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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의 후예 몽골, 초원의 빛과 그림자/전성훈
몽골,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이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에 제국을 건설한 나라,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나라, 그러나 지금은 국력이 약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일깨우는 나라, 몽골로 간다.
9월 11일(수) 맑음
몽골로 가는 길, 추석 연휴를 앞두고 손녀와 손자 돌보는 일을 아들 부부에게 맡기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3박5일 짧은 일정의 몽골 여행을 떠났다. 수락산 공항터미널에 도착하자 공항버스가 떠나려고 하여 운 좋게 버스에 올랐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니 지난 3월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 온 이후 6개월이 지난 여정이었다. 인천공항 2터미널에는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콩나물시루처럼 돗데기시장은 아니었다. 여행사 담당자에게서 여권과 전자항공권 발행 확인서를 받은 후 접수창구에서 항공 티켓을 받고 짐을 부쳤다. 항공사직원이 내가 ‘모닝캄’회원이 되었다면서 대한항공 라운지 이용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일반 대합실에서 기다리지 않고 라운지에서 편하게 음료수를 마시고 음식을 먹으면서 비행기 탑승 수속할 때까지 가져간 시집을 읽었다.
여객기는 한 치의 오치도 없이 비행 스케줄대로 한밤중에 몽골 울란바토르 징기스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국제공항이지만 규모가 작았다. 징기스칸(CHINGGIS KHAAN)공항의 입국심사 담당자의 무표정한 모습에 비하여 입국수속은 간단히 끝났다. 몽골 수도 울란바트르(ULAANBAATAR)는 ‘붉은 영웅들’이라는 뜻임을 그때 알았다. 우리에게 몽고반점이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몽골사람들은 비슷하게 생겼지만 금방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얼굴 윤곽에서 확연히 표시가 나듯이 몽골사람들은 우리보다는 얼굴 생김새가 오밀조밀하지 못하다. 서양 사람들 눈에는 우리나라 사람, 중국인, 일본인, 몽골인의 차이가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하다. 현지 가이드는 몽고 태생으로 우리나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녀서 우리말이 매우 능숙하다. 공항에서 울란바트르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자유의 다리’를 지났다. 도로 왼쪽 커다란 굴뚝에 불빛이 찬란하기에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화력발전소라며, 몽골은 수력발전소가 없고 모두 화력발전소라서 도심 매연이 심하여 공기가 나쁘다고 했다. 우리나라 서울도 1982년 까지 당인리 화력발전소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숙소인 노보텔 울란바트르 호텔은 상당히 깨끗하여 마음에 들었고 호텔 어디서나 패스워드 없이 와이파이 수신 상태가 좋았다. 유럽의 선진국에서도 와이파이는 항상 문제였는데 몽골 호텔의 와이파이 수준이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9월 12일(목) 비 그리고 갬
미니 고비사막과 게르(GER)를 만나는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몽골은 1년 강우량이 평균 200~250mm 정도인데 올해는 기상 이변으로 비가 자주 내렸다고 한다. 비가 적은 고장이라서 비를 몰고 오는 손님은 귀한 손님으로 여기며, 웬만큼 비가 많이 내리지 않으면 우산을 받지 않고 그냥 맞고 다닌다고 한다.
몽골의 첫 번째 일정은 고비사막을 닮았다고 해서 미니 고비사막이라 불리는 곳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곳에서 낙타 체험을 한다. 울란바트로에서 미니 고비 사막까지 자동차로 여섯 시간 정도 가야 하니까 서울에서 부산만큼 거리이다.
숙소를 벗어나 울란바토르 시내를 지나며 보니까 간판 글자가 간혹 영어도 있지만 대부분 러시아 문자이다. 몽골 문자를 해독할 줄 아는 국민들이 많지 않아 대부분 러시아 문자를 사용한다고 한다. 몽골이 중국 청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할 때 러시아의 지원과 도움이 절대적이어서 공산체제를 도입하면서 러시아 문자를 빌려서 쓴다. 길거리에는 코스모스가 아름답게 피었다. 몽골에서는 원래 코스모스를 심지 않았다. 음식점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음식점 주위에 코스모스를 심었는데 한들한들 아름답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본 몽골 사람들이 그때부터 코스모스를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몇 시간을 달려 간이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외여행을 꽤 했지만 차가운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울란바토르 시내를 벗어나 인가가 거의 없는 목초지를 지나는 왕복2차선 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음식을 먹을 만한 마땅한 휴게소가 없어 도시락을 준비했다고 하였다.
[ 초원의 길 ]
창조주의 선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초지에 생명수를 뿌려주니
민둥산인줄 알았던 야산 초지는 생명을 잉태하여 꿈틀거린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목초지 이곳저곳 유목민의 게르가 둥지를 틀고
방목하는 소떼와 양떼 그리고 말들이 한가로이 놀며 배를 불린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몰려가는 하늘아래 이 세상은 넓고도 넓어
마음을 열고 인간과 자연을 바라보며 광활한 이 길을 걷고 싶다
오후 5시 경에 미니 고비사막에 도착하여 생전 처음 쌍봉낙타를 탔다. 낙타 등허리에 올라 낙타 봉을 잡으니 낙타가 걸을 때마다 내 몸도 따라서 움직였다. 몸을 의지할 만한 도구가 없어서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낙타가 천천히 움직였고 혹시 떨어지더라도 고운 모래사막이라 크게 다칠 것 같지 않았다.
[ 쌍봉낙타 ]
하늘아래 땅이 있는지 땅위에 하늘이 있는지
구름 그림자가 땅에 어리고 땅은 하늘과 맞닿았네
고비사막을 닮은 작은 고비에는 곱디고운 모래가 수를 놓고
등허리에 커다란 혹이 산봉우리처럼 불쑥 솟아오른 쌍봉낙타는
낯가리는 이국여인을 등에 태우고 모래사막으로 산책을 하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허리는 구름 그림자에 가리어 어두워지고
짬짬이 부는 바람은 곧 추운 계절이 다가옴을 알려주네
낙타를 타고 사막 길을 걸었던 옛사람은 어디로 가고
사하라사막을 횡단하던 배두인 상인은 어디에 있으며
불시착 비행기에서 내린 ‘생텍쥐페리’는 어디에 숨었을까
낙타 체험을 마치고 게르(GER)가있는 BONAN GORI로 이동하였다. 오후 8시가 되어도 하룻밤 묵는 게르에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고 난로에도 불을 피우지 않았다. 게르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으며 집에서 가져간 소주 한 병을 마셨다. 밤 9시가 넘어 난로에 불을 지펴주었다. 술기운에 잠을 청하여 두어 시간 자고 나서 추위 때문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하늘이 목초지 지평선과 맞닿은 때문인지 몽골의 하늘은 서울의 하늘보다 땅에 더 가깝게 느꼈다. 몽골의 추석 보름달은 서울의 한가위 보름달보다 더 크게 보였다. 사방이 확 트인 초원에서는 하늘과 땅이 먼 친척이 아니라 이웃사촌 같았다. 손을 뻗으면 손끝에 하늘이 닿을 듯하고 팔을 벌려 보름달을 잡으려하니 보름달이 생긋 웃으며 날 잡아봐라 하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밤하늘의 별빛은 달님의 미소에 부끄러워 그 모습을 감추고 찬란한 영화를 간직한 북극성, 카시오페아, 북두칠성만 보였다. 세월을 거꾸로 돌려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온통 깜깜한 세상에 영롱한 밤하늘 별빛이 가난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쳐줄 텐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시 한 수 적는다.
[ 게르 마을의 밤하늘 ]
노을 지는 하늘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감싸고 구름은 한가로이 걷고
스산한 바람은 가을을 부르는데 목초지 풀들은 푸릇푸릇 돋아나
소떼와 양떼와 염소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노는 게르 마을
게르의 둥그런 지붕 꼭대기 반쯤 접어올린 틈새로 햇빛이 쏟아지고
햇님이 산허리에 숨어 보란고리 마을에 달님과 함께 저녁이 찾아오면
몸과 마음을 의탁할 게르에 어둠이 무르익어 전깃불이 들어온다네
긴 세월 만날 수 없던 잃어버린 별빛을 찾아온 몽골 게르 마을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 목청껏 소리쳐 부르던 그날처럼
밤하늘 한 줄기 별똥처럼 사라져버린 영혼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게르에 자가발전 전기가 들어오고 드디어 난로에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니 추위 속에서 덜덜 떨던 몸이 녹는다. 추위를 몹시 타는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난로불이 반갑다. 불꽃을 튕기며 타오르는 난로위에 오징어나 고구마를 올려놓는다면 얼마나 신명나고 낭만적일까. 노릇노릇 구워진 군고구마를 껍질 채 한 입 베어 물고 웃음 짓던 어린 시절이 저절로 생각난다.
9월 13일(금) 맑음
몇 번씩 깨어 시간을 보니 아직도 한밤중이다. 별을 보고 싶어 게르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하늘은 검은 구름에 덮혀 있다. 고개를 들어 별을 찾아보니 희미한 별빛만 보인다. 하늘 창공에는 무수한 별들이 합창을 하며 신나게 노래를 할 텐데 견우와 직녀는 어디로 가고 큰곰자리와 사자자리는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별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제멋대로 지구를 파괴시킨 인간의 업보가 아닌지 모르겠다. 경험삼아 게르에서 하룻밤은 견딜 만하다. 그러나 이틀을 지내라고 하면 고통이자 체벌이다. 게르에는 1인용 침대 네 개, 난로와 간이 식탁이 있다. 난로에 불을 지피면 따뜻한 온기로 게르 안이 훈훈하지만 난로 불이 꺼지면 냉골이어서 너무 춥다. 몽골사람은 잠들기 전에 난로를 피우고 장작이 다 타면 난로가 꺼친 채 잠을 자다가 새벽녘에 다시 난로에 불을 지핀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묵은 게르의 난로에 불을 피워주는 몽골여인은 종이 박스를 잘게 찢어서 성냥으로 불을 피우고 장작에 불을 붙이는 솜씨가 기막히다.
[ 게르의 난로 ]
휘영청 밝은 몽골 한가위 보름달 새벽녘 찬 기운이 뼛속을 파고들어
잠을 이루지 못해 붉어진 눈을 살포시 뜨니 난로 불씨가 죽어가네
자리에서 일어나 난로에 장작을 넣고 부채질을 해도 소용이 없고
한 번 사그라진 불꽃은 쇠약한 내 몸처럼 다시는 일어설 줄 모르니
차디찬 공기에 숨죽인 채 게르 안에서 긴 긴 밤을 어찌 밝혀야 하나
다음 날 간소한 아침을 마치고 게르를 벗어나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자동차로 몇 시간을 달려 몽골 마지막 황제의 어의였으며 독립유공자인 ‘이태준’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을 찾았다. 연희전문 의사 출신인 이태준 선생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이태준 선생 묘소를 본 후 몽골 독립기념탑을 찾았다. 독립기념탑에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 독일과 싸운 몽골사람들의 독립 전쟁이 조각이 있는데 일장기와 나치 깃발을 짓밟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몽골이 세웠던 원나라는 중국 한족이 세운 명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지배당하고, 청나라가 서구제국주의 세력과 한족의 도전으로 멸망하고 러시아의 군사적 경제적 도움으로 독립을 할 때 몽골 영토의 일부였던 바이칼호수를 러시아에 양도하였다고 했다. 해질 무렵 승마 체험장을 찾았다. 말을 처음 타기에 말 등에 올라타니 조금은 설렜다. 기수가 말코두레 끈을 끌어 안전하지만 신경이 쓰였다. 말에서 내리니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뻐근했다. 하룻밤 묵은 레드록스 리조트는 시설이 좋았다. 저녁은 야채를 넣고 푹 삶은 양고기 찜이었다. 처음 먹어 본 양고기 찜은 맛이 괜찮았다. 이틀간 와이파이가 두절된 상태였다가 레드록스 리조트에서 확인하니 카톡에 추석 명절 인사가 수도 없었다. 인사말 대신 대부분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똑같은 이모티콘을 몇 개나 받아 감흥은 별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두 줄의 짧은 글조차 쓰는 일이 사라져가는 세태가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9월 14일(토) 맑음
지난밤엔 몽골산 보드카 징키스칸을 마신 덕분에 푹 잘 잤다. 새벽에 밤하늘의 별을 보려고 호텔 밖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그냥 잤다. 밤하늘 별 구경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리조트 주변을 산책하는데 날씨가 쌀쌀했다. 호텔 조식은 뷔페식으로 계란 후라이, 소시지, 햄 그리고 따듯한 오토밀 죽이 나왔는데 오토밀 죽은 두 그릇이나 먹었다.
오늘은 말 타기가 주요 일정이었다. 몽골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툴강의 숲 코스를 1시간 40분 정도 말을 타며 숲속 산책을 하였다. 전날 말 타기 예행연습 덕분에 긴장하지 않았다. 마부는 16세 여자아이였다. 승마장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일찍 말 타는 기술을 익힌 진정한 징기스칸의 후손들이었다. 툴강의 지류를 건너면서 혹시 말이 주저앉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솔밭을 지나면서는 ‘솔밭사이로 강물은 흐르고’라는 옛날 노래가 생각났다.
말 타기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 점심 식사를 하고 울란바토르 시내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인데 비좁은 길에 자동차가 홍수를 이룬 탓에 길이 너무나 많이 막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 여행 후기 ]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자동차보다 왼쪽에 있는 차량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일본자동차가 많다. 시내버스는 중고 우리나라 ‘대우’ 버스가 대부분이다. 큰 사거리에는 신호등이 있고 교통순경도 있지만 신호를 제대로 지키기 않고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먼저 가려고 곡예를 하듯 운전한다. 운전하려면 용기를 갖고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접촉사고는 잘 생기지 않는다니 몽골 운전사들은 모두 기가 막힌 운전 기술을 가진 것 같다. 몽골에도 한류열풍이 불어 한국드라마를 더빙하여 방영하고 K-POP도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초원에서 울란바토르로 올라온 유목민은 먼저 게르를 짓고, 가난한 사람들은 모래나 시멘트를 이용하여 블럭 집을 짓는다. 광활한 목초지에 울타리 표시를 한 곳이 많은데 누구든지 말뚝을 박거나 담장을 쳐서 원하는 만큼 울타리 표시를 하고 1년 이내 집을 지으면 정부에서 개인 소유를 인정한다고 한다.
몽골 사람의 주식은 고기와 밀가루이다. 고기는 주로 양고기와 소고기를 많이 먹는다. 전통적으로 야채는 가축의 사료로 생각하여 야채를 먹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장례는 일반적으로 매장을 하며 목초지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다. 예전에는 풍장도 했다고 한다. 수레나 트럭에 시신을 싣고 가다가 시신이 떨어진 곳에 시신을 버려둔다. 시신이 떨어진 곳을 망자가 선택한 곳으로 여기고 하늘로 올라갈 망자의 영혼을 위해 새들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하였는데 티베트 불교 영향을 받은 영향이다. 길거리 여기저기에 ‘신을 영접’하는 원시 신앙인 샤마니즘 깃발이 자주 눈에 띤다. 하늘이 가깝고 광활한 대지위에서 인간의 힘이 나약하면 할수록 인간은 신을 찾게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몽골 경제는 낙후되어 수출품은 별로 없고 공산품을 위시한 많은 물품을 수입한다.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기에 중국과 러시아의 교통시설과 도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 중국과 러시아의 입김의 크다고 한다. 몽골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밤하늘의 별 구경이다. 별자리 전설을 떠올리며 밤하늘의 무수한 별과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몽골을 찾는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먹구름이 낀다든지 비가 쏟아지거나 휘영청 보름달이 뜨면 밤하늘의 별을 만나는 것은 한갓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그때 그 순간 자연의 신비에 따르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목초지, 수평선 대신 지평선만 보이는 목초지에서 낙타를 타거나 숲길을 말 타고 산책하며 자연을 바라보며 자신의 영혼을 만나는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다. 또한 양고기, 말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닭고기를 몽골산 보드카와 함께 맛보는 것도 몽골 여행의 묘미이다. (2019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