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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024 National Book Awards 에서 연설하는 앤 카슨. Jay Dixit 사진
고대 신화에서 영웅에게 죽임을 당하던 괴물이 사랑에 상처받는 소년으로 되살아난다. 수천 년 전 시의 사라진 구절은 대괄호와 여백으로 남고,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한 기억은 사진과 편지를 담은 아코디언 형태의 책으로 펼쳐진다. 캐나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고전학자 앤 카슨의 문학은 오래된 이야기를 오늘의 감각으로 바꾸면서, 그 이야기를 담는 형식까지 새롭게 만들어 왔다.
2026년 노벨문학상은 이런 카슨의 문학적 성취에 주목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고전 전통과의 유희적인 대화를 통해 현대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그의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수상 이유로 밝혔다. 시와 산문, 번역과 창작을 넘나들며 고대와 현대를 연결해온 작업이 세계 문학계의 가장 권위 있는 평가로 이어진 것이다.
서울의 대형서점에 마련된 앤 카슨 코너
카슨의 차별성은 고전을 대하는 방식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품에서 고전은 오늘의 삶을 해석하는 데 참여하는 살아 있는 언어다. 신화 속 인물들은 현대인의 욕망과 상처를 품고, 오래된 시구는 사랑과 상실을 겪는 개인의 경험 속으로 들어온다. 고전학자의 지식은 시인의 상상력과 결합해 새로운 서사를 낳는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1998년 발표한 운문소설 “붉은 자서전”이다. 카슨은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게리온 신화를 다시 썼다. 원래 신화에서 게리온은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소 떼를 빼앗기는 괴물이다. 그러나 카슨의 작품에서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가족에게 상처받고, 헤라클레스와 사랑에 빠지는 소년으로 등장한다.
이런 변화는 신화의 시점을 뒤집는다. 영웅의 과업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던 괴물에게 내면과 삶의 역사가 주어진다. 독자는 영웅의 승리보다 그에게 상처받는 존재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간다. 고대의 괴물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견디며 사랑을 갈망하는 현대의 인물로 바뀐다. 카슨의 고전 재해석이 갖는 힘은 이처럼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충분히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찾아내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형식도 달라진다. “붉은 자서전”은 소설의 이야기를 시의 언어로 전개하면서 고대 시인에 대한 학술적 논의까지 끌어들인다. 연구와 서사, 서정이 한 작품 안에서 서로 작용한다. 독자는 인물의 삶을 따라가는 동시에, 그 삶을 만들어낸 신화와 언어의 역사도 함께 읽게 된다.
“남편의 아름다움” 역시 장르의 구분을 흔든다.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이루어진 허구적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이 작품은 결혼생활의 붕괴를 시와 이야기, 사유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다룬다. 탱고라는 구성은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상처를 주는 관계의 움직임과 맞물린다. 카슨에게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면서, 인물의 감정과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 수단이다.
이런 특징은 “녹스”에서 책의 물리적 형태로까지 확장된다. 세상을 떠난 오빠를 추모하는 이 작품에는 사진과 편지, 기억의 흔적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힌 지면에 담겨 있다. 로마 시인 카툴루스가 죽은 형제를 위해 쓴 애가에 대한 탐구도 개인적인 애도와 함께 놓인다.
“녹스”의 독자는 한 사람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한 이야기를 읽기보다, 남겨진 조각들을 펼치고 이어보게 된다. 이는 죽은 이를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작품의 형태로 보여준다. 사진과 편지가 남아 있어도 한 사람을 온전히 되찾을 수는 없다. 카슨은 그 간극을 매끄러운 설명으로 메우기보다 독자가 직접 마주하게 한다.
사라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이런 태도는 사포 시 번역집 “겨울이 아니라면”에서도 나타난다. 카슨은 파피루스의 훼손 등으로 전해지지 않는 부분을 대괄호와 여백으로 표시한다. 독자는 남아 있는 언어와 함께, 그 언어가 사라진 자리도 읽는다.
이 여백은 고대 문헌의 불완전성을 알리는 표시이자 독자의 상상력이 들어갈 공간이다. 고전학자로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을 함부로 덧붙이지 않는 정밀함과, 침묵과 부재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시인의 감각이 만나는 지점이다. 카슨의 작품에서 지식과 상상력은 이처럼 서로를 자극하며 움직인다.
번역에서도 그는 고대의 언어를 오늘날의 독자가 감각할 수 있도록 바꾼다. “안티고네”에서 크레온의 비탄을 “이제 나는 고통과 완전히 뒤섞여버렸다”라고 옮긴 대목이 그렇다. 비극의 감정이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간결한 표현에 담긴다. 복잡한 문학적 구조 속에서도 문장 자체는 직접적이고 생생할 수 있다는 점이 카슨의 또 다른 강점이다.
“트로이의 노마 진 베이커”에서는 헬레네와 마릴린 먼로를 겹쳐놓아 아름다움과 명성, 파괴의 관계를 탐구한다. 장시 ‘유리 에세이’에서는 에밀리 브론테의 삶과 작품을 통해 사랑의 상처와 가족의 슬픔을 들여다본다. 카슨은 다른 작가의 언어를 자신의 경험과 만나게 하면서, 개인의 감정이 여러 시대의 문학과 연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실험에 대한 평가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학자이자 번역가인 에밀리 윌슨은 카슨의 번역이 원작자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충분히 구별해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는 원문에 대한 충실성과 번역자의 독창성이 어디에서 균형을 이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고대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카슨 자신의 목소리도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발표된 수상 사유와 작품들을 함께 살펴보면, 이번 노벨문학상이 주목한 성취는 명확하다. 카슨은 고전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해석에 필요한 문학의 형식을 창조했다. 시와 에세이, 학술적 탐구와 개인적 기억, 글과 시각적 자료가 결합하면서 기존 장르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경험을 표현해 왔다.
그 형식의 실험을 지탱하는 것은 사랑과 욕망, 상실과 애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다. 괴물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죽은 가족의 흔적을 펼치고, 사라진 시구의 자리를 남기는 작업은 모두 인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카슨의 문학은 고전의 긴 역사 속에서 오늘의 인간을 발견하고, 그 인간의 복잡함에 맞춰 문학의 가능성을 넓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