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균이가 그저 예뻐서 미칠듯이 좋았던 시절, 며느리의 마음과 달리 눈썰미가 보통이 아닌 시어머님은 아이데리고 병원엘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 때가 태균이 18개월 무렵. 태균이가 18개월부터 정신과의원을 다니게 된 계기이기도 했고, 자폐증을 한번도 접해본 적도 공부를 해본 적도 없는 의사가 갸우뚱거리며 말도 안되는 놀이치료를 시작한 것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명절 때나 시댁에 큰 행사가 있어도 태균이 양육을 핑계로 모든 시댁행을 면제해 준 것도 태균이 친할머니였으며 어제 드디어 100세 가까운 연세에 영면에 들어서도 우리를 현장에 가지않게 해주는 것도 당신의 뜻을 충실히 받드는 아들 조치입니다. 4남 1녀를 낳아 4남 중에 그 어렵다는 고시에 3명을 합격시키고 오빠 동생들에 희생되어 고교만 졸업한 딸마저 고위공무원으로 은퇴를 했으니 이만한 자식농사가 있을까요. 태균이 친할머님의 정성과 은공들의 결과입니다.
세속적인 평가로 볼 때 그야말로 지독히 없는 집의 딸로 위풍당당 자손많은 가문으로 시집가서 SKY출신 며느리들 틈에서 비교당할만 하지만 태균이 친할머니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않았습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심적으로 늘 제 편을 들어주셨고 바로 윗 동서와 제가 목소리높여 싸웠을 때도 정말 한마디 하지않으셨습니다. 제가 시댁에서 윗 형님과 대판 부딪치게 된 것도 그녀의 태균이에 대한 멸시태도에 분개한 결과였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알고 윗 동서의 성격을 알기에 태균이 친할머님은 먼저 큰소리친 저를 한마디도 탓하지 않고 훈계따위도 없었습니다.
저는 결혼해서 가장 좋았던 일이 태균이 친할머님같은 분을 시어머니로 두게 된 일이었습니다. 솜씨좋고, 늘 조용히 희생하며, 말 여기저기 옮기시는 일 절대 없고, 자식들(며느리들 포함)의 험이라면 험일 수 있는 점들을 결코 입에 올리지 않으셨으며, 보통 이상의 눈썰미를 갖고도 그걸 절대 무기처럼 사용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지독하게 어려웠던 시집살이 시절에도 가타부타 말없이 인내하셨던 것처럼 평생을 그렇게 보낼 수 있는 인성과 풍격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친정아버지로푸터 6.25전쟁으로 인한 남하 전에 북한 고향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 했고, 결혼해서는 시어머님 시집살이 이야기를 참으로 진하게 많이 들었습니다. 두 분다 진짜 기억력 끝내주었고 세세한 상황묘사 능력들이 탁월해서 이야기만으로도 상황과 당시 환경이 그대로 상상되곤 했습니다.
저는 어렵기는 해도 시어머님과 함께 살고싶은 마음도 많았습니다. 결코 셋째 아들집에 와서 사실 분도 아니지만 태균이를 두고 내내 안타까와 하던 마음과 속상해하던 눈길은 오래오래 남습니다. 결국 10년 가까이 우리 모자 얼굴 제대로 보여 드리지 못한 채 떠나보내드립니다.
막 결혼해서 우리 집에 방문한 시부모님께 만들어드린 냉면, 지금 생각하면 엄청 맛없었는데 맛있다고 먹어주시던 그 분들, 어떤 날 시댁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 부지런히 광에서 쌀퍼다가 밥지어서 밥차렸는데 그 밥을 드시면서 '허허 개밥 쌀로 밥을 했구나' 웃어주시던 그 분들 호방함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다 지나간 추억이며 오래 건강할 줄 알았던 시어머님도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님, 많이 존경했으며 제 시어머님이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머님의 훌륭하신 면모들을 가슴 속 깊이 새기며 비록 장례 현장에 있지는 못 하지만 뜨거운 눈물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혹시 저승에도 어떤 세상이 있다면 당신이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공부 싫컷 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는 분임을 저는 압니다. 태균이 걱정은 부디 떨쳐버리시고 편한 걸음하십시요. 어머님과 함께한 사진은 태균이 어렸을 때 모습에서 그쳐있네요...
천방지축 시댁에서 뛰어놀던 태균이 모습도 어렸을 때에서 맘추어버리고, 태균이가 뻥튀기 된 것처럼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가 버렸네요.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 시모님도 넘 훌륭하신 분이었는데, 태균이 할머님도 정말 훌륭하십니다. 훌륭한 시어머님은 가문을 평화롭게 지탱하고 받쳐 주는 기둥이십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