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하타이4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이수스 전투를 영상으로 보다!

5월 20일 터키 동남부 시리아 와 접경지대에 자리한 옛날에는 안티오키아(안디옥)
라고 불리었던 하타이 시내에서 고고학 박물관 Arkeoloji Muzesi 을 봅니다.

하타이 인근인 하르비예와 타르수스 및 사만다으 에서 출토된 2~ 5세기 로마시대의
모자이크 가 유명한데,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등 그리스 신화와 동식물을
생생하게 묘사한 모자이크 는 세계에서도 아주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조각상 과 모자이크 벽화 가 즐비한 박물관 내부를 돌아보다가 한곳에 이르니
모니터에 영상물 이 나오는데 한눈에 보아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 이 맞붙은 "이수스 전투" 입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나뉜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 BC 404년 스파르타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전란이 계속되던중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왕 이 세력을 길러 BC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왕자 알렉산드로스 는 아테네와 테베 동맹군을 격파 하고 그리스를 손에 넣습니다.


BC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소아시아로 건너가는데 마케도니아군은 플랑크스 보병대가 3만에
기병은 2천이고 헬라스의 코린트 동맹 보병 7천명에 테살리아 기병부대가 참가했으며
아시아에 상륙하여 아버지 필리포스 가 마련했던 아비도스 병사 1만과 합류 5만 대군 입니다.



알렉산드로스 는 트로이를 거쳐 그라니코스 강변 전투에서 멤논등 그리스인 용병 이
다수 포함된 페르시아군 과 싸우는데 그는 스스로 기병이 되어 적진으로 들어가
다리우스 3세의 사위 미트리다테스 와 싸워 승리하고는 그리스인의 도시를 해방 합니다.



그는 미트레스와 할리카르나소스 를 함락한후 북상해 고르디움 을 지나 카파도키아 를
평정한 다음 아나톨리아를 정복 하고 남하해서는 페르시아 해군의 본거지인
킬리키아 연안 타르소스 를 거쳐 사르디스 를 함락하고는 이어 북시리아를 공략 합니다.


다마스쿠스 를 경유하여 킬리키아 에서 남하하는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 과
유리한 지형을 찾아 시리아 안에서 이동하는 마케도니아군 은 이수스 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북쪽에 페르시아군이 남쪽에 마케도니아군이 대진합니다.



마침내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 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급경사 지역 이라
기병을 주력 으로 하는 페르시아군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마케도니아군의 중앙을 차지하는 중장 보병의 밀집대 에 압도 당하고 맙니다.


다리우스 3세 는 전차를 타고 싸웠으나 다리에 부상 을 입고 도주하기에 이르렀으니 전쟁터
에 남겨진 전리품은 엄청난 양 이었다는데 테살리아 기병 을 다마스쿠스로 파견하여
전리품 을 거두고 포로가 된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 왕비, 두 명의 딸을 정중하게 대합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 은 다리우스 3세를 바로 추격하지 않고... 페르시아
해군의 근거지 페니키아(레바논) 로 향했으니 에게해에서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 이 마케도니아군의 퇴로를 차단 할지도 모른다고 겁내고 있었지요!


페니키아 의 여러 도시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지만 티루스(티레) 는 마케도니아군에
대해 철저히 적대적 태도를 취했으니..... 섬에 건설된 도시 를 육지에서
공격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하고 제방 을 만들었지만 함락에는 7개월 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집트 로 들어간 알렉산드로스 는 이 땅에 그리스풍 도시 를 건설하기로
하고 바다에 가까운 나일강 델타 지대의 파로스 섬 을 선택했으니....
이렇게 해서 건설된 도시 알렉산드리아 는 훗날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 가 됩니다.


그후 알렉산드로스 는 태평스럽게도 1,000 km 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
에 참배해서는 “신(神)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고는.....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서 메소포타미아 로 진격해 가우가멜라 에 이르릅니다.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 은 기병 4만 5천 에 보병 20만 으로 4개의 낫 이 부착된 무시
무시한 전차 200대 에다가 코끼리 15마리 를 동원했는데 낫이달린 전차 를 전진시키자
마케도니아 보병 은 창과 활로 말과 마부 를 쓰러뜨리는 전법으로 전차를 무력화 시킵니다.


알렉산드로스 는 몸소 기병대 선두 에 서서 다리우스 3세를 향해 돌진 했으니
페르시아군 은 지휘관이 선봉에 선 마케도니아 기병대 의
맹돌격을 바크티아리 기병 과 스키타이의 갑옷 기병 으로 요격하며 막아섭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우익을 따르던 소수의 그리스 기병대 가 이들을 맞아 싸우게
했고 마케도니아 정예 기병대 를 결전 병력으로 돌입 시켰으니...
이수스 전투 와 마찬가지로 적군을 분단 시키고 다리우스 3세 에게 다가갑니다.

귀신 처럼 다가오는 알렉산드로스 에게 겁을 집어먹은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는 그만 전차에서 내려 말을 타고 전쟁터에서 도망치자
다리우스 3세가 직접 지휘하던 중앙 부대도 왕을 따라 도주 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바빌론의 마자이오스가 이끄는 기병대 가 마케도니아군 우익을 맹공격하니....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 추적하기를 포기 하고 파르메니온을 구원 하니
왕이 전쟁터에서 사라진 페르시아군은 퇴각하고 은 100톤의 재물 이 버려졌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 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 을 당하였는데....
그는 이란 고원을 정복한뒤 인도 인더스강에 이른후 페르세폴리스 에 되돌아왔으나
BC 323년 바빌론 에서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중 33세의 젊은 나이 로 갑자기 죽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부하 장군들이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3개의
나라 를 세우는데.... 그중에 시리아의 왕이 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는 아버지 안티오코스 를 기리고자 모두 16개의 도시 를 세웠습니다.

여기 안티오케이아(하타이) 도 그 가운데 하나로써 이소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인 기원전 300년에 도시의 토대를 닦았으니...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로써 헬레니즘 세계 최고의 번영 을 구가했던 큰 도시 였지요.

셀레우코스 왕조 가 로마 에 망한후에도 안티오케이아 는 근동에서 알렉산드리아 에 버금
가는 로마제국 제3의 도시 로써 번영을 누렸고, 초기 기독교 시대 베드로와 바울 의
이방인에 대한 포교 거점 이 된 도시로 그리스 문화의 영향 을 받으며 성장한 땅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인(크리스천) 이란 이름이 이 도시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
안티오키아 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현재의 이스탄불) 과 함께
크리스트교 5대 교구 의 지위에 총주교좌가 설치 되어 시리아 중심지로써 번영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시대인 526년 5월 29일에 일어난 대지진 으로 25만에서 30만이
넘는 도시 주민들이 희생된후 재건된 뒤로는 예전의 위용은 떨치지 못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 의 거듭된 공격 으로 안티오키아는 차츰 쇠퇴 하기 시작합니다.

7세기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이슬람 제국 에 패배하고 시리아를 잃은 뒤에는
안티오키아는 쇠퇴 하다가 969년에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으로
부터 안티오키아를 되찾았지만 1084년 에 다시 셀주크 투르크 에 정복당합니다.

1096년의 제1차 십자군 은 반년 이상을 안티오키아 포위 공성전 에 쏟아부었고....
안티오키아를 정복해 그 땅에 안티오키아 공국 을 세웠지만 1268년에 이집트
맘루크 왕조 에 안티오키아를 빼앗겼는데 이슬람 시대에 안티오키아는 아시라 불립니다.

1516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멸망 시키고 이 도시를 정복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 위임통치 에 들게된 시리아에 편입 되었다가 투르크계 주민이
시리아에서 분리운동 을 일으키고 하타이 라는 이름으로 1939년에 터키공화국 에 편입됩니다.

안타키아 Antioch 는 원래 “반대자”라는 뜻이라는데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부하 장군 중에 셀류쿠스 1세 가 부친 안티오쿠스를 기념 하기 위해 헬라 제국 내에
16개의 안디옥 을 건설했으니 성경에 대표적으로 언급된 곳 이 여기 수리아 안디옥 입니다.

이 도시 수리아 안디옥 Antioch of Syria 은 셀류쿠스 1세 에 의해 B.C. 300년경 건설된
시리아의 수도 로 상업이 발전하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가졌는데 헬라 에 이어 BC 65년
이 도시를 정복한 로마는 안디옥을 제국 내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로 확장 발전 시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