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성지순례 여덟째 날 오전 7시 30분 맑은 공기와 빛나는 태양이 비추는 산 조반니 로톤도를 떠나 몰리세주의 카스텔 페트로소로 출발했다. 카스텔 페트로소는 로마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여km 떨어져 있는 곳인데, 이탈리아의 루르드라고 불리는 곳으로 고통의 성모님 발현지이다. 10시 30분에 카스텔 페트로소의 고통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미사가 예약되어 있었다.
카스텔 페트로소의 고통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거의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고통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우리 외에 다른 순례자 하나 없이 한적했다. 우리만 특별히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대성당은 성모님이 발현하신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파탈레키아 산(Monte Patalecchia-해발 1399m) 중턱 해발 827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카스텔 페트로소 대성당은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데다 성당 건물 또한 보기 드문 독특한 스타일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져서 듣던 대로 눈이 오는 겨울이면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나오는 얼음 궁전처럼 예쁠 것 같았다.
대성당 내부는 고통의 성모님이 당신 발밑에 누워계신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발현하셨던 피에타 상으로 꾸며진 중앙제대가 있고, 성모님의 7고(七苦)를 상징하는 7개의 제단이 있는 경당들이 있다. 우리는 먼저 중앙제대가 있는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카스텔 페트로소의 고통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
김승호 요셉 신부님 강론
우리는 고통의 원인을 집착으로 보지 않고 우리 안의 유혹으로부터 보고 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는 데서부터 죄가 시작되고 그 죄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바로 아담의 범죄다. 그런데 고통은 잘못으로 인한 고통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가 오면서 고통은 남들을 위한 희생의 의미를 다시금 찾게 된다.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고통, 죄가 없지만 남들에게 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통하여 당하는 거룩한 고통의 가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에서 그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고통을 죄의 결과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당신을 내어주는 죽음을 통한 영원한 삶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고통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고통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신다. 피하고 도망가는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내어주는 고통을 선택하신다. 우리 부모님이 그렇다. 부모님의 삶 안에는 사랑으로 내어주는 고통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부모의 사랑이 있다. 어쩌면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우리는 부모라는 이름 아래서 그 고통에 동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더 깊이 깨닫는 삶이 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도망가게 해주는 그런 이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내어놓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곳 성모 성지에서 고통의 예수님 앞에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며 찬양하는 성모님의 모습은 우리 삶 안에서의 고통이 이렇듯 하느님께 들어 올려지는 봉헌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성모님의 삶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삶 또한 우리의 모든 아픔과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감사의 삶으로 변화되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다. 이제 우리는 성모님을 통해서 성모님의 그 큰 사랑에 힘입어 성모님의 도움을 청하며 그 삶에 나아가도록 해야 하겠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모님의 7고(七苦)를 상징하는 7개의 경당에서 성모님이 예수님의 어머니로 살면서 겪으셨던 7개의 고통스러운 수난을 묵상했다.
성모 마리아께서 성전에서 시므온 예언자의 예언을 들으신 고통(루카 2,34-35)
성모 마리아께서 소년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루카 2, 41-51)
성모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과 함께 고통 당하심(요한 19, 25-30)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요한 19, 25-30)
성모님의 칠고 묵상 후 성당을 나와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장소로 갔다. 첫 번째 발현은 1888년 3월 22일 체사트라산티라고 불렸던 들판에서 시골 처녀인 비비아나로 불렸던 35세의 파비아나 치카노와 34세의 세라피나 발렌티노에게 발현하셨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땔감에 쓸 나무를 구하고 양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왔는데, 양 한 마리가 없어져서 양을 찾기 시작하였다. 파비아나가 양을 발견했는데, 양을 찾은 근처의 바위가 있는 곳에서 아주 강한 빛이 나고 있었다. 빛을 본 파비아나는 다가가 바로 무릎을 꿇었고 바위 안쪽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계신 성모님을 목격하였다. 놀란 파비아나가 소리쳐 세라피나를 불렀으나 세라피나가 도착했을 때는 성모님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당시 파비아나가 목격한 성모님의 모습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의 시신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고, 양팔은 벌려 마치 돌아가신 아들 예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시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통의 성모님이 발현하신 장소와 발현 당시의 모습
고통의 성모님과 파비아나
그리고 열흘 뒤 4월 1일에 두 여인은 이 산을 다시 찾아온다. 그날은 부활절이었고 지난번처럼 오후였다. 이번에도 예수님과 성모님은 발현하셨는데 파비아나와 세라피나 모두에게 발현하셨다. 이때부터 두 여인은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소식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순례를 오기 시작하면서 이 내용은 이탈리아 전국으로 퍼지게 된다.
고통의 성모님 발현을 목격한 파비아나와 세라피나
실제 인물 파비아나와 세라피나
그러던 중 1888년 7월 이곳에서 기도를 바치던 파비아나는 어느 순간 갈증을 느껴 주변을 둘러보다가 성모님이 발현하신 곳 가까이에 평소에 보지 못했던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가 손으로 물이 나오는 곳을 파기 시작하자 샘이 솟아올라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샘의 물을 마시면 치유의 은사를 받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물을 마신 누구도 병이 낫지는 않았다. 그해 11월 카를로 백작과 아들 아우구스토가 이곳에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하러 왔을 때 아들에게 이 샘의 물을 마시게 했는데, 물을 마신 아들의 병이 즉시 나았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를 진료했던 의료진들로부터 그의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사실은 첫 번째 치유의 기적으로 기록되었으며, 이후에도 수많은 기적들이 보고되었고, 이러한 기적들과 회개는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증언되고 있다.
기적의 샘이 솟아오른 곳에 1941년 현재의 모습으로 새로 조성하였다.
이에 카를로 백작은 성모님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당시 볼로냐의 건축가인 괄란디에게 아주 웅장한 성당 건축을 의뢰하게 된다. 이는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헌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괄란디의 설계로 현재의 아름다운 성당이 건축되었다. 하지만 현재 성당은 처음 설계된 것보다 규모 면에서 아주 작게 지어졌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예전부터 항상 가난한 지역이었고, 이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당을 완성할 만큼의 재원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지역이었다. 성당을 완성하는데 무려 85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드디어 1975년 감격스럽게도 성당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곳의 성모님 발현이 다른 성모님 발현지와 다른 점은 역사상 처음으로 성모님께서 당시 관할교구 교구장이던 팔미에리 주교님에게 발현하셨다는 것이다. 성모님 발현 소식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교황 레오 13세는 마침 주교회의 참석차 로마에 머물던 팔미에리 주교님을 불러 직접 조사하여 보고해 줄 것을 요청하셨다. 이에 팔미에리 주교님은 1888년 9월 26일 발현 현장을 직접 방문하시고 이런 감동의 글을 쓰신다. “처음에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계신 성모님의 발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분들이 말했던 그 모습 그대로 발현을 보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회개하라 하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마지막 자비의 빛입니다.”라고 쓰셨다. 보통 발현 목격자들이 어린이, 시골 농부 등 평범하고 소박한 이들인 것을 감안할 때 교구장 주교님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팔미에리 주교에게 발현하신 고통의 성모 마리아
성모님 발현은 1950년도까지 계속 이어졌다. 항상 같은 모습으로 발현하셨다. 그리고 항상 말씀은 없으셨는데, 단 두 사람에게만 메시지를 주셨다. 페데리코라는 11살 어린이에게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른 한 번은 살레르노-카바 데 티레니에서 온 청년인데, 자신이 무엇을 해야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성모님께서 그에게 발현하셔서 살레시오회에 입회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다. 이 외에는 한 번도 메시지를 주신 적이 없다. 그러나 성모님의 발현에는 메시지가 있는데, 그건 성모님의 발현 모습 그 자체라고 한다.
성지 주임 신부님께서 풀이해 준 발현의 의미라며 우리에게 설명해 준 가이드에 의하면 성모님의 모습은 한쪽 무릎을 꿇고 양팔은 벌린 채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여 주시며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계신다. 어머니로서 자식을 죽음으로 잃게 된 고통은 아마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 고통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성모님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계시는 건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의미한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의 삶과 인간의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기에 곧 다가올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이미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성모님의 슬픔과 고통의 순간이 오히려 부활에 대한 희망의 시작임을 알려주고 계신다. 그래서 성모님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의 옷이 아닌 파란색과 붉은색 옷을 걸치고 나타나셨다. 비록 인간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곧 부활하시어 다시 오실 것을 알고 계시기에 슬픔과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이렇듯 화사한 새 옷을 입고 준비하고 계신 것이다. 이 발현의 가장 큰 신학적 메시지는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 더 큰 희망을 가져오고,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도 참 신앙인의 눈으로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카스텔 페트로소 성지를 떠나기 전 성모님 발현지 아래에서 파비아나가 발견한 샘물을 마셔보았다. 성모님께서 산 좋고 공기 좋은 곳에 마련해 주신 샘물이어서인지 정말 물맛이 깨끗하고 좋아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성모님이 마련해주신 샘물을 뱃속에 가득 담고 유쾌한 발걸음으로 다음 순례지인 수비아코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비아코는 로마에서 동쪽으로 약 73km 떨어진 아니에네(Anio River) 강변 해발 410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 탈레오 산(Mount Taleo)이라고 부르는 수비아코 마을 뒷산에 있는 거룩한 동굴은 성 베네딕토(480?-547?)가 3년간 은수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곳이다.
480년경 누르시아 지방의 로마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베네딕토는 청년이 되어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한창 학업에 열중하던 베네딕토는 환락과 퇴폐가 만연했던 로마에 염증을 느껴 공부를 포기하고 23살 무렵 수비아코의 탈레오 산 깊은 곳 두 평 남짓한 동굴에서 3년간 은수생활에 들어갔다. 그 동굴이 성 베네딕토 수도원 안에 잘 보존되어 있으며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즉 거룩한 동굴이라고 부른다. 현재 베네딕토 수도원은 6세기에서 8세기경에 처음 작은 수도원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그 이후에 점점 발전하면서 확장되어 현재 모습으로 지어졌다.
수도원 입구 안내판에는 ‘성 베네딕토 수도원 거룩한 동굴(Sacro Speco)’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입구를 지나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절벽에 덧대어 건립된 수도원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수도원 입구
베네딕토의 거룩한 동굴 수도원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입구 위에는 베네딕토 성인께서 수도 규칙서를 쓰시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왼쪽에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입구
두 번째 입구에 들어서면 현관에 1500년대 초에 페루지아 학파에서 병풍처럼 그려놓은 그림들이 있는데, 왼쪽부터 성 마르코 복음사가, 성 요한 복음사가, 예수 그리스도, 성 마태오 복음사가, 성 루카 복음사가가 그려져 있다.
두 번째 입구
4복음사가
또 두 번째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익명의 화가가 그린 프란치스코 성인의 초상화가 세워져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경당이 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 없어 이곳에 세워놓았다고 한다. 초상화에는 오상도 없고 후광도 없다. 오상 받기 전 1223년에 이곳을 순례한 프란치스코를 기념하여 그린 것이라고 하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성인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뒤에 그려진 것으로 밝혀졌다. 중요한 것은 오상 받기 전 살아계셨을 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입구 들어서서 오른쪽에 프란치스코 성인 초상화가 세워져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으시기 전의 모습.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전 모습으로 성인의 실제 모습과 가장 닮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순례를 많이 하셨다. 특히 유명한 성지는 다 순례하셨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만드셨기 때문에 베네딕토 수도회 등 이전에 모범이 되었던 수도회를 공부하기 위해서 순례하셨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곳을 방문하셨을 때 이미 유명한 분이어서 이곳 수도자들이 미사 경본에 성인의 싸인을 하나 받아놓았다. 성인의 싸인이 지금도 그 책에 있다. 책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지만 싸인이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이곳을 방문하셨다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거룩한 동굴 수도원은 성 베네딕도가 은수 생활을 하던 동굴을 중심으로 절벽에 붙여 건립된 수도원 건물이어서 구조가 복잡했다. 수도원 성당은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성당의 천장과 벽면들은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 베네딕토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성당의 벽화는 대부분 글을 몰랐던 당시의 민중들에게 성경 내용과 성인의 발자취를 이해시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2층 성당 내부
먼저 수도원 2층 성당에 들렀다. 제대 뒤쪽 벽면이 자연 그대로의 암벽이다. 암벽을 유지한 채 붙임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대 뒤쪽이 암벽
성당 입구 쪽 벽면에는 예수님의 수난기와 부활 이야기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그려 놓았고, 제대 앞쪽 벽면에는 베네딕토 성인의 유명한 일화를 그려 놓았다.
예수님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 부활 후 막달레나 만남, 예수님과 11제자, 예수님 승천
예수님 유다와 입맞춤 후 잡혀가시고 제자들은 도망, 예수님 십자가 지고 골고타 언덕 가심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
베네딕토 성인이 독이 든 술잔에 성호를 긋자 술잔이 깨어짐, 성인이 기도중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자꾸 수도원 밖을 나가는 제자를 매질하심
이어서 2층 성당에서 연결되어 있는 베네딕도 성인상이 있는 마당으로 나갔다. 거대한 바위 절벽에 수도원 건물을 붙여서 지었음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 절벽 아래 작은 동굴에서 3년 동안 성인께서 은수 생활을 하셨다. 그 동굴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서 수도원 건물이 지어졌다.
베네딕토 성인께서는 평소에 “절벽아 내 사랑하는 자녀들을 해치지 마라.”하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이 지역이 실제로 지진이 많은 곳인데 성인의 기도 도움 인지 한 번도 지진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어서 절벽 아래 거룩한 동굴이 있는 1층 성당으로 내려갔다. 1층 성당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굉장히 좁고 높이가 낮아서 머리를 숙여야만 하는 공간이었다. 통로에서 만나는 계단을 통해 1층 성당으로 내려가니 성인이 3년간 기도와 묵상을 하던 ‘거룩한 동굴’이 나타났다.
1층으로 내려가는 통로
1층 성당. 왼쪽에 거룩한 동굴 입구
거룩한 동굴 입구
1층 성당 천장에는 하느님의 어린 양과 4 복음사가가 그려져 있고, 밑으로 벽면에는 베네딕토 성인의 생애 이야기인 몬테 올리베따노 수도원 정원 회랑에서 본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유모의 깨어진 그릇을 고쳐주는 베네딕토 성인, 유모를 떠나는 성인, 로마노 수사님을 만나서 수도복을 입고 동굴로 들어가는 성인
거룩한 동굴 안에는 고요히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듯한 표정의 베네딕토의 조각상이 있다. 아주 젊고 잘생긴 청년으로 표현된 이 대리석상은 1657년 베르니니의 제자인 안토니오 라찌의 작품이다. 동굴에는 빵 바구니와 기도하셨던 십자가 그리고 촛대가 세워져 있다. 직접 본 동굴은 말이 동굴이지 울퉁불퉁한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3년 동안 기도와 묵상으로 보낸 성인의 거룩한 신앙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베네딕토 성인께서 이 동굴에서 지내던 3년이란 시간 동안 사람 중에는 성인에게 빵을 제공해 주던 로마노라는 수사님만이 베네딕토 성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외에는 하느님과 마귀 두 존재가 끊임없이 베네딕토 성인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왼쪽은 성모 마리아 경당, 오른쪽은 거룩한 동굴
수도원을 개방하지 않은 공간들도 있었다. 1시간여 만에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장 중요한 성지 수비아코의 거룩한 동굴 수도원 순례를 마쳤다. 우리의 방문이 늦은 데다, 수도원 문을 닫을 오후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가 내일과 모레 이틀간 순례할 로마로 가기가 바빠 수비아코를 뒤로하고 부지런히 로마로 향했다.
첫댓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로마가 코앞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