하옵니다. 태조께서 정하신 국시(國是)를 벌써 다 잊으셨사옵니까? 삼권을 얻지 못하시면 삼한을 일통(一統)하여도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라 할수 없으니 참고 또 인내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시옵소서.”
“그리하리다. 짐의 간담이 굳어 석화(石化)가 되더라도 오직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리다. 여보게, 현질!”
성군과 대화를 하다 말고 돌연 왕이 이현을 돌아본다.
이현이 두분의 말씀을 고개숙여 듣고 있다가 왕이 부르는 소리에 급히 자세를 바로한다.
“예, 마하! 하명 하시옵소서!”
“그대는 조부의 작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예, 마하! 할아비의 작위가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태보(太師太保) 호국대공(護國大公)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 제대로 알고있군. 현질의 가문은 대대로 호국지가(護國之家)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네. 삼한의 후예가 그대의 가문을 호국지가로 명한 것은 오직 한가지니, 잃어버린 삼권을 하루빨리 회수하여 삼한을 일통하고 모두가 복본의 길에 이르고자 함에 있네. 하여 그대의 가문을 흰두에 머물게 함이니 삼한의 무리는 짐을 포함하여 누구도 함부로 범접치 못하게 되어있네. 원황(元皇)의 힘이 비록 사해에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 하나 오직 그대의 가문만은 이를 벗어나 있네. 이는 그대의 가문이 짊어지고 있는 임무가 삼한의 무리를 다스리는 것보다 더욱 막중한 때문이니 군주의 위엄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이를 앞설수 없음이네. 하니 삼권을 회복함에 있어 현질의 마음가짐은 그 무엇보다 이를 앞에 두어야 할 것이네. 알겠는가?”
“예, 마하! 소신이 명을 받들어 한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명이라니? 짐은 그대에게 명을 할 수가 없네. 삼한의 무리중에 그 누가 그대에게 명을 할수 있단 말인가? 짐이 기다림에 지쳐 하는 말이니 부탁으로 받아 주게나. 오랜만에 보는 현질한테 너무 딱딱한 얘기만 하는군. 하나 그냥 넘어가기도 그렇고. 현질! 벽상삼한에 담긴 뜻을 알고 있는가?”
“황공하오나 소신 아직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 뜻을 모른다? 숙부! 어찌된 일이오?”
말을 하며 왕의 고개가 성군을 향한다.
“예, 마하! 사실은 그를 가르치기 위하여 이번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으음! 성모당을 열어 달란 뜻이오, 숙부?”
“그러하옵니다, 마하!”
“흠! 숙부의 말이니 따르지 않을수가 없구료. 이 나라에 오직 짐과 호국의 가문만이 그를 볼수 있으니 내 기꺼이 문을 열라 이르리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하!”
“하나, 그전에 사사로이 현질과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그리하시옵소서, 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