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던 터라 그곳에서 나고 자란 내가 해방을 맞은 것은 열여섯일 때였다.
해방이 되자, 그곳의 우리 동족은 고국으로 돌아가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고 속속 귀국했다.
나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일궈놓은 재산을 다 놓아두고 교육도 받고 잘 살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에 불과했을 뿐, 돌아와 본 고국은 교육은커녕, 먹고 살기도 어려웠다.
뭔가 속았다는 기분과 함께, 대단히 낙망한 채,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잘살든 못살든 죽음 앞엔 평등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살고 있던 시골에 노인들이 다니러와 하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원효 대사와 서산 대사의 얘기를 하며, 그들은 정말 ‘도승道僧’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처음이었지만, ‘도승’이라는 말이 궁금했다.
‘도승이 뭡니까?’
‘도를 통한 승려지.’
나는 궁금했다. 도를 통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 이 사람아 도를 통하면 그만이지, 어떻게 되긴….’
그러면서 그분들은 도를 통하면 허공을 날아 다니는 신통조화를 부리게 되며,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신통’과 ‘생사해탈’이란 단어가 마음에 박혔다.
도를 통한 승려가 된다는 것이, 마음자리를 깨달아 생사해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마음을 밝히고 나면 끓는 물에 얼음 녹듯 그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이었으나, 그때는 허공을 훨훨 날아 다닌다는 신통에 마음이 더 갔었다.
하여튼, ‘그것 괜찮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솔깃해 있는데, 그분들의 하는 얘기가 그렇게 되려면 승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소리, 닭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살면서 밥도 먹지 않고 솔잎만 따먹으면서, 한 가지만 생각할 뿐 어떤 잡념도 일으키지 않고 10년 동안 마을에 내려오지 않아야 도를 통한다는 것이었다.
그 ‘하나’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때 나는 승려가 되기로 결심했다.
승려란 목탁을 ‘똑똑’ 두드리며, 염불이나 하는 사람인 줄 알았던 내게 출가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때부터 《석문의범》을 사다가 염불하는 것과 불공시식하는 것까지 전부 외우고 범어사로 갔다.
그때 거기 가서 진짜 놀랬다.
한국에 와서 조그만 절만 보다가 큰 절을 보니 ‘아, 한국에도 이렇게 큰절이 있었구나.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문이며 보제루, 대웅전을 차례로 둘러보는데 희망이 솟아났고, 스님들이 경내를 오가는 모습을 보니, 이런 곳에 들어와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다.
그날 눈내린 산 밑에 숲으로 우거져 있는 미륵암을 보고, 정말로 신선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느낌이 들었고, 얼마 후 날을 잡아, ‘이곳에서 10년 머물며 도를 통하리라’라고 하면서 큰 맘 먹고 미륵암으로 출가했던 것이다.
행자생활 한 해를 보내면서, 혼자 예불도 올리고 불공도 하고, 나중엔 장삼을 걸치고 법문까지 했다.
절에 일이 있는 날 말고는 주지스님은 늘 출타중이었고, 사람이라곤 행자인 나밖에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잠깐 주지스님의 예식하는 모습을 눈여겨보고서 예식하는 법을 익혔기에 예식을 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이 승려가 되려면 이것을 배워야 한다며, 《초발심자경문》을 내놓았다.
스님이 한 번 죽, 새겨주는데, 한글에 서툴렀던 나는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어 사전에 의지해서, 혼자 독학을 하다시피하며 익혔다.
그 다음엔 《치문》을 읽었는데, 그것은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어서 포기했다가 나중에 해인사에 가서 배웠다.
《초발심자경문》은 나중에 내가 번역을 해서 동생에게 익히라고 주면서 출가를 권유했던 책이라 기억에 남는 책이다.
나의 출가에 대해선 긍정적이었으나, 동생이 출가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한다는 어머니 말을 듣지 말고 출가하라 권유해서, 미륵암에서 머리를 깎았던 동생은 그후, 내가 마흔살 쯤, 봉암사 주지로 있을 때, 인곡 스님 상좌가 되어 선학원에서 머물며 총무원의 일을 보다가,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불가와의 인연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미륵암에 있는데, 한 스님이 올라오셨다.
첫 눈에 기품이 확 느껴지는 게 여느 스님과 달라보였다.
곁에 있던 사람에게 누군가 물으니, ‘큰절 조실스님’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한국말을 알아듣는데 서툴렀던 나는 ‘조실’이란 뜻을 몰랐다.
그래서 물어보니, ‘모든 대중들을 가르치는 선지식’이라고 했다.
그날 범상치 않은 기품으로 다가왔던 그 선지식, 동산 스님은 훗날 나의 은사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그날 나를 반갑게 대하며, ‘범어사 큰절로 오라’고 했다.
그땐 알아듣지 못했으나, ‘왜 좋은 데를 놔두고 그곳에 박혀 있느냐’ 하는 뜻이 담긴 말씀이었다. 깊은 산속에 있으면서 아무 데도 안 가고 도를 통하리라는 생각으로 있던 나는, 그날 이후 큰절에 놀러도 가고 조실스님께 인사도 드리고 하며 지내다가, 한 해 후 사미계를 받게 되었다.
계를 지키는 중요한 목적이 ‘자기 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에 있음’을 겨우 알아갈 때였다.
행자생활을 그만 마치고 ‘계를 받아야 된다’고 하는데, 나는 ‘계’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궤’라고 알아들었다.
아니, 승려가 되는데, 왜 궤짝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 귀를 의심했다.
열여섯까지 일본에서 성장한 내가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해 치른 해프닝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 미륵암에 공비가 나타나서 그곳에 계속 있지 못하고, 해인사로 공부하러 갔을 때, ‘방부드리러 왔느냐’고 묻는데, 또 방부가 뭔지 몰라 ‘방부가 뭡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 스님 독살이하다가 왔구먼’ 하는데, 독살이라는 뜻을 알 리가 있는가. 나중에 들으니 일본 승려가 온 줄 알았다고 한다.
열여덟에 범어사 미륵암으로 출가해 열아홉에 범어사 큰절에서 사미계를 받고, 스무살에 해인사에서 《범망경》을 외우며 한철 준비 끝에 비구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진짜 승려가 된 것은 원적사에서였다.
미륵암에서 10년 공부하리라 마음먹은 것이 공비가 나타남으로 해서 깨지고, 그 후 해인사로 가면서 ‘10년 동안 틀림없이 도를 통할 것이며, 도를 통하면 팔만대장경을 내 손으로 번역해서 중생제도를 하겠다던 꿈도 6·25 전쟁으로 인하여 깨졌다.
다시 범어사로 피난을 와서 발심하고 있는데, 군대에 잡혀가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마음먹고 공부해야겠다’ 하고 간 곳이 원적사였고, 그곳에서 전심전력을 다해서,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공부해서 결정적인 힘을 얻었다.
마음 밝히는 일에 목숨을 걸어 정진했을 때, 진정한 승려가 되는 것이다.
내 나이 지금, 일흔셋. 출가한 지 쉰다섯해가 흘렀으나, 나는 처음 출가할 때의 마음과 조금도 변함없이 살고 있다.
아니, 그때보다 더 어린아이처럼 소견없이 살고 있다.
무엇에도 시달림이 없이 자유롭다.
음식을 스스로 먹는 일도 즐겁고, 연장을 가지고 물건을 고치는 일도 즐겁다.
무엇 하나 빨리 한 것이 없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든 ‘빨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공부하다가도 빨리 무너지고 만다.
공부는 차분히 공을 들이면서 해야 한다.
차분하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마음을 밝히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볼 줄 알고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알기 때문이다.
출가자는 마음을 밝히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길을 가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