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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의 사
로저 칠링워드라는 이름 뒤에는 본인이 다시는 남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심한 본명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독자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헤스터 프린이 수치를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던 군중들 틈에 여행이 지친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따뜻하고 안락한 가정을 꿈꾸며 위험한 황야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리던 그 여인이 죄악의 본보기로 뭇사람들 앞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얘기도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아내로서의 그녀의 면목은 숱한 사람들의 발 밑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불명예의 광장에 서 있던 이 여인을 둘러싸고 그녀에 대한 욕설이 빗발치듯했다. 이 소식을 친척들이나 순결하던 시절의 친구들이 듣는다면 그들도 이 불명에를 함께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불명예는 헤스터와의 관계가 친밀하고 순수한 사람일수록, 그가 받는 불명예의 정도는 크기 마련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과거에 이 타락한 여자와 관계가 친밀하고 순수했던 사람이라도 이런 달갑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겠다고 구태여 밝히고 나설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 사나이는 여자와 함께 수치스러운 자리에 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헤스터 프린 말고는 아무도 자신의 비밀을 모를 것이며, 그녀의 입을 열게 할 자물쇠와 열쇠는 그가 쥐고 있었으므로 인명부에서 자기의 이름을 말살시켜 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바닷속에 매장되었으리라는 그에 관한 소문대로, 옛 인간 관계나 이해 관계는 자신의 인생으로부터 완전히 증발시키기로 그는 작정하였다. 이 목적이 일단 달성되기만 하면, 그에 따른 새로운 이해관계와 목적이 곧 모리를 쳐들게 될 것이다. 하기야 그건 죄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음흉한 짓임엔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능력을 쏟을 만큼 어떤 중요한 목적임이 확실했다.
어쨌든 이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그는 로저 칠링워드라는 이름을 가지고 비상한 학문과 지식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로써 청교도 거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연구 덕분에 그는 상당히 폭넓은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의사라고 자칭하였고, 이곳 사람들로부터 진심으로 환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식민지에서 내과와 외과 기술에 통달한 의사는 여간해서 만나기 힘들었다. 아마도 의사들은 다른 이민들처럼 대서양 횡단을 결심하게 한 종교적 정열이 없었던 모양이다. 인체의 연구를 거듭하는 그들의 미묘한 고도의 능력이 물질 본위로 되어 버리고, 생명의 전부를 내포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복잡하고 섬세한 인테조직의 신비에 압도되어, 인간 존재에 대한 정신적인 관찰 능력을 상실케 되는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보스턴 시민의 건강은 교회 집사 겸 약제사인 한 노인이 감독 아래 놓여 있었는데, 이 사나이의 돈독한 신앙심과 훌륭한 태도는 의사의 면허장 이상으로 그 자격을 보증하는 증명서가 되고 있었다. 또 이 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외과 의사는 이따금 외과 의사로서의 훌륭한 기술을 발휘하곤 했지만, 평상시에는 면도질을 하는 것이 그의 본업이었다. 이런한 의업계에 나타난 로저 칠링워드는 실로 혜성과 같은 존재였다. 고대 의학에 능통한 숙련의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는 어떤 경우에든 다종다양한 성분을 골고루 섞어서 너무도 정성껏 조제했기 때문에 불로장생의 약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더구나 그는 인이언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야생 목초의 약효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이 의사가 자신의 환자들에게 서슴없이 말한 바에 의하면, 무지몽매한 야만인에겐 하늘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흔해빠진 약초는 수많은 명의들이 몇 백 년이나 걸려 정제한 유럽의 약제나 다름없이 믿을 만하다는 것이었다.
이 기묘한 학자는 적어도 외면적인 종교생활에 관한 한 흠잡을 데가 없었다. 보스터에 닿은 바로 뒤부터 그는 딤스데일 목사를 그이 정신적인 지도자로 모셨다. 이 젊은 종교가는 아지고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학자로서의 명성이 남아 있었다. 열렬한 숭배자들은 그를 하느님이 보낸 사도로 여겼으며, 그가 요절하지만 않는다면 과거의 교부들이 초기 기독교 교회를 위해 이룩한 것 만큼 위대한 업적을 아직 기반이 약한 뉴잉글랜드 교회를 위해 수행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즈음 딤스데일 목사의 건강 상태는 눈에 띄게 쇠약해져 갔다. 평소에 목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 목사의 볼이 창백해지는 것은 그가 지나체게 연구에 몰두하고 교구의 일을 너무 양심적으로 처리하는 데다 특히 세 속의 추악함으로 인해 정신적 등불이 흐려지거나 꺼지지 않도록 자주 단식이라든가 철야 기도를 실행하기 따문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딤스데일 목사가 죽게 된다면, 그것은 이 세상이 그의 발을 디딜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이에 대하여 본인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것은 자기가 지상에서 조그만 사명조차 이행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목사가 쇠약해지는 원인에 대해서는 이처럼 의견이 구구했지만, 그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몸은 몹시 수척했다. 목소리는 아직도 쟁쟁하고 부드러웠으마 거기엔 쇠퇴에 대한 음울한 예언 같은 것이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잘 놀랐으며, 뭔가 뜻밖의 일이 생기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고통스러운 듯 가슴에 손을 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젊은 목사의 건강 상태가 이같이 악화되어 여명 같은 그 생명의 빛이 경각에 달렸다고 여겨질 무렵 로저 칠링워드가 이 도시에 나타났던 것이다. 대체 그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이 사나이의 등장은 신비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제 유능한 의사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여느 사람의 눈에는 아무 값어치도 없어 보이는 약초나 들꽃을 수집하거나, 숲 속에서 나무뿌리를 캐거나, 나뭇가지를 꺽어 그 속에 숨어 있는 효험을 추출해 내는 비상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상의 업적이 신의 조화에 가깝다고 한 케넬름 다그비 같은 유명한 사람과도 서신 연락이며 교제가 있엇다는 말을 들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학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 왜 이런 황량한 땅으로 왔을까? 이런한 의문에 대해 답변이라도 하듯 점차로 퍼져가던 소문은 하느님이 훌륭한 기적을 내리시어 독일의 어느 대학으로부터 저 유명한 의학박사를 고스란히 공중으로 옮겨다 딤스데일 목사의 서재 문 앞에 내겨놓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하느님은 소위 기적적 중개라는 방법에 의하지 않고서도 능히 그 목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까지도 로저 칠링워드가 적절한 시기에 등장한 사실에는 하느님의 섭리를 결부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의사가 젊은 목사에게 강한 관심을 나타낸 일로 더 뚜렷한 뒷받침이 되었다.
그는 교구민의 한 사람으로서 목사에게 다가갔고, 이 소극적이고 다감한 경격의 소유자로부터 친구로서의 호의와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의사는 목사의 건강 상태에 몹시 놀랐으나, 열심히 치료하고 빨리 서두르면 회복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딤스데일 목사의 교구에 속해 있는 장로나 집다, 또는 부인네들,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미혼 여성 등 누구나가 의사의 솜씨를 시험할 겸 한 번 약을 써보라고 귀찮을 정도로 권유했다. 그러면 딤스데일 목사는 조용하게 그 간청을 무리치고 내게는 약 같은 게 필요 없소. 하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주 안식일이 올 때마다 그의 볼은 칭백하게 여위어 가고 음성은 전보다도 더 떨리게 되었다. 가슴에다 손을 얹는 일이 이젠 우연한 몸짓이라기보다 하나의 습관으로 변해 버렸는데, 어째서 목사는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목사의 직분에 싫증이 났단 말인가? 죽기를 원한단 말인가?
보스턴의 선배 목사나 교회 집사들은 이러한 의문을 딤스데일 목사에게 진지한 태도로 물었고, 하느님이 베푸시는 이렇게 뚜렷한 구원의 손길을 거절한다는 것은 죄라고까지 하였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목사는 마침내 의사에게 의논해 보겠노라고 그들에게 약속했다.
이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로저 칠링워드 노인에게 의사로서의 조언을 구하면서 딤스데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나의 일이나, 슬픔이나, 죄의 고통이 곧 내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 해도 나는 만족할 것입니다. 당신의 의술을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아도 세속적인 것은 묘에 묻힐 것이고, 정신적인 것은 나와 함께 내세에 가게 될 테니까요.
네. 로저 칠링워드는 일부러 그러는지 아니면 천성이 그런지 그의 언동은 언제나 조용했다.
젊은 목사시니까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죠. 젊은 분은 뿌리를 깊게 박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을 손쉽게 단념합니다! 이 지상을 하느님과 함께 걷고 게신 성자는 기쁘게 이 세상을 떠나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황금의 보도를 하느님과 함께 걷고 싶을 테지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가슴에 손을 얹은 젊은 목사의 이마에는 고통의 빛이 얼른 스쳐 지나갔다. 설령 내가 그러한 곳에서 산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차라리 이 세상에서 땀 흘리고 일하는 것에 만족할 것입니다.
훌륭한 분들은 언제나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법입니다. 하고 의사는 말했다.
이렇게 하여 의문의 인물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딤스데일 목사의 주치의가 되었다. 의사는 병의 증세에 흥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환자의 성격이나 특성도 연구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으므로 연령적으로 차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두사람은 차차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목사의 건강을 위해, 또한 의사가 병에 쓸 약초를 채집하기 위해, 두 사람은 해안이나 숲 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곤 했다. 때로는 파도가 속삭이며 부서지는 곳을, 때로는 나뭇가지 끝에서 바람이 엄숙한 찬미가를 부르는 곳을, 그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으며, 남의 이목을 피한 서로의 면학의 장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 과학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에 목사가 매력을 느낀 것은 그의 범상치 않게 깊고 넓은 지적 교양뿐만 아니라, 동료 목사 사이에선 찾아볼 수 없는 폭넓은 사상의 자유로움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한 특징을 의사에게서 발견했을 때 거의 충격적인 만큼 놀라움을 느꼈다. 딤스데일은 진정한 목사요, 진정한 죵교가였고,신을 섬기는 마음이 열렬하고, 신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으며, 시일이 가면 갈수록, 그 길을 보다 깊이 파고드는 그런 정신의 소유자였다. 어떠한 사회 상태에서도 그는 소위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지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기를 지탱해 줌과 아울러 무쇠틀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신앙의 무게를 신변에 느끼고 있는 것이 그의 평화를 위해선 절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지성의 소유자는 통하여 이 우주를 바라보는 즐거움은, 두서 없는 기쁨일망정 때때로 목사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갑자기 창문이 활짝 열리고, 지금까지 램프 불빛이나, 잘 들지 않는 광선 아래서, 책에서 풍겨 나오는 곰팡내에 섞이어 생명을 소모시키고만 있던 좁고 숨이 막힐 것 같은 방 안으로 자유로운 공기가 한꺼번에 흘러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공기는 너무도 신선하고 싸늘하여 오랫동안 그 속에서 편히 숨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에서 정통이라고 공인하는 범위 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로저 칠링워드는 환자를 세밀히 관찰했다. 일상적으로 친숙해진 사상이 영역 내에서 낯익은 길을 걷고 있을 때뿐 아니라, 색다른 정신 풍토 속에 던져졌을 때의 환자의 상태도 유심히 관찰하였다. 어쩌면 후자의 경우, 그의 내부에 숨어 있는 뭔가 새로운 것이 그의 성격 표면에 떠오를지도 몰랐다.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우선 그 사람에 대해 상세히 알아야 한다고 로저 칠링워드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인간의 감성과 지성은 그 육신의 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아더 딤스데일의 경우, 감수성과 상상력이 몹시 예민하고 또한 강렬했기 때문에, 그의 육신의 병은 그 감수성과 상상력 속에 원인이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 로저 칠링워드는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보물을 찾는 사람처럼 환자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어 그의 사상을 음미하고, 기억을 들여다보고, 모든 것을 조심스러운 손으로 더듬었다. 이와 같은 탐색을 행할 기회와 자유가 있고, 더구나 그것을 규명해 낼 만한 기술을 몸에 지닌 탐구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비밀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깊은 비밀을 간작하고 있는 사람은 이런 의사와 각별히 친숙해지는 것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령 두뇌가 명석하고,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갖추어져 있는 의사가 있다고 하자. 눈에 거슬리는 독선이나 불쾌하리만큼 눈에 띄는 버릇을 갖고 있지 않으며, 환자의 마음과 자기 마음을 완전히 일치시켜 환자가 머릿속으로 생각했었다고 기억하는 정도의 일조차 부지불식간에 털어놓게 할 수 있는 선천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또 무슨 말을 들어도 놀라거나, 동정의 말을 하기보다는 침묵을 지키며 숨소리나 짤막한 응수로써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음밀한 천성에 덧붙여 공인된 의사로서 역할이 가지는 이점까지 있다고 하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비밀로 얼어붙은 환자의 마음도 투명한 물처럼 흘러내려 모든 비밀을 백일하에 쏟아 놓게 되고 만다.
로저 칠링워드는 앞에서 말한 특징을 모두라고는 할 수 없어도 거의 대부분 갖춘 의사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두 뛰어난 정신 사이에는 일종의 친말한 관계가 생겨났다. 그래서 이 두 지성은 인간의 사상과 학문의 모든 영역에 걸쳐 서로 교류하였다.
그들은 공적인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나 의사가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비밀이 목사의 마음속에서 흘러나와 상대방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는 딤스데일 목사가 자신의 병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참으로 이상한 침묵이 아닌가!
그러나 얼마 뒤, 로저 칠링워드의 제안에 따라 딤스데일 목사 친구들의 주선으로 이 두사람은 한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생명의 조류가 금세 밀려 들었다 밀려가는 것 같은 목사의 건강 상태를 염려와 우정 어린 의사의 눈길이 늘 지켜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바람직한 일이 이루어지자 마을 전체가 기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젊은 목사의 건강뿐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권유한 대로 그의 영혼을 음모하는 꽃 같은 처녀들 중에서 한 사람 골라 아내로 삼는다면 그것은 더욱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아더 딤스데일을 설득하여도 이 일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전혀 실현될 가망이 없었다. 목사는 마치 독신 생활이 교회의 계율인 양 이런 권유는 모조리 거절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딤스데일 목사는 맛없는 남의 밥을 얻어 먹고, 남의 집 난롯가에서 몸을 녹이길 원하는 사람에게 따르게 마련인 춥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평생 자진해서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학식과 경험이 풍부하고 마음씨가 인자한 노의사는 젊은 목사에 대해 부성애와 경애의 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므로, 목사 곁에서 늘 돌보아 줄 인물로서는 가장 적임자로 생각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기거하게 된 새 집은 사회적으로 매우 명망있고 신앙심도 깊은 어떤 미앙인의 집이었는데, 그 집은 현재 유서깊은 킹스 교회 건물이 서 있는 대지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 쪽에는 본디 아이작 존슨의 땅이었던 묘지가 있어, 목사와 의사의 직업을 가진 두 사람에게는 진지한 사색에 잠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었다. 딤스데일 목사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훌륭한 미망인의 배려로 양지바른 바깥 방이 주어졌는데, 그 방엔 낮에도 햇볕을 가릴 수 있게끔 두터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벽에는 고블랭 지조라고 하는 벽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그 진위는 그만두고라도 그 벽걸이에는 다윗과 밧세바와 예언자 나단에 대한 성성 이야기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들은 아직 색이 바래지 않았고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의 모습은 예언자 나단 못지 않게 훌륭하였다. 창백한 안색의 목사는 이 방에다 자신의 장서들을 쌓아 올렸다 양피지로 장정한 초기 교회 교부들의 2절판 책들이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저술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자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방의 반대편 방에는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서재 겸 실험실을 차렸다. 현대 과학자들이 생각하기엔 몹시 빈약한 것이었지만, 증류 장치 하나와 약제 및 화학약품을 조제하는 기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연금술에 능한 그는 이런 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훌륭한 환경에서 각 방에 지라잡은 두 학자는 허물없이 상대방의 방을 드나들면서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서로의 일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딤스데일 목사의 통찰력이 예리한 친구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모든 일은 젊은 목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손길이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둬야 할 것은, 최근에 보스턴 시민의 일부에서는 딤스데일 목사와 기묘한 의사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별개의 의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식한 대중이 자기 눈으로만 사물을 보려 할 경우 대개는 잘못 보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이 역시 대중이 곧잘 하듯, 그들이 아주 따뜻한 마음의 직관에서 판단을 내릴 때에는 참으로 심오하고 그릇됨 없는 결론을 얻게 되며, 그것은 신기에 의해 명백해진 진리와 같은 성격을 띠는 일이 흔히 있는 법이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로저 칠링워드에 대한 일만 하더라도 그들 대중은 나름대로의 견해를 심중에 품고 있었으나 진지하게 반박할 만한 사실과 논리로 뒷받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30년쯤 전 토머스 오보베리 경의 살해 사건이 일어났던 무렵 런던에서 살았었다는 한 수직공 노인의 증언에 따르면, 지금은 생각이 잘 안나지만 어쨌든 이 노의사가 다른 이름으로, 오보베리 사건에 관련한 유명한 마술사 포먼 박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일이 있다고 한다. 또 이 의사가 인디언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마술로 기적적인 치료를 한다고 알려진 야만인 기도사에게 힘입어 의학상의 지식을 길렀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로저 칠링워드의 얼굴은 그가 보스턴에 살면서부터, 특히 딤스데일 목사와 동거하게 된 이후 부터 놀랄 만큼 변모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용하고 명상적이어서 그야말로 학자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지금은 젠엔 없던 추악한 표정이 얼굴에 엿보이며, 그것은 보면 볼수록 더욱 뚜렷하게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또 일편의 무지한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의사의 실험실 불은 땅 속에서 가져온, 지옥의 연료를 때는 거이어서, 의사의 얼굴이 연기에 그을려 검뿌예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는 시대의 기독교 세계든 특히 신성한 인물들에게 흔히 있는 일로써, 로저 칠링워드 노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악마나 악마의 사자가 아더 딤스데일 목사에게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악마의 사자는 하느님의 허락을 얻어 잠시 동안 그와 친분을 맺고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그를 파멸시키려 한다는 것이있다. 그러나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승리가 어느 쪽으로 기울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목사가 이 악마와의 싸움에서 틀림없이 이겨 결국은 영광에 휩싸인 신성한 모습으로 거듭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하기까지 겪어야 할 목사의 치명적인 고뇌를 생각하면 슬프기도 했다.
아아! 가엾은 목사의 눈 속에 깃든 공포의 검은 그림자는 그 싸움이 치열한 것임을 말해 주는 듯했고, 승리의 행방도 또한 모호함을 암시해 주는 듯했다.
10.의사와 환자
로저 칠링워드 노인은 평생을 통해 비록 그 성질이 온화하고 따뜻하지는 않았으나 친절하였고, 세상과의 교섭에 있어서도 항상 순수하고 정직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탐색에 착수한 것이다.
본인도 믿고 있듯이 오직 진실만을 탐구해 가는 그의 태도는 재판관처럼 엄정하고 중립적인 성실함을 지니고 있어 마치 인간적인 정열이나 자기에게 가해진 피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공간에 그린 선이나 도형같은 기하학의 문제를 다루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차차 깊이 파고들어감에 따라 조용하면서도 맹렬한 어떤 필연성이 무서운 매력을 가지고 노인을 사로잡고 말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이 명하는 바를 달성할 때까지는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노인은 노다지를 찾는 탐광자처럼 이 불쌍한 목사의 가슴속을 파헤쳤다. 시체의 가슴에 달린 보석을 찾으려고 무덤을 파헤쳤으나 다만 썩어가는 주검만을 발견할 뿐인 묘지에서 일하는 인부의 모습과 흡사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노인이 찾고 있던 것이 그와 같은 것이었다면 아아, 그 영혼이야말로 불쌍하다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이따금 의사의 눈이 광채를 발하는 때가 있었다. 그 파랗고 불길하게 타오르는 눈빛은 용광로에서 반사하는 불빛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번연히 그림 속에 나오는 산중턱에 있는 무서운 문으로부터 터져나와 순례자들의 얼굴을 비친 그 기분나쯘 불빛과도 비슷했다. 이 음험한 광부가 파헤치고 있던 땅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어떤 조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때면 의사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은 남이 보기에는 순수하고 정신적인 인간으로 보이지만, 아버지나 어머니 중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강렬한 동물적 기질을 물려 받았어. 이에 대해 좀더 알아보기로 하자!
이처럼 의사는 목사의 어두운 내면을 오랫동안 탐색했지만, 그가 파헤친 수많은 귀중한 자료는 인류의 행복에 대한 높은 이상이나 따뜻한 인간에, 순수한 감정과 타고난 신앙심 등 사색과 연구에 의해 강화되고 계시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값비싼 황금도 이 추적자에게는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실망하고 돌아서서 또 다른 방향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주의를 살피면서 살그머니 더듬어 갔다. 마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보물을 훔치려고 주인이 잠들어 있는, 아니 어쩌면 완전히 깨어 있는지도 모르는 방으로 몰래 들어가는 도둑과 같은 꼴이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마루청이 삐걱대고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곳까지 다가섰기 때문에 그의 그림자가 상대방의 얼굴 위를 가리기도 했다. 다시 말하자면 과민한 신경의 소유자인 딤스데일 목사는 정신적 직관에 의해, 막연하나마 무언가 자기의 평화를 깨뜨리는 적의를 품은 존재가 무리하게 자기 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도 직관적인 지각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목사가 깜짝 놀란 듯한 시선으로 쳐다보면 의사는 사려깊고 동정심은 많으나 결코 간섭하는 일 없는 친구와 같이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태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병든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듯이 늘 모든 인간에 대해 의심을 품는 일만 없었더라면, 딤스데일 목사는 이 의사의 성격을 좀더 완전히 간파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도 친구로서 믿지 않았기에 막상 실제로 적이 나타났을 떄도 그것이 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목사는 여전히 늙은 의사와 친교를 계속하였고, 매일처럼 서재로 그르 불러들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실험실으 방문하여, 잡초가 효력 있는 약으로 변하는 과정을 구경하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목사는 묘지가 내다보이는 활짝 열린 창문턱에 팔꿈치를 댄 채 손으로 이마를 짚은 자세로 로저 칠링워드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인은 지저분한 풀다발을 조사하고 있었다.
선생님. 목사는 그 풀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근래에는 사람이고 물건이고 정면으로 보지 않는 것이 목사의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어디서 이렇게 검고 축 늘어진 약초를 수집하셨습니까?
바로 저 묘지에서 뜯었습니다. 의사는 일손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처음 보는 풀입니다. 비석도, 죽은 자에 대한 기록도, 아무것도 없는 무덤 위에 나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흉측한 잡초만이 죽은 자를 기년하듯 나 있더군요. 그 죽은 자의 심장에서 돋아난 것일 겝니다. 살아 잇는 동안 고백했더라면 좋았을 어떤 무서운 비밀을 숨긴 채 묻혔기 때문에 그 비밀이 이런 모양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죠.
그 사람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지만, 할 수 없었던 게죠. 하고 목사는 말했다.
왜 그럴까요? 의사가 반문했다. 왜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요? 모든 죄의 고백을 요구하는 자연의 힘은 아주 대단한 것이어서, 보다시피 파묻힌 사람의 심장에서 검은 잡초가 돋아 나와, 말없이 죽은 고인의 죄를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선생님의 공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사는 대답했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묻힌 비밀을 말이나 상징 등으로 폭로하는 힘은 하느님의 자비심밖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은 이 세상 속에 숨겨진 모든 것이 폭로되는 날까지 계속 비밀을 지키려고 고집할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거나 해석한 바로는, 설령 그날이 되어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이 폭로되더라도 그것이 인과응보의 결과라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아무래도 천박한 생각이죠. 이렇게 비밀이 밝혀지는 것은 이 세상의 어두운 문제가 명백해지는 것을 보고자 기다리던 지적인 사람들에게 지적인 만족을 주기 위하여 마련된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리 잘못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일 것입니다. 지금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비참한 비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인간은 그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주저하기는커녕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고 그 비밀을 고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세상에서 그 비밀을 털어 놓지 못할까요? 로저 칠링워드는 목사를 너지시 곁눈질하며 물었다. 왜 죄인은 그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좀더 빨리 자기 것으로 하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물리칠 수 없는 고통의 발작으로 괴로운 듯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실은 많은 불쌍한 영혼등이 임종의 자리에서뿐 아니라, 원기왕성하고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시절에도 내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난 다음 죄지은 그들이 얼마나 안도의 표정을 짓는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의 부패한 숨결에 질식할 것 같다가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게 된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가령 살인을 범한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도 마음속에 시체를 묻어 두기 보다 당장에 밖으로 내던져 우주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겠죠!
그러나 비밀을 가슴속에 그대로 묻어 두려는 사람도 있지요. 의사는 조용하게 말했다.
하긴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좀더 명백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타고난 성질 때문에 침묵을 지키는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죄는 비록 졌지만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아 사람들 앞에서 추악하고 흉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선행을 할 수도 없게 되고, 보다 현실적인 봉사를 함으로써 과거의 악행을 속죄할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마치 흰 눈처럼 순결한 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마음속에는 좀처럼 지울 수 없는 죄악이 시커멓게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저 칠링워드의 말은 여느때와 달리 힘차게 들렸다. 그는 집게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며 말을 계속했다. 그런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치욕을 마주 대하는 일이 두려운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든가,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열성이라든가-그런 깨끗한 충동과, 한 번 범한 죄가 문을 열고 불러들인 나쁜 종자를 번식시키는 사악한 충동이 그자들의 마음속에 공존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자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찬양하고 싶다 하더라도 그 더러운 손을 천국 쪽으로 쳐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동포에게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 우선 겸손한 태도로 죄를 회개함으로써, 양심의 힘과 존재를 명백하게 하는 일부터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참으로 현명하고 경건한 당신이지만, 설마 기만과 허위가 하느님의 진리보다도 더 훌륭하고, 또한 그것이 하느님의 영광이나 인간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나에게 믿게 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그런 자들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젊은 목사는 무슨 당치 않은 얘기를 가로막듯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목사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자기 성격을 자극하는 그런 화제를 잘 회피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나의 쇠약해진 몸이 선생의 친절한 간호로 부슨 효험이라도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로저 칠링워드가 채 대답도 하기 전에 어린아이의 맑고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 소리가 이웃 묘지 근처에서 들려 왔다. 열어젖힌 창문으로 -여름철이 되었다-목사가 무심코 내다보니 헤스터 프린과 딸 펄이 묘지를 가로지른 오솔길을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펄은 눈부신 태양처럼 아름다웠으나 그 심술궂으면서도 쾌활한 기분에 넘쳐 있었다. 이런 때의 펄은 동정이라든가 인간적인 접촉이 있는 세계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마침 그 아이는 무엄하게도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위인의 무덤으로 보이는 넓고 평평한 가문이 박혀 있는 묘석이 있는 곳에 이르자, 그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좀더 얌전하게 굴라고 타이르는 어머니의 말에 펄은 춤을 멈추었지만, 그대신 그 무덤 옆에 있는 커다란 우방초에서 뾰적한 가시를 따 모으기 시작했다. 손에 잔뜩 모아지자 펄은 그것을 어머니의 가슴에 붙어 있는 주홍 글씨의 선을 따라 붙였는데 그 가시는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헤스터도 굳이 떼려고 하지 않았다.
로저 칠링워드는 창가로 와서 침울한 웃음을 띠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법률이나, 권위에 대한 존경심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간의 관습이나 의견에 대한 관심도 저 아이의 성질에는 하나도 섞여 있는 거이 없단 말이야. 의사는 혼잣말도 아니고 상대방에게 하는 말도 아닌 투로 말했다. 요전에는 저애가 스프링레인의 가축용 물통이 있는 곳에서 총독 각하에게 물을 끼얹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 아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 애도 애정이라는 걸 지녔을까요? 저 애 속에 뭔가 뚜렷한 존재 원칙이라도 갖추어져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법을 파괴한 뒤에 오는 자유뿐입니다. 딤스데일 목사의 대답은 조용했다. 이 문제를 줄곧 생각해 온 것 같은 태도였다. 선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펄은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심술궂긴 했으나, 명랑함과 총명함이 가득한 미소를 띠고 창문 쪽을 올려다보더니 딤스데일 목사를 향해 가시를 하나 집어 던졌다. 예민한 목사는 깜짝 놀라 날아오는 가시를 피했다. 이렇게 당황하는 목사의 모습을 보자 펄은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헤스터 프린도 무의식중에 눈을 들었다. 이 네 명의 남녀노소는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아이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소리쳤다.
도망가야 해, 엄마! 도망가지 않으면 저기 있는 악마에게 붙잡혀! 벌써 목사님은 붙잡혔단 말이야. 도망가, 엄마. 붙잡힌단 말이야! 하지만 난 문제없어!
이렇게 말하면서 펄은 어머니의 손을 잡아 끌고 갔다. 무덤 사이를 뛰고 춤추며 깡총거리면서 가는 모습은 거기 묻혀 있는 과거의 세대와는 아무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을 가지지 않은 아이 같았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색다른 요소로 만들어진 아이여서 제멋대로 살아가도록 놓아 둘 수밖에 없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칙일 수밖에 없으며, 그녀의 괴팍한 성격도 죄악으로 간주되지 않는 그런 아이 같았다.
잠시 뒤에 로저 칠링워드가 말했다.
저기 가는 저 여자는 그 죄과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방금 전 목사님께서 큰 고통이라고 말씀하신 그런 숨은 죄악의 비밀은 전혀 없을 겝니다. 헤스터 프린의 불행은 가슴에 주홍 글씨를 달고 있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믿습니다. 하고 목사는 대답했다. 그러나 저 여자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는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여자의 얼굴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의 빛이 엿보였으니까요.
그러나 죄를 숨기고 괴로워하는 인간보다는 저 불쌍한 헤스터처럼 그 고통을 나타내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잠시 말이 끊어졌다. 의사는 수집해 온 약초를 다시 조사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 당신의 건강에 대한 진단을 물으셨지요.
마침내 의사가 입을 열었다.
네. 하고 목사는 대답했다. 꼭 알고 싶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죽든 살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의사는 여전히 약초를 뒤적이는 반면, 유심히 목사를 살피며 말했다. 목사님 병은 좀 이상한 병입니다. 적어도 내가 관찰한 증세로 본다면, 그 병 자체나 또는 겉으로 봐서는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 벌써 여러 달 동안 목사님을 모시고 매일 진찰하며 증세를 주의하여 보살펴 왔습니다. 목사님이 중병환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경험 많고 조심성 많은 의사라면 불치의 병이라고 포기할 만큼 중태는 아닙니다. 그러나 뭐라고 할까요?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병입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군요.
창백한 목사는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럼 더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의사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한 가지 묻겠습니다. 혹 실레가 된다면 용서를 바랍니다. 친구로서-하느님의 뜻을 받아 목사님의 생명과 건강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묻겠는데, 목사님은 병환의 모든 중세를 숨기기 않고 나에게 말해 주신 겁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사는 말했다. 어린아이 장난도 아닌데 의사를 청해 놓고 병사를 청해 놓고 병 증세를 숨기다니요.
그럼 내게 모든 것을 다 말씀했다는 건가요? 로저 칠링워드는 강렬하고 지성이 집중된 번쩍이는 눈으로 목사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해 둡시다! 그러나 말입니다. 외면적인 증세를 말해 보았댔자 의사는 고쳐야 할 병의 중요한 증세를 반밖에 모르기 쉽습니다. 육체의 병이 병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실 정신적 병의 한 증세에 불과한 경우도 있습니다.
내 말이 조금이라도 목사님의 비위에 그슬린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정신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육체가 그 정신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소위 몸과 마음이 혼연 일체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그 이상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조금 당황하듯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선생은 영혼을 고치기 위한 약의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로저 칠링워드도 일어났다. 작달막하고 보기 흉한 불구의 몸으로, 볼까지 창백해진 목사와 마주 서더니 상대방이 말을 가로막은 일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전과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정신에 어떤 병이 생기면 삽시간에 육체에 상응한 형태가 나타나는 겁니다.
육체의 병을 의사가 고쳐 주기를 바라신다면 그때는 우선 의사에게 영혼 속의 상처나 괴로움을 털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로서는 손 쓸 도리가 없으니까요.
거절합니다, 당신에겐! 이 지상의 의사에게는 거절합니다! 딤스데일 목사는 격렬하게 외치며, 이글거리는 눈을 부릅뜨고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노려보았다. 당신에게는 싫습니다!
만일 내 병이 영혼의 병이라면 나는 영혼을 고쳐 줄 단 한 분의 의사에게 몸을 맡기겠습니다!
고치든 죽이든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 문제에 참견을 하다니!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끼어들다니!
미친 듯한 기세로 목사는 방을 뛰쳐나갔다.
야릇한 미소를 띠고 목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저 칠링워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야. 아무것도 잘못된 일은 없어! 곧 화해하게 되겠지.
그러니까 저 사람은 격정에 사로잡히면 본심을 털어놓는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다른 일에도 똑같은 격정적인 행동을 했을 게 아닌가! 저 경건한 목사인 체하는 딤스데일 선생도 마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한때 부당한 짓을 저지른 것일게다.
두 사람 사이에 전과 같은 우정을 되살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젊은 목사는 몇 시간 혼자 있는 동안에 자신이 그토록 몰골 사납게 흥분한 것은 신경이 어떻게 된 탓인지, 의사의 말에는 그토록 흥분시킬 만한 아무런 구실도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의사로선 당연할 뿐 아니라 목사의 청에 의해 충고를 말했을 뿐인데, 그 친절한 노인을 그렇게 심하게 물리치다니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후회를 하게 된 목사는 곧 의사에게 사과를 했고, 건강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날까지 생명을 연장시켜 준 방법대로 치료를 계속해 주기를 부탁했다. 로저 칠링워드는 이를 쾌히 응낙했다. 그는 성심성의껏 돌보기는 했으나, 진찰이 끝나 환자 방을 나올 때는 늘 입가에 까닭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표정은 딤스데일 목사 앞에서는 볼 수 없었으나 의사가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확실히 눈에 띄게 나타났다.
참 이상한 병이군! 의사는 중얼거렸다. 좀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정신과 육체 사이에 기묘한 연결이 있어! 의학을 위해서도 이병은 철저히 규명해 봐야겠군!
앞서 말한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딤스데일 목사는 대낮에 의자에 앉은 채로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펴놓은 커다란 고딕 활자의 책은 문학 작품으로선 독자에게 잠을 오게 하는 그런 부류의 대작이었던 모양이다. 목사는 여느때에 늘 나뭇가지 위를 뛰어 다니는 작은 새처럼 가볍고 침착성이 없어 금방 놀라 도망칠 것 같은 선잠을 잤으므로 이처럼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정신이 전에 없이 자기 껍질 속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로저 칠링워드 노인이 별로 조심하는 일 없이 방으로 들으갔는데도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곧장 환자 앞으로 가서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여태까지 의사에게도 보인 일이 없는 앞가슴의 옷을 풀어젖혀 버렸다.
이때 딤스데일 목사는 몸을 떨며 조금 움직였다.
의사는 잠시 멈칫하였으나 곧 방을 나갔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 로저 칠링워드의 표정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거칠게 일그러졌다. 그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모습은 눈과 입으로만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강렬하게, 그 흉측한 몸 전체로부터 터져나왔다. 힘껏 천장을 향하여 팔을 휘두르기도 하고, 마룻바닥을 발로 구르기도 하며 환희의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기쁨으로 날뛰는 순간에 로저 칠링워드 노인을 본 이가 있었다면, 고귀한 인간의 영혼이 천국에서 쫓겨나 지옥으로 끌려들어 갔을 때 악마가 어떠한 표정을 짓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광희와 다른 점은 의사의 광희 속에 놀라움과 호기심의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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