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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안렴사공이 진주목사에 임명되어 졸옹 최해의 문집인 [졸고천백]과 [동인지문사륙]을 발간하게 된데 대해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 1354년에 [졸고천백]은 완간을 하고 이듬해인 1355년에 갑자기 [동인지문사륙] 발간작업을 중지를 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갑자기 진주목사를 그만 두고 [동인지문사륙] 발간을 중지하게 된데는 당시의 상황을 알아 볼 필요가 있는데 최용생의 고향인 전주에서 엄청난 사태가 발생한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전라도 안렴사 정지상이 어향사를 잡아 가두다.
경상도 안렴사 최용생은 단지 어향사의 죄상을 적은 방을 붙여서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가 안렴사에서 쫏겨 났지만, 1355년 2월달에 최용생의 고향인 전주에선 왕을 아주 곤란하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전라도 안렴사로 파견되었던 정지상(鄭之祥)이란 사람이 원에서 파견된 어향사(御香使) 야사불화(壄思不花)를 전주 관아에 감금 한 사건이다.
고려사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사 공민왕(恭愍王) 4년(1355년) 2월
全羅道按廉鄭之祥囚元御香使埜思不花于全州 自詣白王 王驚愕 下之祥巡軍獄.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정지상(鄭之祥)이 전주에서 원(元)의 어향사(御香使)인 야사불화(埜思不花, 예스부카)를 가둔 후에 스스로 왕에게 나아와 보고하니 왕이 경악하여 정지상을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켰다.
고려사 공민왕(恭愍王) 4년(1355년) 5월
乙巳 元遣斷事官買住來 鞫鄭之祥.
을사년(1355년) 원(元)이 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보내와 정지상(鄭之祥)을 국문하였다.
고려사 열전(列傳) 권제27 제신(諸臣)
鄭之祥, 河東郡人. 因其妹, 往來于元, 値恭愍入侍, 隨從有勞. 及王卽位, 驟遷至監察持平, 不諳事理. 爲全羅道按廉, 入境遇勢家所使, 輒搒掠徇示諸郡, 一道寒心. 埜思不花, 本國人也, 入元有寵於順帝. 其兄徐臣桂爲六宰, 弟應呂爲上護軍, 依勢作威福, 國人畏之. 不花降香至本國, 所至縱暴, 存撫·按廉, 多被辱罵, 莫敢違忤. 至全州, 之祥迎候恭謹, 不花待遇甚倨. 接伴使洪元哲, 有求於之祥, 之祥不聽, 元哲激怒, 不花曰, “之祥慢天使.” 不花縶縛辱之, 之祥忿恚大叫, 紿州吏曰, “國家已誅諸奇, 不復事元, 命宰相金敬直爲元帥守鴨江. 此使者易制耳, 若等何畏而不我救? 將見爾州, 降爲小縣也.” 邑吏呼噪而入, 解縛扶出. 之祥遂率衆執不花·元哲等囚之, 奪不花所佩金牌, 馳還京. 過公州, 執應呂, 以鐵椎檛之, 數日而死. 之祥來白王, 王驚愕下巡軍, 命行省員外鄭暉, 逮捕全州牧使崔英起及邑吏等. 又遣車蒲溫, 齎內醞慰不花, 還其牌. 元遣斷事官買住來鞫之祥. 王誅諸奇, 釋之祥, 爲巡軍提控, 再輔戶部侍郞·御史中丞, 官至判事卒.
性嚴酷, 凡戮死罪, 必遣之. 之祥妻寡居潭陽, 爲倭賊所害. 辛昌時, 子從爲典理佐郞, 上復讎策, 自請爲召募別監, 得兵百餘人, 隨朴葳, 擊對馬島. 後改渾.
정지상(鄭之祥)은 하동군(河東郡) 사람이다. 그의 누이로 인하여 원에 왕래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에게 입시(入侍)할 기회를 얻어 〈원에〉 따라가 공로가 있었다. 왕이 즉위하게 되자 정지상은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이르렀으나 사리(事理)에는 어두웠다. 정지상이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어 관내에 들어갔는데 권세가가 시키는 바에 따라 함부로 매질하고 노략질하며 제군(諸郡)을 순시하니 온 도내의 인심이 외면하였다. 야사불화(埜思不花, 예스부카)는 고려 사람으로 원에 들어가 순제(順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는 육재(六宰)가 되었고, 동생 서응려(徐應呂)는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세력에 의지하여 위세를 부려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예스부카가 강향사(降香使;어향사)로 고려에 오자 가는 곳마다 제멋대로 횡포를 부려서 존무사(存撫使)와 안렴사가 모욕을 당하는 것이 많았으나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예스부카가 전주(全州)에 이르자, 정지상이 맞이하기를 공손하게 하였으나 예스부카가 그를 대우하는 것은 매우 거만하였다. 접반사(接伴使) 홍원철(洪元哲)이 정지상에게 구하는 바가 있었는데 정지상이 들어주지 않자 홍원철이 격노하여 예스부카에게 말하기를, “정지상이 황제의 사신을 업신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예스부카가 그를 포박하여 모욕을 주었다. 정지상이 매우 화가나 크게 소리를 질렀으며 주리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이미 여러 기씨(奇氏)들을 주살하고 다시 원을 섬기지 않기로 했으며, 재상(宰相) 김경직(金敬直)을 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이 사자(使者)를 제압하기 쉬운데 너희들은 어찌 두려워하여 나를 구하지 않는가? 내가 장차 이 고을을 보니 강등하여 작은 현으로 삼아야하겠구나.”라고 하였다. 읍리(邑吏)들이 소리를 지르며 들어가 정지상이 결박을 풀고 나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지상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예스부카와 홍원철 등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으며, 예스부카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를 빼앗고 서울로 돌아왔다. 공주(公州)를 지나면서 서응려를 붙잡아 쇠몽둥이로 때리니 며칠 만에 죽었다. 정지상이 돌아와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뢰었는데 왕이 놀라 정지상을 순군에 가두었으며 정동행성원외랑(征東行省員外郞) 정휘(鄭暉)에게 전주목사(全州牧使) 최영기(崔英起)와 읍리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그리고 차포온(車蒲溫)을 보내어 예스부카에게 술을 하사하고 위로하게 하였으며 금패를 돌려주었다. 원이 단사관(斷事官) 매주(買住)를 보내어 정지상을 국문하였다. 왕이 여러 기씨들을 주살하자 정지상을 풀어주었으며 순군제공(巡軍提控)으로 삼았고, 다시 호부시랑(戶部侍郞)과 어사중승(御使中丞)에 보임하였다. 정지상은 관직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정지상은 성격이 매우 엄하고 잔혹하여, 사형 죄인을 죽일 때는 반드시 그를 보내었다. 정지상의 처는 담양(潭陽)에 홀로 살았는데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창왕 때 아들 정종(鄭從)이 전리좌랑(典吏佐郞)이 되자 왜적에 복수할 계책을 올리고 스스로 소모별감(召募別監)이 될 것을 청하여 군사 수백여 명을 얻을 수 있었으며, 박위(朴葳)를 따라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였다. 후에 이름을 정혼(鄭渾)으로 고쳤다.
어향사란 표면상으론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고려의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치성을 드리는 중요한 직책이었기에 어향사가 가는 곳에는 이들의 접대를 위해 접반사(接伴使)가 따르고 해당 지역의 지방관도 어향사의 임무나 요구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 때문에 어향사나 이를 수행하는 접반사의 횡포가 잦았고 해당 지역의 지방관은 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에 들어온 야사불화는 가는 곳마다 방장하게 횡포를 부리니 해당 지방의 안렴사(按廉使)는 욕을 먹곤 했다. 야사불화가 전주에 들어오자 소문을 들은 안렴사 정지상은 정중히 맞이하였다. 하지만 어향사라는 황제의 사신을 등에 업은 접반사 홍원철(洪元哲)이 문제를 일으킨다. 홍원철이 정지상에게 모종의 청탁을 했는데 정지상이 이를 거절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홍원철은 어향사 야사불화를 부추겨 정지상이 황제의 사신을 모욕한다고 모함했던 것이다. 조그만 꼬투리만 잡혀도 문제를 삼으려는 어향사가 이를 그냥 넘길 리 없었다. 당장 정지상을 포박하도록 하여 관아의 정청 앞에 꿇어 앉혔다.
정지상이 비록 평범한 사대부가 출신이긴 하지만, 그의 누이가 원나라의 귀족에게 출가하면서 자신도 자주 원에 왕래하였고 공민왕이 입원 숙위할 때에 여기에 참여한 적도 있었으므로 비빌 언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공민왕이 즉위한 후에는 약간의 총애도 받아 요직인 감찰사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정지상은 그런 것에 믿는 바가 있어 그랬는지 어향사의 횡포를 그대로 감수하지 않았다. 그는 전주 관아의 향리들을 향해 자신을 구출하라며 이렇게 선동했다.
“나라에서는 이미 행주 기씨 일당을 주살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하였다. 김경직(金敬直)을 원수(元帥)로 삼아 압록강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사신을 사로잡을 수 있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 나를 구하지 않느냐?”
행주 기씨 일당은 물론 기황후 친족과 그 주변 인물들을 말하는데, 그들을 주살하고 다시는 원나라를 섬기지 않기로 했다는 말은 원과의 사대 관계를 종결하고 지배 복속 체제에서 독립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지어냈다고 보기에는 너무 엄청난 내용의 발언이었다. 그 말로 인한 파장이나 폭발력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고작 전라도 안렴사의 직위인 그의 처지에서 도저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향리들이 그 말에 선동되어 정지상의 포박을 풀어주고 반대로 야사불화와 홍원철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야사불화가 차고 있던 금패(金牌)까지 빼앗아 버렸다. 금패는 황제가 사신에게 내리는 신용장 같은 패찰인데, 이를 빼앗고 사신을 감금한 것은 원나라의 황제에 대한 명백한 저항이었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것이다.
정지상은 빼앗은 금패를 들고 의기 양양하게 개경으로 말을 달렸다. 왕에게 보고하려는 것이었다. 개경으로 가는 길에 공주에서 야사불화의 동생인 서응려를 붙잡아 쇠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공민왕에게 직접 보고까지 생각한 것은 뭔가 분명히 믿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은 정지상의 보고를 받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즉시 정지상을 순군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바로 정동행성의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여 정지상의 말을 듣고 어향사를 감금하는데 협조했던 향리들과 전주목사 최영기(崔英起)를 체포하게 했다, 그리고 따로 사람을 보내 야사불화를 위로하고 금패를 돌려주었다.
배원정책을 펴면서 친원파들을 척결하던 공민왕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원나라 남쪽지방에선 홍건적이 발생하여 이를 소탕하기 위하여 원나라는 고려에 원군 파병은 물론 여러가지로 요구사항이 많았던 때이며 1355년 당시에도 최영장군이 원나라로 군사2천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어 원나라 현지의 고려인 2만명을 합류시켜 홍건적 5만명을 물리치고 귀국하던 때이다. 안그래도 어떻게 하면 원나라의 요구를 줄여볼까고 전전긍긍하던 중인데 이런 때에 원나라 황제가 파견한 사신인 어향사를 두둘겨 패서 옥에 가뒀으니 공민왕의 입장이 난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후 이 사건은 이상하게도 별 탈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그해 5월에 원에서 단사관이 파견되어 정지상에 대한 국문(鞫問)이 이루어졌지만 정지상은 별다른 형벌을 받지도 않았고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도 않았다. 그해 11월에는 전주를 부곡(部曲)으로 강등시키는데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분명히 정지상이 자신을 구출하라며 향리들을 선동했던 발언이 원 조정에 들어갔다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을 텐데, 원 조정에서는 오히려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고 미온적인 처결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어쩌면 당시 중원 대륙 곳곳에서 확산되던 반원적 민중 봉기 즉 홍건적의 난이 원의 고려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약화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정지상이 기황후 일족들에 대한 제거를 외치며 어향사를 감금했던 것은 너무 성급했던 행동이었다. 공민왕이 설령 기씨 일족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드러내놓고 기씨 일족을 제거할 수도 없었던 입장이었다. 하지만 개인이 그렇게 돌발적으로 기씨 일족의 제거를 외치고 나섰다는 것은 기씨 일족에 대한 반감이 고려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방의 향리들까지 기씨 일족을 제거하겠다는 선동에 동조했다는 것은 조야의 대세가 그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적당한 때가 오기만 하면 기씨 일족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일이었는데, 기철과 기륜 등 당사자들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정지상의 이런 행동으로 인하여 최용생의 고향인 전주는 하루 아침에 천민들이 거주하는 부곡(部曲)으로 강등이 되고 대대로 전주지역의 호족이었던 전주최씨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평소 공민왕을 믿고 따랐던 최용생으로선 공민왕의 이런 처사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진주목사를 사임해 버리고 개경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향인 전주로 갈 수도 없는 바 잠시 칩거를 하였던 사천의 장령골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최용생은 사헌부 지평 재임시 당시 실세였던 기씨 일당들이나 어향사들의 행패를 적당히 눈감아 줬다면 출세를 하였을텐데 그렇지 못하고 앞뒤를 안가리고 실권층을 공격한 것은 오늘날 검사가 여권 실세들의 비리를 까발리는 것과 같은 짓인 바 좌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리가 없었을 것이며 진주목사 재임시 공민왕의 태도가 바뀐 것은 당시의 공민왕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진주목사직을 걷어차 버리고 사천의 골짜기로 들어가 은거를 한 행동은 후손인 최씨들의 성격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꼬장꼬장한 성격' 그 자체임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