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드셨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종교 단체를 조직하거나,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종교와 복음, 그 결정적인 네 가지 차이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를 하나 더 추가한 것이 아니라, 죽어있던 유대교의 본질을 깨우고, 온 인류를 향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와 복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와 복음은 네가지 포인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방향의 차이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고행이나 명상, 선행이나 율법 준수를 통해 신에게로 다가가려는 상향식 노력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찾아오신 하향식 사건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시는 사랑의 추적입니다.
둘째 동기의 차이입니다. 종교는 하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공포나, 이렇게 하면 복받는다는 보상 심리가 동력이 됩니다. 즉 거래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이미 받은 구원과 사랑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는 거래가 아닌 관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종교는 내가 이만큼 했으니 주십시오라며 청구서를 내미는 것이고, 복음은 주께서 다 주셨으니 내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영수증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셋째 결과의 차이입니다. 종교는 수행을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며 높이고, 반대로 실패한 사람은 손가락질 합니다. 즉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가장 선한 자도 은혜가 필요하고, 가장 악한 자도 소망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모두가 십자가 앞에서 평등해집니다. 종교는 나를 증명하게 만들지만, 복음을 나를 그리스도 뒤에 숨게 만듭니다.
넷째, 상태의 차이입니다. 종교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진행형의 굴레입니다. 죽을 때까지 끝없이 돌아가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어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반면에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완료형의 안식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계속해서 써내려가는 반성문이라면, 복음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초청장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종교를 만들고 싶은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기독교라는 형식은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교를 넘어 온 세계로 흐르기 위해 입어야 했던 시대적 옷에 불과합니다
바울,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인가 복음의 번역가인가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기독교를 만들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두부 모 자르듯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굳이 대답하라고 한다면 바울은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복음의 번역가라고 정의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라는 복음의 원형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복음이 유대라는 울타리를 넘어 온 세계라는 토양에 어떻게 꽃피워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주로 비유와 사건을 통해 보여주셨다면, 바울은 그것을 논리와 교리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기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거대한 사건을 온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 인류에게 하나님 나라의 초대장을 발송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초대장을 받았지만, 정작 잔치에 들어갈 자격(의)이 없어 문앞에서 서성였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의 옷을 입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고 안내문을 덧붙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건축가가 아니라, 설계도를 해설한 가이드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내용이라고,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보편적인 언어의 형식에 담아냈습니다. 기독교는 바울의 종교가 아니라, 바울에 의해 온 세상의 것이 된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만약 바울이 기독교를 만들었다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높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평생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고백하며 자신을 지우고 예수님만 드러냈습니다. 기독교는 바울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 바울이라는 렌즈를 통해 비로소 우리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예수의 세계입니다.
기독교라는 나무가 뿌리 내린 세 가지 분기점
그렇다면 종교적 형태로서 기독교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기독교가 하나의 독립된 종교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 세가지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태동기로서 오순절 성령강림(AD 30-33년경)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크게 의기소침하여 흩어졌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가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비록 삼일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여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승천하셨음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문을 걸어잠그고 숨었습니다. 감히 나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그들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계기는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이었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로마나 유대교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개된 장소에 나가 복음을 전했고, 그때 그들은 복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원형입니다. 그들은 함께 식사하면서 가난한자, 이방에서 온 자, 과부들을 돌보았습니다. 날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이때까지 기독교는 독립된 종교라기 보다는 유대교 내부의 한 분파, 즉 나사렛 파로 인식되었습니다.
둘째 전환기로서 안디옥 교회와 바울의 선교(AD40-50년대)입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외피를 벗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드러낸 때가 바로 이 시기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따르면, 안디옥에 사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안디옥 사람들이 유대교인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유대교와 구별되는 독특한 색채를 띠었다는 증거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리더였던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바울을 찾아가 함께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섯 명의 리더와 함께 팀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어떤 행정 조직에 의해 강제된 명령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최초로 모여 회의했습니다(AD49년). 그때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하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기독교는 인종적, 민족적 종교에서 벗어나 보편적 종교로 형태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확립기로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AD 70년 이후)입니다.
이 시기는 형태적으로 유대교와 완전한 결별이 일어난 시점입니다.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유대교는 랍비 중심의 회당 종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대 랍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면서 회당에서 축출하였습니다. 성전 제사가 사라진 자리에 율법을 지키는 형태의 유대교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며, 함께 예배하는 형태를 갖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라는 형태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복음의 씨앗이 유대교라는 토양에서 자라나, 바울이라는 폭풍을 만나 씨앗을 퍼뜨리고, 성전 파괴라는 역사적 진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나무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거대한 나무의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셈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희망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신다면, 내가 언제 이런 걸 만들었느냐고 물으실까요? 아니면 ‘내 뜻이 드디어 펼쳐지고 있구나’라고 기뻐하실까요?
예수님은 화려한 건물이나 복잡한 교단 정치를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비대해진 외형을 보신다면 이것이 과연 내 뜻인가 물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부끄러운 형태 안에서도 누군가 한 영혼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해 울고 있다면 주님은 ‘내 뜻이 여기서 숨 쉬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종교 시스템에 대해서 주님께서 고개를 저으실지 모르지만, 그 시스템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한 복음의 생명력을 보신다면 미소 지으실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완성된 천국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가는 공사중인 현장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교회는 완벽한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여 있는 병원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본질에서 멀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 모여 있다는 정직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완벽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알고 주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정직한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목적지라기 보다 과정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주님은 오늘날의 교회를 보며 우실 때가 더 많으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눈물은 포기의 눈물이 아니라 애통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라고 자신있게 답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야말로, 다시 주님의 뜻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신호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것은 완벽한 조직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개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바꿔볼까요? 주님이 기뻐하실지 물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그 준비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참고도서
티모시 켈러,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E. P. 샌더스, 『예수와 유대교』 (Jesus and Judaism)
김세윤, 『바울 복음의 기원』
F. F. 브루스, 『바울: 자유의 사도』
제임스 던, 『신약 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N. T. 라이트, 『그리스도인의 기원과 하나님의 문제』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신국론』 (De Civitate Dei)
출처 : 로고스 글로벌 아카데미 배경락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