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 마티아의 고향 교우촌
내포 지역에서도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 중의 하나로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 종형제가 출생한 곳이며, 그들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무진년(1868년) 가을에 수원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되어 순교한 분들이다. 본래 이곳은 염전과 논농사를 위주로 하며 생활하던 곳으로 내포 지역에서도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 중 하나다. 가장 먼저 교우촌이 이루어진 곳은 원머리(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였는데,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1850년대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본래 박씨, 조씨, 문씨 등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중 박씨 집안의 삼 형제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살다가 한 명은 공주로 이주하고, 한 명은 경기도 고량(포천)으로 이주하였으며, 또 한 명은 이곳 한정리로 이주해 와 염전을 일구어 소금을 팔아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850년대 무렵에 복음의 씨가 뿌려지면서 일부 주민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원머리 공소는 이웃의 새터 공소와 함께 매우 열심한 공소로 이름이 나 있었다.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나, 그 뒤를 이은 홍병철(洪秉喆, 1874~1913, 루카) 신부(1905년 재임), 크렘프(Krempff, 慶元善, 1882~1946, 핸리) 신부(1913년 재임)의 기록에 이 공소들이 아주 우수한 공소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공소 신자들은 일찍부터 고아를 신자 집에서 기르는 성영회(聖嬰會) 사업에도 동참하였고, 공소전(公所錢)으로 교리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교리 학교는 처음부터 학생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지속되면서 점차 활성화되었다. 그 후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대전교구 박재만 신부를 비롯해 최효인, 최상순 신부 등 많은 신부들이 이곳 출신이다
순교자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는 원머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종형제다. 박 마르코의 부친은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으며,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의 영향이 이곳 원머리까지 이르러 2년 후 무진년(1868년)에 수원의 포졸들이 신자들을 체포하러 왔다. 그들은 두 박씨를 신자들과 함께 체포하여 수원으로 압송하였고, 그들에게 배교를 요구하며 심하게 매질하고 고문하였다. 박 마티아는 잠시 배교했었으나 곧 통회하고 순교하였으며, 박 마르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유해는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그 시신을 찾아 원머리 박씨 집안의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내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두 순교자의 유해는 2009년 11월 3일 다시 원머리 본래 묘역으로 재이장 하였다. 이날 유해 봉송 및 이장은 순교자 후손 박종훈(대전 성모병원 원목차장) 신부가 직접 유해 가마를 메고 봉송에 참여하였다.
■ 순교자 박 마르코 박 마티아 유해 원머리로 봉송 및 재이장
2009년 11월 3일(화) 오전 10시 30분 신평 성당(주임 정필국 신부)에서는 한정리(원머리)에서 1989년 4월 신평 성당 경내로 이장되어 성당에 모셔져 있던 2기의 순교자 묘를 다시 한정리(원머리) 묘역으로 이장하는 ‘순교자 박 마르코 박 마티아 유해 봉송 및 이장식’이 거행되었다. 1989년 4월 교구 성지 보존ㆍ개발 작업의 하나로 두 순교자 유해를 신평 성당 경내로 이장한 지 20년 만으로, 재이장은 한정리(원머리) 묘역을 성지로 개발하기 위해서다.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에는 1850년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그곳에서 출생한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 와 박태진 마티아는 4촌 형제간이었다. 박 마르코는 모친의 뜻에 따라 착실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8년(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마티아와 함께 15일후 교살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날 유해 봉송 및 이장은 신평 성당 묘역에서 두 순교자 유해를 출관한 뒤 가마를 이용해 한정리(원머리) 옛 묘역까지 두 순교자 유해를 봉송하고 본래 묘역에 안장했다. 순교자 후손 박종훈(대전성모병원 원목차장) 신부는 직접 유해 가마를 메고 봉송에 참여했다.

▒ 성영회(聖瓔-玉會)
버림받은 아동들을 위한 구제 사업 기관이다. 1843년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인 홀본 잔송(Holbon Jansong)에 의해 창설되었다. 모든 어린이들을 구제하기에는 재원이 모자랐으므로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살아나면 그리스도교인 가정에서 맡아 키우도록 하는 방식으로 어린이 구호 사업을 폈다. 우리나라에서는 1852년 8월 말에 조선에 입국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가, 전국 각지를 돌며 전교 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죽음에 직면한 고아들을 보고, 파리에 있는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청하여 1855년경에 고아들에 대한 구제 사업을 펴기 시작하였다.
1857년 12월 20일 메스트르 신부가 충남 합덕에서 선종한 뒤에도 이 사업은 계속되어 1859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신자로서 대세(代洗)를 받고 죽은 아이가 701명, 프랑스의 고아원 본부에서 보내온 경비로 양육하는 고아가 43명에 달했다. 이 사업은 1859년까지는 서울에 유모를 둔 고아원으로 발전하였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다가 1880년에 다시 계속되어 1886년부터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인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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