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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유 게시판 스크랩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 이순신 2부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112 14.04.27 21: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전]

 

 


3부작 난중일기 - 인간 이순신의 기록

 


일본 오사카 성. 이곳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기록한 한 장의 문서가 남아 있다. 조선을 다시 치라는 도요토미의 명령. 주요 공격지는 일차전쟁 패배의 원인이 되었던 전라도였다.1) 1597년 정유년 왜군은 다시 조선을 쳐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시기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극한 고통이 잘 들어나 있다.


‘열 차례나 토하고 밤새 괴로워했다. 머리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심사가 어떠하겠는가.’


쓰러져가는 조선을 지켜보며 홀로 고뇌했던 이순신. 절망에 순간 찾은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必死則生’ 그것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였다.


제2부 고자 하면 것이다


임진왜란 첫해에 격렬한 전투 후 전쟁은 한동안 소강상태를 맞이합니다. 그동안 명나라와 일본의 지루한 강화협상을 계속되지만 협상을 결국 결렬됐고 자자들 듯 했던 전운은 또 한 차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1597년 정유년 다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정유년에 시작된 2차 전쟁은 임진왜란 초기보다 더 잔인한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급박했던 시기 이순신은 더없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순신이 남긴 정유년 6개월간의 기록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모습에 인간 이순신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7년간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순신은 한해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서 남겼다. 무려 일곱 권의 달하는 이순신의 친필 일기. 이중 정유년에 기록된 일기를 찾아보았다. 이 해에 는 유독 이순신의 비통한 심경을 들어내는 글이 많다.


“영전 앞에서 울부짖으며 곡을 하노라니 어찌하오 어찌하오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일찍 죽어버리는 것만 못하리라.”


노승석 교수 순천향대

“이것은 ‘백의종군로를 걸으면서 어머니의 상사를 당한 상황에서 뜻밖의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표현들을 써가면서 죽기를 기다린다’는 표현”


1597년 정유년. 일본은 재침준비를 마치고 조선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1차 전쟁 때와는 규모부터 달랐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두로 무려 12만 명의 병력이 동원됐다. 전쟁의 열기가 달아오르던 이 시기 이순신의 일기는 3달 동안 기록이 없다가 4월 1일에서야 시작된다.

 

‘4월 1일 맑음 옥문(獄門)을 나왔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었다.’


당시 이순신은 죄인이었다. 선조의 출격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죄명이었다. 선조의 노여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조정에 끌려온 이순신은 혹독한 국문을 치른 후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오종록 교수 성신여대 사학과

“실제 선조가 노하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왕의 명령을 어겼다 자기를 업신여겼다는 것인데 선조 자신이 적자로서 세자가 되지 못하고 정통성이 강한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일종의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신하들의 자기를 능멸하는 것이 아니냐 하였는데 아마 이순신에 대해서 그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4월 3일 맑음.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날이 저물 무렵 이름도 모르는 병사의 집에서 잤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서울을 떠나 도원수 권율의 진영인 합천 초계로 향했다.


‘비가 퍼붓듯이 왔다. 말을 쉬게 했어도 길을 가기 어려워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에 이르렀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나는 기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동안 왜군은 칠천도 앞바다로 밀려들고 있었다. 천여척의 함대를 출격시킨 왜군은 이곳 칠천량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이승철 거제향토사연구소장

“여기가 칠천량 해전지입니다. 뒤에 보이는 곳이 진해입니다. 그 옆이 부산포거든요. 부산포에서 왜구들이 와서 진해 앞으로 해서 전라도를 향하면서 이곳 칠천량 해전지에 왔습니다.”

 

 


일본 츠지시. 이곳에 칠천량 해전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한 장수가 모셔져 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조선 수군에게 최초 패배를 안겨준 토도 다카토라. 과거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했던 다카토라는 칠천량 해전으로 설욕했다.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침몰했다. 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기록을 통해서도 당시 조선의 피해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2)

 


물에 빠져 죽은 조선군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칠천량 해전의 승전보는 일본 조정을 흥분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기뻐하며 토도 다카토라에게 투구를 하사했다.


“이 투구는 토도 다카토라가 조선 출병 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덕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조선의 상황은 참담했다. 주력함대였던 판옥선 100여척과 거북선까지 모두 침몰했다.


이민웅 교수 해군사관학교

“칠천량 해전 이후 조선수군의 상태는 궤멸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표현일거 같습니다. 칠천량 해전 이전 약 4년간의 강화교섭기 동안에 많은 준비를 했던 조선수군이 약 10여척을 제외하고 전부 일본군에 의해 격멸당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해전이 칠천량 해전입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칠천량 해전의 비보를 접할 것은 전쟁 이틀 후였다.3) 이순신은 참담한 심정으로 패전의 현장을 찾는다.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와 만호 조계종 등 열 명이 와서 통곡하고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함대는 물론 이순신과 전장을 함께 했던 조선 수군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이순신은 통곡했다.


‘새벽에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이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고 한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이 막다른 상황에서 이순신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당시 이순신의 행적이 기록된 역사적인 장소가 남아 있다. 바로 이곳에서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받는다.


손현권씨 

“이 집터가 저희 손경례 할아버님이 이 집터에 사셨는데 그때 마침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을 받으신 그 장소가 되겠습니다.”


‘8월 3일 맑음.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뜻밖에 들어와 교서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은 곧 삼도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백의종군의 몸에서 다시 임명받은 이순신. 파직시켰던 이순신을 다시 불러들여야 했을 만큼 선조도 다급했다. 급기야 선조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는 모습까지 보였다.4) 수군의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 일기에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이 적혀있다.


‘8월 9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낙안군에 이르니 관사와 창고와 병기가 모두 타버렸다. 관리와 백성들도 눈물 흘리며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라도 보성군 고내리 마을.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정유재란 당시 이곳은 전라도 지역에서 세곡을 보관하던 조양창이라는 창고였다.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 군량미라도 모으기 위해 이곳 조양창을 찾는다.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에 이르니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창고에 곡식은 봉해둔 채 그대로였다.’


이순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군관 9명과 군사 6명이 전부였다. 수군통제사 이순신. 그러나 배 한척 가지지 못한 맨몸의 수군통제사였다.


‘원수가 보낸 군사들이 모두 말도 없고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데가 없었다. 매우 한탄(恨歎)스러웠다.’


조선수군이 궤멸된 직후 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된 이순신. 배 한척 무기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서 다시 전쟁을 준비해야만 했던 이순신의 심정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어떡해든 조선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했습니다.


조선수군을 침몰시키고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전라도를 점령한 후 서울까지 진격한다는 것이 왜군의 목표였다. 왜군은 수군과 육군의 합공으로 빠르게 북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남원,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정유년 팔월. 조명연합군은 남원 성을 사이에 두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조총과 포로 무장한 왜군은 남원성을 두세 겹으로 포위할 정도에 대규모 부대였다.


한병옥 이사 남원문화원.

“정유년 당시 남원성에는 군사는 4천여 명밖에 없었고 일반백성까지 전부 포함해서 일만 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왜군은 정예군사죠. 잘 훈련된 5만 6천여 명이 남원 성을 쳐들어왔으니까 일당백이라도 힘에 겨웠을 텐데 3박 4일 이상을 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만 해도 사실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정유년 8월 15일 남원성은 최후의 결전을 치루고 있었다. 왜군은 급기야 성 안으로 진격했고 4일을 버티던 남원성은 끝내 무너졌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맞서 화살촉으로 버티던 남원성의 군사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남원성이 함락되고 하루가 지난 8월 17일. 이순신은 이곳 전라남도 장흥에서 배를 찾아 나섰다.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 한척의 배라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당시 이순신이 찾던 배는 조선수군의 주력함대였던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무엇보다 선채가 가장 큰 장점이었다. 적선과 일대일로 충돌해도 끄떡없을 정도로 그 힘이 막강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경상수사 배설이 가지고 달아난 12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5) 그러나 이 열두 척에 배마저 쉽게 오지 않았다.


‘8월 17일 맑음. 수사 배설이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8월 18일 맑음. 배설이 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절망했다. 일기에서는 배설에 대한 괘씸함도 숨기지 않았다. 이순신이 배를 찾아 헤매던 정유년 8월. 남원성까지 점령한 왜군은 더없이 잔인해져갔다. 조직적인 양민학살을 명령받은 왜군은 전라도 지역에 무수한 양민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조선인들의 코까지 베어갔는데 당시 잘려나간 코만 수만 개에 달했다. 이 잔혹한 현실을 낱낱이 목격했던 이순신은 더없는 좌절을 느꼈다.


‘길을 떠나 옥과 경계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난민들이 길에 쓰러져 가득하며 남녀가 서로 부축하여 갔다. 그 개탄스러운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일본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정유년 왜군의 만행을 증명하는 한 장의 문서가 있다. 바로 코 영수증이다.


‘금구와 김제에서 벤 코의 숫자는 3369개 정확히 수령하였음 - 10월 1일’


코를 벤 숫자와 수령했다는 확인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정유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무려 2만 여명의 코가 잘렸다. 그렇게 잘린 코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6) 심지어 산사람의 코도 베었을 정도로 왜군의 잔인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7)


‘에비야’ 이 말은 우는 아이를 달랠 때 흔히 쓰는 말이죠. 그런데 에비야에서 에비라는 단어는 귀(耳)와 코(鼻)를 뜻하는 입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닥치는 대로 귀와 코를 베어 가던 왜군의 만행을 두려워하며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입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던 것입니다. 조선이 피로 물들던 정유년 8월 이순신은 이 참담한 현실을 홀로 견디며 조선 수군에 재건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정유년 8월 이순신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8월 7일 맑음. 패하여 줄을 이어 돌아가는 군사들로부터 말 세필과 활과 화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8월 8일. 순천부에 이르러 병기 중에 장전, 편전은 군관들에게 져 나르도록 하고 총통같이 운반하기 어려운 것들은 깊이 묻고 표를 세우도록 했다.’


성안 무기는 모두 왜군이 가져가고 그나마 남은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배설을 찾아 회령포까지 내려온 이순신은 마침내 기다리던 배 12척을 손에 넣는다. 배는 얻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배에 태울 군사도 필요했고 노를 저를 격군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돌아온 배는 격군도 기구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8)

 


그렇다면 당시 왜군의 전력은 어떠했을까. 나고야성 박물관에 전시된 아타카부네. 정유재란 때 왜군이 탔던 주력함대로 조선의 판옥선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배였다. 이 배 함대를 중심으로 왜군은 완벽한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나고야 박물관 학예사

“이 배의 주변에 세키부네라는 작은 배들이 따라다니며 집단으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왜군의 학살이 자행되던 정유년 8월. 일본은 이미 8개 부대에 상륙을 완료한 상태였다. 더구나 수군의 전력도 더욱 막강해졌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충격적인 내용의 교서를 받는다. 수군을 포기하고 육전에 임하라는 것이었다.


이민웅 교수

“칠천량 해전 패전 결과 남은 전선이 십여 척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십여 척으로 수백 척의 일본수군에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선조 임금은 이순신에게 차라리 육지에 올라와서 ‘도원수가 육전을 하는 것을 돕는 것도 좋겠다’라는 그런 의견표시를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던 정유년 가을, 이순신은 웅크리고 있었다.


‘9월 3일(명량해전 13일 전). 비가 뿌렸다. 배의 뜸(거적 지붕) 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앉아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겠는가.’


한동안 이 웅크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9월 12일(명량해전 4일전). 종일 비가 뿌렸다. 배의 뜸 아래에서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쓰인 글자 중에 하나가 바로 이 ‘縮’입니다. ‘오그라들다’, ‘웅크리다’라는 뜻인데요. 실제로 우리 난중일기 가운데 이순신의 웅크린 모습을 자주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순신의 모습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던 장수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기록한 실제 일기 내용과는 다소 다릅니다. 실제 일기에 있는 내용 중 일부가 난중일기에는 빠져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순신의 실제 일기와 난중일기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또 난중일기에서 지워진 기록은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정조대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이순신이 죽은 지 거의 2백년 후에 만들어진 이순신의 유고전집이다. 바로 이 책에 난중일기가 실려 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친필일기 일부를 발췌하고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친필일기 원문을 보면 난중일기와는 적지 않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노승석 교수

“생략이 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초고본에는 있는데 이충무공전서본에는 없단 말이죠.”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여인인 여진에 관한 기록이나 이순신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모습들은 모두 빠져 있다.9) 이순신의 영웅적인 면모만 부각시키려했기 때문이다.


노승석 교수

“정조 때 전서본(난중일기)을 간행할 때 가족사적이고 개인적이고 주변적인 여인관계라든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간간이 누락이 된 경우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삭제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순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우리가 상상하는 용맹한 장수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오히려 단아한 선비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10) 경희대 김남일 교수팀에 의뢰해 이순신의 신체적 특징을 분석해 보기로 했다. 자신의 신체 증상을 단기간에 걸쳐 자세히 기록한 난중일기를 기본 자료로 삼았다. 먼저 ‘불편’이라는 단어를 검사해 보았다. 불편하다는 기록은 7년간 무려 90여회나 나온다. 이외에도 이순신은 갖가지 신체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코피를 한데나 흘리거나 이불을 적실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또 밤에 구토를 하는 일도 많았다.


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코피를 자주 흘리셨고 땀도 자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곽란의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증상을 많이 갖고 계셨다는 것은 이순신장군께서는 체력적으로 상당히 저하된 상태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코피를 많이 흘리는 것은 피로가 누적된 것을 견뎌내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곽란 같은 경우는 소화 계통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인데......”


이순신이 해남 이진으로 진을 옮기는 날 왜군도 이순신과 하루 이틀 차이를 두고 전라도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보이지 않았다.


‘8월 20일 맑음. 창사로 진을 옮겼는데 이 날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않고 앓았다.’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는 곽란은 이순신이 평생 앓던 고질병 중에 하나였다.


‘21일 맑음. 새벽 두 시 경에 곽란이 일어났다.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그만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십 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했다.’

‘22일 맑음.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용변도 보지 못했다.’


이순신은 무려 4일 동안을 곽란에 시달렸다. 겨우 회복되긴 했지만 고통은 여전했다. 육체적 아픔보다 이순신을 더욱 괴롭혔던 것은 군사들이 지닌 공포였다.


‘25일 맑음. 왜적이 밀려온다는 헛소문이 퍼졌다.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의 목을 베어 인심을 안정시켰으나 수사 배설은 이미 도망쳐버렸다.’


당시 조선수군은 극도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급기야 명량해전을 14일 앞두고 이순신 바로 아래 장수였던 배설이 도망을 쳤다.


‘9월 2일 맑음. 이날 새벽에 배설이 도망쳤다.’


이민웅 교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의 패배는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고 말 그대로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때문에 나머지 십여 척을 가지고 수백 척의 일본 수군에게 대항한다는 것 자체를 아마 배설을 불가능하다고 봤을 것입니다. 때문에 해전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갔던 것입니다.”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던 군사들 앞에서 이순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산 현충사에서 하나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이순신이 무인의 기상을 가다듬기 위해 방에 걸어두고 보았다는 한 자루의 칼. 길이 2m에 달하는 장검이다. 이 장검에 이순신은 직접 글을 새겨 넣었다. 그것은 산천을 위협하는 비장한 맹세였다.11) 그 비장함 속에서 이순신은 답을 찾았다.


정유년 9월 15일 명량해전 하루 전. 이순신은 군사들을 불러 모아 마지막 연설을 한다. 그것은 ‘필사즉생’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내린 이순신의 마지막 결단. 마침내 이순신에게 다시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9월 15일 맑음(명량해전 하루 전). 밤에 이상한 징조가 많았다.’


명랑해전을 하루 앞둔 9월 15일. 조선수군 진영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한산도에서 전라도 해역 끝자락까지 밀려난 조선군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던 비장한 결의. 이순신은 마침내 열두 척의 배를 이끌고 왜군과의 결전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이순신이 택한 곳은 명량해협이었다. 폭이 좁은 명량해협은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순신이 노린 곳은 바로 이 물살이었다. 명량해전 하루 전 이순신은 진을 전라우수영으로 옮기고 적이 명량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9월 16일 맑음. 아침에 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무려 200여 척의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장 온다고 했다.’


마침내 대규모의 왜선이 명량해협으로 밀려왔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당시 왜선의 규모는 330여척, 토도 다카도라, 구루시마 등에 쟁쟁한 장수들이 이 대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왜군의 목표는 명량해협을 지나 서해를 통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겠다는 것이었다. 명량해전이 발발한 9월 16일. 이순신은 이날의 일기를 가장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할 것을 밝히고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샀다.’


엄청난 규모의 왜선을 마주한 체, 이순신의 배가 선두로 나섰다. 하지만 이순신의 뒤를 따라야 할 11척의 배들은 앞으로 한발 짝도 나오지 않았다.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1마장 쯤 물러가 있었고 우수사가 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여러 배들이 서로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병사들은 달아날 꾀만 내고 있었다.12) 두려움이 조선수군의 발목을 잡고 있는 이 순간.


‘적에게 둘러싸여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군사들에게 부드럽게 타일렀다.’

‘적이 천척이라도 감히 곧바로 우리 배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병사들은 이순신이 두려워 뒤로 물러서지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체, 쩔쩔매고 있었다. 병사들의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공포, 이것이 이순신의 가장 큰 적이었다. 명량해협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진도의 망금산. 당시 조선백성들은 이곳에서 명량해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에게 포위된 체, 제대로 싸우지 조차 않는 조선 군사들을 지켜보며 백성들은 통곡했다.13) 주저하던 부하들을 향해 이순신은 마침내 분노를 토했다.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는 냉혹한 장수의 분노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어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나는 호각을 불고 깃발을 세워서 안위의 배와 김응함의 배를 불러 모았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에게 말하였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니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이순신은 왜군과 싸우지 않는 자는 자신의 손에 처형당할 것이라며 군사들을 몰아부쳤다.14) 궁지에 몰린 군사들은 적진으로 나가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곧장 적진에 들어가 교전하였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한 채 마구 쏘아댔고 내 배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쏘아댔다.’


최악의 순간을 맞고 있었던 조선수군. 당시 조선함대는 이 물살을 거스르지 못해 앞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정오가 가까워 오면서 물살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물살의 변화 이것이 결국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명량해협의 물살은 하루에 네 번 약 여섯 시간마다 방향이 바뀐다. 물살이 워낙 강해 한번 흐리기 시작하면 거스르기란 쉽지 않다. 배도 엄청난 동력을 이용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해전 당일 오전 11시를 넘어서면서 물살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한다. 역류를 탄 왜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했고 이순신은 이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가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또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적장 마다시의 시체를 토막 내어 적에게 보이게 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드디어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달아나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일본함대 100여척 이상이 부서지거나 침몰했다. 왜군은 사상자만 일만 여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왜군의 참패를 떠올리게 하는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상호 기자와 해남군청 해양수산과 이성수의 대화

‘저기 보이는 저곳이 피섬입니다.’

‘그런데 왜 피섬이라고 부르나요?’

‘명량해전 때 왜군들의 시체가 떠밀려 피범벅이 되고 붉게 물이 들어서 그때부터 주민들이 피섬, 혈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선택은 옳았다. 이순신은 이 좁은 명량해협에서 왜군을 격퇴하므로 결국 조선을 구해냈다.


이민웅 교수

“사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카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칠천량 해전 이후에 계속해서 서남쪽 해안으로 내려오면서 조선수군의 세력을 응집해 나가는 그러한 준비과정을 거쳤고 마지막으로 택했던 곳이 좁은 수로였던 명량을 택해서 그 길목을 차단하는 그러한 전략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토 일본수군사 연구가

“명량해전에서 패배함으로써 결국일본은 조선에 상륙하겠다는 계획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결정적 패배로 인하여 일본은 상륙작전을 완전히 단념하게 됩니다.”

 


절망과 두려움 끝에 찾아온 승리. 이순신은 조선수군에 명장으로 돌아왔다. 역사의 영웅으로만 기억되고 있는 이순신 그러나 정유년 이순신은 고독하게 웅크린 한 인간이었다. 개인적인 시련과 아픔에 더해 조선수군이 무너지고 나라가 흔들리고 위태로움이 이순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혹한 고통과 좌절의 시간들을 이겨냈던 인간 이순신. 그는 이렇게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명량해전 8일 후 이순신은 다시 앓기 시작한다.


‘9월 24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

‘9월 25일 맑음.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9월 26일 맑음.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못했다.’


이순신이 역사 속에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장수라서가 아니라 극한의 고독과 두려움을 견뎌내고 그 속에서 조선의 살 길을 찾아낸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이 명량해전에서 일궈낸 승리는 필사즉생의 각오로 얻어낸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이순신의 다시 왜군과의 일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 이순신의 생애 마지막 전투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을 금합니다.


1) ‘赤國不殘悉一篇成敗申付’ 전라도는 남김없이 모두 한 번에 쳐라.

2) 정한위략.

3) 정유년 7월 21일 경남 노량을 찾는다.

4)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5) 난중잡록.

6) ‘코를 베어 소금에 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었다.’  傳 : 지봉유설

7) 지봉유설.

 

8) ‘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꼴이 놀랄 만한 일이다.’  傳 : 이순신 정유년 일기 中.

9) 이순신의 친필일기 중에서 - ‘달빛이 하얀 비단결처럼 고우니… 밤늦게 까지 감상에 젖었다’

10) 징비록.

11) 三尺誓天 山河動色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다.

12) 이순신 정유년 일기 9월 16일 中.

13) ‘적에게 포위를 당하니 마치 구름과 안개 속에 파묻힘과 같을 뿐이요 ...... 피난 온 백성들이 통곡하여 이제 이렇게 되니 우린 어디로 가야하오 하였다.’ 傳 : 이충무공전서.

14) 이순신 정유년 일기 9월 16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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