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고전선집)을 읽었습니다. 김현균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가 번역한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것입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은 이미 다른 역본으로 접했기에 뒤로 미룰 수 있었습니다. 휴가 중에 읽으며 무척 좋았습니다.
네루다의 시는 광활한 바다와 같습니다. 칠레의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사람답게 민중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사회 정치시가 있는가 하면, 초현실풍의 작품이 있고, 또한 영육을 아우르는 사랑의 시가 있지요. 그의 시 일부는 에로티시즘이 뛰어나 여기 '문학 속의 성'에 포함되어도 좋을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뜻밖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나….
김현균 선생 역본을 읽다가 보니 네루다 역시로 유명한 정현종 선생의 것(민음사)과 다른 재미가 느껴졌습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느껴보세요. 제 생각엔 김현균 선생은 원본에 충실하고, 정현종 선생 것은 아무래도 운문의 맛을 더 살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루다가 살아 있다면 어느 것을 더 좋아할 지….
(김현균 역)-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1
여인의 몸, 하얀 구릉, 새하얀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네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러운 농부의 몸뚱이가 너를 파헤쳐 대지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내게서 달아났고 밤은 거세게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난 살아남기 위해 너를 벼렸다, 무기처럼, 내 활에 매겨진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오고, 난 너를 사랑한다. 가죽과 이끼와 단단하고 목마른 젖의 몸뚱이여, 아 젖가슴의 잔이여 아 넋 잃은 눈망울이여 아 불두덩의 장미여 아 슬프고 느릿한 너의 목소리여
내 여인의 몸이여, 나 언제까지나 너의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으리, 나의 목마름, 끝없는 갈망, 막연한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뒤따르고, 한없이 고통이 계속되는 어두운 강바닥이여.
(정현종 역)-한 여자의 육체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업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김현균 역)-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6
너를 지난 가을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넌 회색빛 베레모, 고요한 가슴이었다. 네 두 눈에서는 석양의 불꽃이 다투었고, 네 영혼의 물 위로 낙엽이 지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덩굴식물처럼 나의 팔에 들러붙어, 느릿하고 잔잔한 너의 목소리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나의 목마름이 타오르던 황홀의 화톳불. 나의 영혼 위에서 몸을 뒤틀던 달콤한 푸른 히아신스.
너의 두 눈은 멀리서 떠돌고 가을은 아득하다. 회색빛 베레모, 새의 소리, 집의 가슴, 나의 깊은 갈망은 그리로 옮겨 가고 행복한 입맞춤이 숯불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배 위에서 바라보는 하늘.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들판. 너의 기억은 빛과 연기, 잔잔한 연못의 추억 너의 눈 너머에선 석양이 불타고, 마른 가을 낙엽이 너의 영혼 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정현종 역)- 나는 네 모습을 기억한다
나는 지난가을의 네 모습을 기억한다 너는 회색베레요 조용한 가슴이었다. 네 눈 속에서 황혼의 불꽃들이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나뭇잎은 네 영혼의 물에 떨어졌다.
기어오르는 식물처럼 내 팔을 끼고 이파리들은 느리고 평화로운 네 목소리를 거두었다. 내 갈증이 타고 있는 경외의 모닥불, 감미로운 푸른 히아신스가 내 영혼을 감아붙였다.
나는 네 눈이 여행하는 걸 느끼고, 가을은 사방 아득하다: 회색 베레, 새의 목소리, 내 깊은 그리움이 이주하는 집과 같은 가슴 그리고 내 키스는 떨어진다, 잔화(殘火)처럼 행복하게.
배에서 보는 하늘, 언덕에서 바라보는 들판: 너를 생각하면 기억나느니 빛과 연기와 고요한 연못 네 두 눈 너머, 저 멀리, 저녁은 타오르고 있었다. 마른 가을 잎이 네 영혼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첫댓글 장재선님의 글입니다.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