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거세게 내린 다음날 하늘은 격하게 울고 난 사람처럼 아직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인호 형, 대은, 동묵, 승훈, 일순이 이사를 도우러 왔다 대은이와 일순이의 트럭에 냉장고와 책장과 자잘한 짐을 싣고 상사를 빠져나와 당촌으로 갔다 한 집은 비고 한 집은 찼다 아직 짐을 내리기만 하고 정리하지 못한 당촌집은 난민수용소처럼 되었다 지쳐서 막걸리를 마시고 그 짐들 사이에서 짐 하나처럼 잠들었다 아침에 동묵이가 와 승훈이를 데리고 황우마을에 가서 소고기와 냉면을 먹었다 간선도로엔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벚꽃을 보러 차들이 몰려들었다 벚꽃이 피어난 도로변엔 화염이 이글거리는 전장 같았다 꽃을 매단 나무들은 잘 차려입고 맞선을 보러 나온 선남선녀들인데 사람들은 그 선남선녀들을 구경하러 나온 것이다 나도 양복을 차려입고 아버지의 손길에 끌려 다방에 가 나와 맞선보러 온 아가씨와 마주 앉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하루빨리 장가를 보내려고 했고 나는 한사코 도망치려 했다 결국은 니 알아서 해 하고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고 끝내 나를 장가보내기 전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섬진강변 용호정에 가고 싶었지만 화개로 가는 도로에 들어섰다가는 오도가도 못할 신세가 될 게 뻔해서 광의면 연파리에 살고 있는 승훈이의 집에 가서 한잔 더 마시자고 했다 승훈이는 방에 푸들 한 마리, 마당에 보르도 한 마리를 극진하게 키우고 있었다 술에 취했을 때나 안 취했을 때를 구분할 수 없는 승훈이의 어조는 늘 차분함의 극점이었다 요즘엔 나와 얼굴이 좀 익숙해졌다 싶었는지 조금은 다변이 되었다 이번 주엔 벚나무들이 전장의 선두에서 질주하는 선봉대처럼 꽃을 터트릴 것이다 아침에 학교에 가 세 시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밤벚꽃 놀이에나 나서게 될까 헤어질 걸 뻔히 알면서 우리는 만나는 것이다 꽃은 떨어질 걸 뻔히 알면서 우리는 꽃구경에 나서는 것이다 꽃이 현세라면 열매는 내세일까 내세는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당도 높은 과일들을 키우는 유실수들의 세상일까
첫댓글 시인의 집답다는 아늑한 곳으로 이사하게 되어 다행이다
그곳에서 당촌일기와 좋은 시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는 에감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추억이 깃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