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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고구려 연구재단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부여사 내용입니다.
우선 이 내용을 읽어보시고, 저의 4월 7일 강의와의 차이점을 살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여사 - 고구려 연구재단
1. 부여사 개관
우리나라 역사상 고조선 다음 두 번째로 등장한 나라로서, ‘북부여’라고도 하고, ‘동부여’까지를 합쳐 부여로 통칭하기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부여는 기원전 2세기 북이(北夷) 탁리국으로부터 망명한 동명집단이 예왕(濊王)으로 상징되는 예맥의 땅에 건국한 후,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 이전에 전성기에 이르고, 기원후 494년 물길의 남하로 부여 왕이 부여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전성기 부여의 강역이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그 도읍이 심양~무순에 치소를 두고 있던 제3현도군 북쪽 1,00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중심지는 현재의 길림시에 해당하고, 그 강역은 대체로 제2송화강 중류역의 길림성 중부지대가 된다. 부여는 근 700여년간 존속하였는데, 국호인 부여라는 말은 넓은 들판을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 또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푸후(puhu)’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부여 국명의 유래가 어떠한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사서에 부여가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민족 관련의 여러 나라와 집단중에서 가장 기름지고 넓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처음에는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집단으로 출발하였으나 요동의 한군현과의 직접적인 교역과 한군현과 주변집단 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점차 안정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해 나갔으며 이러한 결과 기원후 285년 모용연의 공격이 있기 전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집단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부여의 강역은 대체로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제2송화강 중류역인데, 서쪽으로는 농안(農安)까지, 동쪽으로는 장광재령(長廣才嶺)까지, 남쪽으로는 요령과 길림성의 분수령까지, 북쪽으로는 납림하(拉林河) 또는 제1송화강 중류역까지 이르렀다.
부여는 모아산(帽兒山)과 동단산(東團山) 유적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기원후 2세기대를 전후한 시점에 최고조로 발전하였다가, 기원후 285년 모용연의 공격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져 중국 동북지역 여러 세력중 중심적인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고, 기원후 346년 다시 선비족의 나라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게 되자 급속히 쇠약해져 고구려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급기야 기원후 494년 제1송화강유역 물길(勿吉)의 압박으로 부여 왕실과 일부 백성들이 고구려에 귀의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부여는 멸망하는 과정중 일부 주민이 여러 곳으로 분산 이주하거나 또는 토착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세력들에게 흡수되어 갔다. 즉, 비록 주민의 대부분이 고구려에 흡수되기는 하였지만, 일부 주민은 쇠퇴 멸망과정중 주변의 선비족과 물길족 등의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것이 두막루국(豆莫婁國)인데, 부여 멸망과정 중 일부 주민이 지금의 흑룡강성 서남부지역으로 옮겨가 조그마한 나라를 이루게 되었고, 이들은 부여 말을 쓰면서 기원후 8세기대까지 존속하였다.
2. 위치
문헌기록에 의하면 부여는 기원전 2세기 북이 탁리국으로부터 망명한 동명집단이 예왕(濊王)으로 상징되는 예맥의 땅에 건국한 후, 기원후 285년 모용연의 공격 이전에 전성기에 이르고, 기원후 494년 물길의 남하로 부여 왕이 부여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전성기 부여의 강역이 고구려의 북쪽, 읍루의 서쪽, 선비의 동쪽, 약수의 남쪽의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그 도읍이 심양~무순에 치소를 두고 있던 제3현도군 북쪽 1,00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중심지는 길림시에 해당하고, 그 강역은 대체로 제2송화강 중류역의 길림성 중부지대가 된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로부터 기원후 4,5세기대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제2송화강 중류역을 부여의 범위로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이 범위 내에서는 비록 부여 말기의 유적군이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길림 중부지역만의 독특한 철기시대 문화인 이른 바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의 유적유물들이 확인되고 있어 고고학적인 면에서도 부여의 범위를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다.
한편 부여의 최고 중심지(왕성)는 기원후 346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 왕성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중 전기 왕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성(阿城), 농안(農安), 길림(吉林)으로 보는 세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 현도군으로부터의 상대적인 거리와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토대로 길림시가 전기 왕성이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후기 왕성에 대해서는 농안, 창도(昌圖), 서풍(西豊) 등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 문헌기록이 소략한데다 고고학적 증거 또한 충분치 않아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3. 사람들
부여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족이 탁리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여 부여를 건국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이후 북방의 송화강이나 압록강 유역에는 예맥족이라는 다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부여 건국 이전 그 수장이 이미 예왕으로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는데, 기원전 2세기 동명집단과 합쳐 부여를 구성하게 되었다. 부여는 위만조선 대로부터 세력을 형성하고 점차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이즈음 부여 지배세력중 일부가 갈라져 나와 동부여를 건국하고, 동부여의 지배세력 중 주몽계열이 다시 압록강 방면에 진출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이에 압록강 유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주민의 일부가 다시 한강유역으로 남하하여 백제 건국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백제 건국세력들 역시 부여족이었기때문에 자신들이 남하하여 세운 국가의 이름을 남부여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부여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과 한 계통으로서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그 친밀도가 매우 강하였다. 따라서 부여는 중앙집권화 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 직전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연맹체적 성격을 지녔으나 차츰 왕권의 부자세습 원칙 하에 안정된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부여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와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다. 왕은 여러 가(加)들을 대표하였으며 동시에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띠고 있었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을 자치적으로 다스리면서 왕을 보좌하였다. 가(加)들은 또한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왕과 여러 가(加)들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일종의 귀족회의체인 제가회의를 열어 일을 의논하였다. 제가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그 해의 농사에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 갔다.
부여의 중앙정부는 전국을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망을 통하여 여러 지역집단을 통할하였다. 이 큰 도로망을 사출도(四出道)라 한다. 사출도는 마가·우가·구가·저가 등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큰 지역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여국의 지방 지배구조를 ‘윷’놀이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부여는 송화강유역의 넓은 들판을 이용한 반농반목의 경제형태를 갖추었다. 부여 사람들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으며, 목축도 성행하여 말·소·돼지·개 등을 길렀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관리들의 칭호를 가축이름에서 딴 것이나 부여의 기마풍습은 부여에서 목축이 성행하였음을 잘 말해준다.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며 이를 중국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부여는 한민족중 두 번째로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나라로서, 문헌기록에 의하면 왕, 귀족(제가), 호민, 하호의 네 개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왕과 귀족을 하나로 묶어 지배계층으로, 하호를 하위의 피지배계층으로, 호민을 중간계층으로 본다면, 대체로 세 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은 궁실과 부속시설이 갖추어진 길림시 제2송화강변의 왕성에 거주하면서 정사를 보았고, 귀족은 왕성 부근에 거처하면서 부여 경역 내 자신의 관할구역을 관리하며 지냈으며, 하호는 생산과 부역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제가(諸加)로 상징되는 귀족들과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민(豪民)들은 평소 집집 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할 정도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은 건국신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고, 이러한 까닭으로 돼지를 숭상하던 길림 중부지역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와는 달리, 부여의 경우 관직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부여 지배층의 강한 통치력은 부여 지배층이 하호를 마치 노예처럼 다루었다는 것과 이른 바 “일책십이법”이라고도 불리우는 강력한 법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부여법에 의하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만들었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열두 배의 배상을 물게 하였고, 간음을 한 여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편에 대하여 질투한 아내는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부여법이 북방지역의 관습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인데, 이러한 유사성은 형사취수혼에서도 확인된다.
아뭏튼 이와 같은 지배력과 높은 생산성으로 부여의 지배층들은 나라 안에서는 흰옷을 즐겨 입고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와 바지에 가죽신을 신었으며, 공식석상이나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에 모피와 금은으로 장식한 관모를 쓰는 등의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 부여에서는 매해 12월 영고(迎鼓)라는 국중대회를 열었는데, 이날 부여 사람들은 모두 모여 매일같이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하늘의 복을 빌었다. 또 이 날을 기해 중대한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였다.
이와 같이 부여는 문헌기록의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사회가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었고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로 보아 부여는 기원전 2~1세기의 초기, 기원전 1~기원후 1세기의 전기, 기원후 1~3세기의 중기, 기원후 4~5세기의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에는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던 반면 전기와 중기에는 사회 전반이 안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길림시 일대에서 확인되는 왕성과 귀족묘 등이 대개 이 시기의 것들로 여겨지는데, 이로 보아 이 시기에 국가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신화로는 동명신화로도 불리우는 것이 있는데, 동명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말한다. 부여 건국신화는 위(魏) 나라 명제(明帝) 때 어환이라는 사람이 지은『위략(魏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왕충의『논형(論衡)』에도 부여 건국신화가 실려 있는데, 국명과 지명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될 뿐 기본적인 맥락은 같다. 이들 자료에 실려 있는 신화의 기본 줄거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 온 후 왕의 몸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몸종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왕이 죽이려 하자, 몸종이 말하기를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몸종이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미워하여 아기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이번엔 말이 또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다.
이러하자 왕이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그 어머니에게 기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동명(東明)이다. 동명은 성장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군사로 하여금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 가에 이르렀는데, 탄식하며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어 무사히 건너게 되었고, 그 길로 남쪽 땅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부여를 건국하였다.
4. 정치와 경제
초기 부여의 정치체제는 연맹체적 성격을 지녔으나 차츰 왕권의 부자세습 원칙 하에 안정된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부여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와 대사(大使)·대사자(大使者)·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다. 왕은 여러 가(加)들을 대표하였으며 동시에 주술적인 신이한 능력을 지닌 제사장적인 성격도 띠고 있었다. 가들은 각자의 읍락을 자치적으로 다스리면서 왕을 보좌하였다. 가(加)들은 또한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면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왕과 여러 가(加)들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일종의 귀족회의체인 제가회의를 열어 일을 의논하였다. 제가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그 해의 농사에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사회분화가 진전되어감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어 갔다.
부여의 중앙정부는 전국을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망을 통하여 여러 지역집단을 통할하였다. 이 큰 도로망을 사출도(四出道)라 한다. 사출도는 마가·우가·구가·저가 등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큰 지역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부여국의 지방 지배구조를 ‘윷’놀이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부여는 송화강유역의 넓은 들판을 이용한 반농반목의 경제형태를 갖추었다. 부여 사람들은 농업을 영위해 오곡을 생산하였으며, 목축도 성행하여 말·소·돼지·개 등을 길렀다. 특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관리들의 칭호를 가축이름에서 딴 것이나 부여의 기마풍습은 부여에서 목축이 성행하였음을 잘 말해준다.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며 이를 중국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부여는 한민족중 두 번째로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나라로서, 문헌기록에 의하면 왕, 귀족(제가), 호민, 하호의 네 개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왕과 귀족을 하나로 묶어 지배계층으로, 하호를 하위의 피지배계층으로, 호민을 중간계층으로 본다면, 대체로 세 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은 궁실과 부속시설이 갖추어진 길림시 제2송화강변의 왕성에 거주하면서 정사를 보았고, 귀족은 왕성 부근에 거처하면서 부여 경역 내 자신의 관할구역을 관리하며 지냈으며, 하호는 생산과 부역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제가(諸加)로 상징되는 귀족들과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민(豪民)들은 평소 집집 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할 정도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은 건국신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고, 이러한 까닭으로 돼지를 숭상하던 길림 중부지역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와는 달리, 부여의 경우 관직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부여 지배층의 강한 통치력은 부여 지배층이 하호를 마치 노예처럼 다루었다는 것과 이른 바 “일책십이법”이라고도 불리우는 강력한 법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부여법에 의하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만들었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열두 배의 배상을 물게 하였고, 간음을 한 여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편에 대하여 질투한 아내는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부여법이 북방지역의 관습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인데, 이러한 유사성은 형사취수혼에서도 확인된다.
아뭏튼 이와 같은 지배력과 높은 생산성으로 부여의 지배층들은 나라 안에서는 흰옷을 즐겨 입고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와 바지에 가죽신을 신었으며, 공식석상이나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에 모피와 금은으로 장식한 관모를 쓰는 등의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 부여에서는 매해 12월 영고(迎鼓)라는 국중대회를 열었는데, 이날 부여 사람들은 모두 모여 매일같이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하늘의 복을 빌었다. 또 이 날을 기해 중대한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였다.
이와 같이 부여는 문헌기록의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사회가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었고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로 보아 부여는 기원전 2~1세기의 초기, 기원전 1~기원후 1세기의 전기, 기원후 1~3세기의 중기, 기원후 4~5세기의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에는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던 반면 전기와 중기에는 사회 전반이 안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길림시 일대에서 확인되는 왕성과 귀족묘 등이 대개 이 시기의 것들로 여겨지는데, 이로 보아 이 시기에 국가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신화로는 동명신화로도 불리우는 것이 있는데, 동명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말한다. 부여 건국신화는 위(魏) 나라 명제(明帝) 때 어환이라는 사람이 지은『위략(魏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왕충의『논형(論衡)』에도 부여 건국신화가 실려 있는데, 국명과 지명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될 뿐 기본적인 맥락은 같다. 이들 자료에 실려 있는 신화의 기본 줄거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 온 후 왕의 몸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몸종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왕이 죽이려 하자, 몸종이 말하기를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몸종이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미워하여 아기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이번엔 말이 또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다.
이러하자 왕이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그 어머니에게 기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동명(東明)이다. 동명은 성장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군사로 하여금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 가에 이르렀는데, 탄식하며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어 무사히 건너게 되었고, 그 길로 남쪽 땅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부여를 건국하였다.
5. 사회
부여는 한민족중 두 번째로 사회적 통합과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나라로서, 문헌기록에 의하면 왕, 귀족(제가), 호민, 하호의 네 개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왕과 귀족을 하나로 묶어 지배계층으로, 하호를 하위의 피지배계층으로, 호민을 중간계층으로 본다면, 대체로 세 개의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왕은 궁실과 부속시설이 갖추어진 길림시 제2송화강변의 왕성에 거주하면서 정사를 보았고, 귀족은 왕성 부근에 거처하면서 부여 경역 내 자신의 관할구역을 관리하며 지냈으며, 하호는 생산과 부역에 종사하였다.
그런데 제가(諸加)로 상징되는 귀족들과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민(豪民)들은 평소 집집 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할 정도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은 건국신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고, 이러한 까닭으로 돼지를 숭상하던 길림 중부지역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와는 달리, 부여의 경우 관직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부여 지배층의 강한 통치력은 부여 지배층이 하호를 마치 노예처럼 다루었다는 것과 이른 바 “일책십이법”이라고도 불리우는 강력한 법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부여법에 의하면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만들었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열두 배의 배상을 물게 하였고, 간음을 한 여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편에 대하여 질투한 아내는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부여법이 북방지역의 관습법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인데, 이러한 유사성은 형사취수혼에서도 확인된다.
아뭏튼 이와 같은 지배력과 높은 생산성으로 부여의 지배층들은 나라 안에서는 흰옷을 즐겨 입고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와 바지에 가죽신을 신었으며, 공식석상이나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에 모피와 금은으로 장식한 관모를 쓰는 등의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 부여에서는 매해 12월 영고(迎鼓)라는 국중대회를 열었는데, 이날 부여 사람들은 모두 모여 매일같이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며 하늘의 복을 빌었다. 또 이 날을 기해 중대한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였다.
이와 같이 부여는 문헌기록의 소략함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사회가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었고 매우 역동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문헌과 고고학적인 자료로 보아 부여는 기원전 2~1세기의 초기, 기원전 1~기원후 1세기의 전기, 기원후 1~3세기의 중기, 기원후 4~5세기의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에는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던 반면 전기와 중기에는 사회 전반이 안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길림시 일대에서 확인되는 왕성과 귀족묘 등이 대개 이 시기의 것들로 여겨지는데, 이로 보아 이 시기에 국가단계로 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6. 신화
부여의 신화로는 동명신화로도 불리우는 것이 있는데, 동명신화는 부여의 건국신화를 말한다. 부여 건국신화는 위(魏) 나라 명제(明帝) 때 어환이라는 사람이 지은『위략(魏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왕충의『논형(論衡)』에도 부여 건국신화가 실려 있는데, 국명과 지명에서 약간의 차이가 발견될 뿐 기본적인 맥락은 같다. 이들 자료에 실려 있는 신화의 기본 줄거리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옛날 북방에 탁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이 사냥하러 나갔다 온 후 왕의 몸종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 몸종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왕이 죽이려 하자, 몸종이 말하기를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몸종이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미워하여 아기를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고, 마구간에 버렸더니 이번엔 말이 또 입김을 불어 죽지 않게 하였다.
이러하자 왕이 기이하게 여겨 아기를 그 어머니에게 기르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동명(東明)이다. 동명은 성장하여 활을 잘 쏘았는데, 왕이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을 두려워 하여 군사로 하여금 동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달아나 시엄수(施掩水) 가에 이르렀는데, 탄식하며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 주어 무사히 건너게 되었고, 그 길로 남쪽 땅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부여를 건국하였다.
7. 연표
연도 내용
기원전 2세기대 -탁리국의 동명집단이 남하하여 길림시 일대에 토착하고 있던 예왕집단과 결합 부여 건국
기원후 1세기대 -왕호 사용
13년 -부여가 고구려를 공격
22년 -부여와 고구려가 전투
-부여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국(曷思國) 건립
49년 -한나라에 사신 파견
77년 -고구려에 사신 파견, 뿔이 3개 달린 사슴과 긴꼬리 토끼를 증여
105년 -고구려에 사신 파견, 호랑이 증여
111년 -부여가 낙랑군을 공격
122년 -고구려와 현도군의 전쟁에 부여왕 위구태가 개입
161년 -한나라에 사신 파견
167년 -부여왕 부태(夫台)가 현도군을 공격
174년 -한나라에 사신 파견
285년 -선비족 모용연이 동부여 공격
-부여왕 의려가 자살하고 부여 왕실이 북옥저로 피난
286년 -부여왕 의라가 즉위하여 선비족을 격퇴하고 부여를 재건
346년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천도
4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동부여 정벌
457년 -북위에 사신파견
494년 -물길의 압박으로 부여왕이 백성들을 이끌고 고구려에 귀의
8. 고고문화 - 왕성
기록에 의하면 부여는 기원전 2세기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북이(北夷) 탁리국의 망명집단에 의해 예맥의 땅에 세워졌고,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으로 쇠퇴하기 직전 그 중심지가 현도군의 북쪽 1,000여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사방 2,000리의 강역에 인구가 8만호에 달하는 강국이었으며, 기원후 346년 전연과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요령, 길림지역의 패권구도 속에서 그 도읍이 이동되었고, 급기야 기원후 494년에는 물길의 압박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하여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성책을 둥글게 쌓는 자기만의 독특한 축성술이 있었고, 군왕(君王)이 거주하며 통치하는 왕성 안팎에 궁실 창고 감옥 등이 있었으며, 왕성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부여 건국 이전 토착집단 수장의 왕성인 예성(濊城)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부여의 도읍에는 아직 후대의 도성과 같은 체제가 완비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환호와 목책 및 성벽과 같은 방어시설과 궁전 및 관청과 같은 내부시설을 갖추고 있는 왕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부여의 왕성은 기원후 346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전기 왕성과 그 이후의 후기 왕성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중 전기 왕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성(阿城), 농안(農安), 길림(吉林)으로 보는 세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 현도군으로부터의 상대적인 거리와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토대로 길림시가 전기 왕성이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후기 왕성에 대해서는 농안, 창도(昌圖), 서풍(西豊) 등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데, 문헌기록이 소략한데다 고고학적 증거 또한 충분치 않아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전기 왕성의 구체적인 소재에 대해서는 길림시의 용담산성(龍潭山城)과 동단산(東團山) 남성자(南城子)가 유력하게 꼽히고 있는데, 두 유적 모두에서 부여가 존속하던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현재로서는 두 유적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에는 축성방식과 입지 및 출토유물 면에서 용담산성 보다는 남성자성이 유력한 것으로 부각되고 있는데, 남성자성 일대에서는 포자연형호(泡子沿型壺)와 사람 얼굴 장식 및 한식 타날문토기 등 관련 유물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남성자성은 제2송화강 동안에 봉긋 솟아 있는 지표고 50여 미터의 동단산을 서측부로 하여 그 자락의 평지에 판축기법으로 토축되어 있는 길이 1,050 미터의 불규칙한 타원형 토성으로, 남문과 북문 및 환호 등의 시설이 발견되었고, 남문지 안측에 동서 너비 73 미터, 남은 높이 1~1.5 미터의 장방형(남북향) 건축대기가 시설되어 있다. 또한 성 내부에서는 문양전과 같은 건축 관련 부속재와 물레 성형의 고급 생활기명 등이 발견되어 이곳에 정치상의 중심지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9. 무덤
문헌기록에 의하면 부여는 기원전 2세기 북이(北夷) 탁리국으로부터 망명한 동명집단이 예왕(濊王)으로 상징되는 예맥의 땅에 건국한 후,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 이전에 전성기에 이르고, 기원후 494년 물길의 남하로 부여 왕이 부여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전성기 부여의 강역이 고구려의 북쪽, 읍루의 서쪽, 선비의 동쪽, 약수의 남쪽의 사방 2,000리에 달하였고, 그 도읍이 심양~무순에 치소를 두고 있던 제3현도군 북쪽 1,00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도읍은 현재의 길림시에 해당하고, 그 강역은 대체로 제2송화강 중류역의 길림성 중부지대가 된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로부터 기원후 4,5세기대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제2송화강 중류역을 부여문화의 시공간적인 범위로 삼을 수가 있는데, 실제로 이 범위 내에서는 비록 부여 말기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유적군이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길림 중부지역만의 독특한 철기시대 문화인 기원전 2세기로부터 기원후 3세기대의 이른 바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의 유적유물들이 확인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포자연유형 관련의 무덤유적으로는 유수(楡樹) 노하심(老河深), 길림(吉林)의 모아산(帽兒山)과 동단산(東團山) 및 구개산(龜盖山), 동요(東遼) 석역(石驛), 서풍(西豊) 서차구(西?溝)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은 시간적으로 보아 기원전 2~1세기의 서차구-석역기, 기원전 1~기원후 1세기의 노하심기, 기원후 1~3세기의 모아산기의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대체로 처음에는 목관곽을 시설하지 않은 단순토광묘가 쓰이다가 이어 하나의 목관과 목곽이 시설되어 있는 목곽묘가 쓰이고 마지막에는 부부를 하나의 무덤 구덩이 두개의 목곽에 묻은 목곽묘가 사용되었다.
부여(포자연유형)의 무덤에서 특징적인 것중의 하나는 장구로 목곽만을 쓰고 목관은 쓰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장속은 문헌에 부여 사람들이 무덤을 쓸 때 곽만 쓰고 관을 쓰지 않는다(有槨無棺) 라고 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왕과 귀족의 장사에 최대 100여명 가량을 순장하는 것과 같은 장속은 아직까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또한 부여는 고구려 등과는 달리 고총고분이나 석실봉토분 등이 조영되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점 부여문화의 발전이 사실상 목곽묘 단계에서 그쳤음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10. 무기
부여는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중 가장 넓고 평탄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토질 또한 좋아 오곡이 고루 재배되었고 일찍부터 요동의 한군현과의 교역을 통해 그야말로 중국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 여러 종족중 가장 잘 살고 풍부한 나라였다. 그러나 동쪽의 읍루, 서쪽의 선비, 남쪽의 고구려, 북쪽의 다소 늦은 시기의 물길과 같은 강한 세력들에 의해 둘러 싸여 있어 늘상 이들의 위협 속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였다.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으로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가(諸加)로 상징되는 귀족들과 일정한 지위와 신분을 누리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호민(豪民)들은 평소 집집 마다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외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은 건국신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고, 이러한 까닭으로 돼지를 숭상하던 길림 중부지역의 토착문화인 서단산문화와는 달리, 부여의 경우 관직명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을 숭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인해 부여의 무덤 유적에는 다른 어느 지역 보다도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무기가 다량 부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서차구나 노하심(老河深)과 같이 한화(漢化)가 비교적 덜 진행된 전기 유적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부여만의 무기가 적지 않이 부장되어 있다. 예를들어 서차구와 노하심에는 손잡이 끝에 주산알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연령병식(連鈴柄式)의 동병철검이 부장되어 있는데, 이러한 검은 부여 외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형식이다.
부여의 칼중에는 손잡이 끝에 새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는 조형병식(鳥形柄式)의 동병철검도 있는데, 이와 같은 류의 칼은 부여문화 형성 이전 길림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선행하여 유행한 같은 류의 칼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외 영령병식검의 상당수가 손잡이 끝 장식을 제외한 나머지의 손잡이부가 비파형동검과 중간형동검(중세형동검)의 T자형 청동제 검손잡이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점을 통해 부여의 무기 형성에 길림 중부 토착집단의 무기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외 부여의 무기중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중국식의 둥근 고리 달린 철검과 나무 손잡이를 자루 맞추개에 따로 끼어 사용하게끔 되어 있는 납작 자루 맞추개의 철검이 있는데, 이러한 중국식 철검은 중국식 청동거울과 동전 및 타날문토기 등과 함께 부여와 중국 군현과의 교역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진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칼 외에 주요한 무기류로는 철창과 철화살촉이 있는데, 철창은 중국제품을 그대로 수입하여 사용한 것과 제작기술의 수용에 의해 자체 제작된 것이 있고, 철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과 같이 부여 양식의 특징적인 유형이 제작되었다.
11. 위엄구
위엄구란 살아 생전 통치자나 지배자의 신분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과 관련된 도구를 말한다. 청동기시대 중국문화권에서는 부월(斧鉞)과 옥기류 등이 위엄구로 활용된 반면, 석곽묘, 석관묘, 지석묘, 비파형동검 등이 유행한 중국 동북지역의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집단에서는 다뉴기하학문경이 대표적인 위엄구로 사용되었다. 철기시대 전기에는 다뉴기하학문경 외에 한나라로부터 교역이나 증여를 통해 들여온 한경(漢鏡)과 이를 모방하여 제작한 방제경(倣製鏡)이 위엄구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2~기원후 5세기 동안 존속한 부여에서는 청동거울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위엄구가 사용되었는데, 대인(大人) 이상이 썼다고 하는 금은이 화려하게 장식된 관모라든지, 유니콘과 유사하게 생긴 신마상(神馬像)이 장식되어 있는 금도금 청동패식이라든지, 가슴 부위에 장식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른 바 호심경(護心鏡)이라든지, 벽옥(璧玉)이나 규옥(珪玉)이라든지 하는 것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외 부여 왕이 쓰고 있었을 왕관 또한 위엄구로 볼 수 있는데, 남아 있는 예가 없어 분명하게 알 수 없다.
12. 장신구
부여는 기원전 2세기로부터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으로 쇠퇴하기 직전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나라 중에서 가장 부강하고 물산이 풍부한 나라였다. 부여의 부강은 국내의 자원 개발과 농업 생산성의 향상 뿐만 아니라 중국 군현과의 교역을 통해서도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와 같은 경제적 기반으로 인하여 부여의 왕과 귀족들은 요동 산악지대의 전기 고구려나 궁벽진 연변의 북옥저에 비해 일찍부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장신구 또한 발달하게 되었다.
부여의 장신구로는 금은귀걸이, 청동팔지, 청동단추장식, 적옥과 미옥의 목걸이 등이 있는데, 문헌기록과 무덤의 부장상태로 보아 평소 부여의 귀족들은 금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관모를 쓰고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고 있었으며, 귀에 금은 귀걸이를 끼고 목에 아름다운 구슬로 엮은 목걸이를 걸었고 여자의 경우 팔에 청동팔지를 차고 허리에는 여러 형태의 대구를 차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 부여에서는 생활 관련 여러 형태의 장신구가 사용되었다.
13. 거마구
부여는 죽을 때 무덤에 말이빨과 턱뼈를 가지고 갈 정도로 말을 숭상하고 애용하던 사회였고, 이러한 풍조는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부여 건국집단이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한 부여는 기원후 285년 모용연(慕容燕)의 공격으로 쇠퇴하기 직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한민족 관련 고대종족과 나라는 물론 북방유목민족 관련 집단중 가장 부강하고 물산이 풍부한 나라였다. 따라서 왕과 귀족들의 경우 이동시 수레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부여의 유적에서는 적지 않은 수량의 거마구류가 발견되고 있는데, 절대다수는 마구류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말머리의 미간으로부터 코까지를 장식하던 말얼굴장식, 두쪽말재갈, 몸체 중간에 두개의 구멍이 뚫어져 있는 말재갈멈치, 프로펠러 모양의 말재갈멈치, 단추모양의 말띠장식 등이 있다. 이외 부여에서는 아직 중장기병과 관련된 마갑(馬甲) 류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 않은데, 기원후 494년 멸망할 때까지 이러한 마구류가 사용되지 않은 것인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14. 토기
지금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부여는 기원전 2세기 동명(東明)으로 상징되는 북이(北夷) 탁리국의 망명집단이 예왕(濊王)으로 상징되던 예맥의 땅에 세운 나라로서, 일찍부터 요동의 한군현과 다양한 교섭을 진행하면서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를 이룬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으로 인하여 부여에서는 부여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형태의 토기와 부여 건국 이전 길림 중부 재지집단에서 사용된 토기 및 한식토기가 모두 발견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후기로 갈수록 토착적인 속성의 토기는 점차 축소되는 반면 한식토기 또는 한식토기를 모방하여 자체 제작한 토기류가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는 포자연전산(泡子沿前山) 상층유적과 노하심(老河深) 유적 등이 있고 늦은 시기의 유적으로는 동단산과 모아산 유적이 있다. 한편 포자연형호(泡子沿型壺)라 불리우는 부여문화 전형의 토기는 눈강(嫩江) 유역의 백금보문화(白金寶文化) 전형의 토기와 상사한데, 이를 통해 부여문화의 기원이 대체로 이 일대 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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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장 관심가는 부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