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김재훈
가끔 지나온 삶의 자취를 돌아보며 추억에 잠길 때가 있다. 지난 일이라고 다 아름답기야 할까마는 아련한 추억 속을 헤매다 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실로 오랜만에 하와이를 다시 가게 되었다. 30대 중반에 직장 일로 그 곳에서 연수를 한 적이 있다.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만 해도 앞으로 종종 하와이를 찾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살다보니 마음과 달리 쉽지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언 20년이나 흘렀다.
호놀루루 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있자 눈은 벌써 저 아래 드넓은 바다 가운데 있을 하와이군도(群島)를 찾기에 바쁘다. 얼마나 변했을까?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지났으니 많이 변했을 것이다. 자주 찾던 거리, 가끔 들르던 쇼핑센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헤엄치던 바닷가도 몰라보게 달라졌으리라. 어서 보고 싶은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와 보니 동행한 L형 친척이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그 분의 집에서 묵기로 한 것이다. 마침 집이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 고즈넉한 언덕배기라 한눈에 널리 조망할 수 있어 좋았다. 짐을 풀고 먼저 관광계획부터 세웠다. 도로망이 그리 복잡하지 않은 곳이니 승용차를 빌리면 우리끼리 어렵지 않게 관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날부터 우리 두 부부는 오아후 섬의 유명 관광지를 두루 찾아 다녔다. 울창한 열대 숲과 낭만적인 해변이 곳곳에 있는 오아후 섬은 가는 곳마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다. 여행객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어디서나 느긋해 보인다.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우리나라를 생각하니 이곳이 한편 부럽기도 하다. 올 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가는 곳마다 그리 낯설지도 않았다. 가운데가 움푹 파인 다이아몬드헤드 화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다를 끼고 누워있는 황소 같은 자태가 여전하고,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여러 해변도 옛날이나 다를 바 없다. 도심의 빌딩들마저 낯익어 보이는 것이 많다. 한동안 잊었던 옛 친구를 만난 듯, 친숙하게 다가오는 도시가 반갑다. 변한 것은 하와이가 아니라 오히려 흰 서리가 내린 내 머리다.
며칠 동안 유명 관광지를 대충 돌고 나니 예전에 연수를 받던 하와이대학교가 궁금해서 방문해 보기로 했다. 그 곳의 기숙사는 전에 체류하는 동안 내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차가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학교 건물과 푸른 잔디의 교정이 나를 반가이 맞아준다. 도서관도, 극장도, 문화센터 건물도, 심지어 우람한 나무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교정 안을 오랜만에 걸으니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다. 강의실을 오가던 기억, 정다웠던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온다.
어느새 교정 한편에 있는 기숙사 쪽으로 발길이 옮겨갔다. 연수 시절, 저녁이면 새처럼 깃들어 이국의 쓸쓸함을 달래던 곳이다. 내 방엔 지금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지금도 예전처럼 중앙의 넓은 홀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TV도 보고 즐거운 대화도 나누고 있을까?
기숙사 앞뜰에서 먼저 만난 것은 뜻하지 않게 검은 고양이다. 이놈은 웬 이상한 사람이 자기에게 접근하는가 싶은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슬렁어슬렁 자리를 옮겼다. 기숙사 건물 가까이 좀 더 다가가는 순간 나는 그만 아연해졌다. 문이 그냥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완전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허름해진 건물, 지붕 위에 듬성듬성 돋아난 잡초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아름드리 큰 나무가 있던 내 방의 뒤뜰에도 가 보았지만, 거기도 여러 마리의 고양이가 잡초 무성한 나무 그늘에서 떼 지어 놀고 있을 뿐이다. 이럴 수가!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등을 타고 내려왔다.
저 곳이 내가 그리던 그곳이란 말인가. 여러 나라에서 온 벗들과 어울려 대화도 많이 나누고 파티도 종종 열곤 했었는데, 한때 내 희망이 푸릇푸릇 자라던 이곳이 유령의 집처럼 변해버리다니, 허망함과 쓸쓸함이 엄습해왔다. 집이 곧 헐릴 것을 생각하니 막이 내린 무대 위에 나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은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한 가지도 없는 법, 한 번 세상에 나와 제 할 일을 다 하고 사라지는 것은 차라리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저 집도 제 역할을 다 마쳤기에 이젠 때가 되어 사라지고 있을 뿐이라고 애써 위로해 본다. 그래도, 돌아서 오는 발걸음이 가볍지가 않다. 내 삶도 언젠가는 저처럼 빛이 바래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교정의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맑은 하루를 접는 서편 하늘에 석양이 곱다. 추억이여, 무엇을 원하는가. 돌아다보는 길이 더 아름다운 것, 이곳은 차라리 첫사랑처럼 가슴 한 곳에 묻어두고 가끔 꺼내보는 그리움일 걸 그랬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