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지난 일을 영화로 만든 데엔 그만큼 세월이 변했다는 것이고 뭔가 당시와 비슷한 느낌도 있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87년엔 고 박종철 고문사건과 고 이한열의 최루탄 사망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시민사회로 확대되어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시위를 했었다.
당시에도 시위가 촉발 되고 학생들이 나서면 정치인들이나 기성세대는 늘 하는 말이 있었다.
학생은 나라의 미래이니 열심이 공부를 하고 정치는 우리에게 맏겨라 ...대학과 운동권에 북한의 지령이 있어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치나 경제나 기성세대의 자세가 잘 되어 있고 배운대로 된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그리고 출세를 한사람들이 무엇이 답답해서 세상을 바꾸고 다수가 원하는 것을 해주겠는가? 그런 경우를 봐오지 못했고 그렇게 하기란 너무 어렵다.
불만만 많고 세상에 뭔가를 터트라는 걸 나쁘게만 보고 적대시 하기 보다는 소통하고자 하고 대화하고자 하는 생각들이 우리사회는 부족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당시 강력한 이념에 따른 학생운동권이 존재했고 북한을 보는 시각도 다양했다. 문제는 이러한 성향이 있다는 걸 언론은 크게 부각했었고 대학가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체제의 늘 우월성을 이야기하고 안보와 체제수호를 강조했다.
그러나 너무나 큰 사건을 저지르고 거기에 인권은 없었다. 체제수호나 안보는 구호나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체감해야 하며 그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라 본다.
그러나 너무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정치체제라고 말하면서 고문이라니...
시민들은 분노했고 관계당국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변명을 했지만 일은 너무 커져버렸다.
언론의 논조도 재빠르게 변화했다. 당시 잡지를 보면 그것이 느껴진다.
아무튼 당시 고문을 했던 경찰들은 기자들의 취재를 따돌리느라 전경들을 출동시켰고 똑같은 방한복을 입은 경찰들 속에 끼어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경사는 서대문 경찰서에 입감되었다고 한다.
부산의 한 양수장 수위로 근무한 박정기씨(당시 57세)의 차남으로 태어난 고 박종철은 형이 대학을 다니던 서울에 올라와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 학교를 다니다 친형의 영향(서울 모대학 학생회장)을 받아 운동권학생이 되었지만 잠깐 뒤로 물러나 어려운 형편에도 공부를 하여 가족들에게 희망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젊은이었다고 기사에 나와있다.
선배의 은신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순순히 응하지 않자 경찰은 물고문을 자행했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