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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의 10세 정운(鄭澐) 무안현감 장도(壯途) 시부(詩賦)
Ⅰ. 승지공파 10세 현감 정운(鄭澐 1577~1636)의 족보기록 검증
- 1577년 생 : 생년 이상
- 1591년 진사 1594년 무과 : 문헌 미확인
-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왕조실록
- 1606년 조선 포로 송환 사절인 회답사(回答使)의 무관, 왕조실록
- 무안현감(務安縣監), 강항의 시
- 1634년 장수현감(長水縣監), 왕조실록
- 1636년 졸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다. 족보의 기록에 몇 가지 의문 사항이 생긴다.
첫째, 진사 및 무과 기록은 사마방목 및 국조방목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른 형제들의 진사 기록은 사마방목으로 확인되고 있다. 진사 합격은 확인할 수 없으나, 무과 출신이란 사실은 왕조실록에서 간접 확인할 수 있다. 선조 39년인 1606년 조정은 일본으로 조선 포로를 귀환시키는 사절단인 화답사(回答使)의 무관으로 허수(許售)를 내정한 바 있으나, 무과 출신이 아니므로 전 선전관 정운으로 교체토록 하였다. 선전관(宣傳官)은 왕명을 출납하는 복심(腹心)으로 가문과 무예 까지 엄밀한 심사를 거친다.
둘째, 생년이 의아하다.
다른 형보다 20여 년 차이가 나는 것도 이상하고, 1577년(丁丑)이 맞다면, 15세에 진사 합격이고, 17세에 무과 급제다. 오히려 조카뻘인 생질(甥姪) 강항(姜沆)이 나이가 많다.
ㅇ 명(溟) 1551년, 영(濚) 1554년, 화(𣲲) 1558년, 운(澐) 1577년
ㅇ 생질 강항(姜沆) 1567년
왕조실록 기록으로 1606년 12월에 출발하여 1607년 7월에 조선 포로 1,240명을 귀환시킨 화답사의 수행원임이 밝혀졌고, 1634년 장수현감(長水縣監)에 재직하였음도 밝혀졌다. 또한, 강항이 쓴 수은집(睡隱集)에 정운(자 景恬)을 위해 쓴 부(賦)와 시 두수가 있는데, 무안현감의 장도(壯途)를 기념하는 기록이다.
◇ 족보
1577년 생
1591년 신묘 진사(문헌 미확인)
1594년 선조 27년 갑오 무과(문헌 미확인)
무안현감(務安縣監)(문헌 미확인, 강항 서신 간접확인)
1636년 졸
◇ 왕조실록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1606(선조 39년) 5.6 회답사(回答使)의 무관 추천
| ◆ 선조 39년 5월 25일 임진 1606년 비변사에서 허수 대신 전 무겸 선전관 정운을 추천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허수(許售) 대신 갈 사람을 의당 엄선해서 보내야 하는데, 연소한 무신 가운데 이력(履歷)과 명망이 드러난 자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정운(鄭澐)은 글에 능하고 계려(計慮)가 있어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이 사람을 차송(差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備邊司啓曰: "許售之代, 當極擇差送, 年少武臣中, 有履歷、名稱已著者, 未易得之。前武兼宣傳官鄭澐, 能文有計慮, 群議皆以此人差送宜當, 敢啓。" 傳曰: "允。“ |
| ■ 회답사(回答使) 일본의 요청으로 1607년(선조 40)·1617년(광해군 9)·1624년(인조 2) 세 차례에 걸쳐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된 조선의 국왕사절. 일본 막부장군이 먼저 국서를 보낸 데 대하여 조선이 ‘회답’하고,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쇄환’한다는 두 가지 목적을 띠고 파견된 사행을 지칭한다. 임진왜란 이후 1607년·1617년·1627년에 조선 왕이 일본의 막부장군에 보낸 회답겸쇄환사를 말한다. |
1606(선조 39년) 10.10 회답사(回答使)의 차관(差官 軍官)으로 합류
| ◆ 선조 39년 10월 10일 을사 1606년 회답사 여우길이 데려갈 군관 명단을 보고하다.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이 아뢰기를, "신이 데려갈 군관으로, 훈련원첨정 채겸진(蔡謙進)과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신경빈(申景濱)·나신도(羅伸道)·정운(鄭澐)과 포수(砲手) 겸사복(兼司僕) 신충선(愼忠善)·최애립(崔愛立)과 별무사(別武士) 한사일(韓士逸) 등이 자망(自望)하였는데, 이들이 조관(朝官)·포수·별무사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回答使呂祐吉啓曰: "臣所帶軍官訓鍊院僉正蔡謙進、武臣兼宣傳官申景濱ㆍ羅伸道ㆍ鄭澐、砲手兼司僕愼忠善ㆍ崔愛立、別武士韓士逸等自望, 而朝官、砲手、別武士, 故敢啓。" 傳曰: "允。" |
1606(선조 39년) 12.1 회답사(回答使) 출발
1607(선조 40년) 7.19. 회답사 귀국, 왜국 조선 포로 1,240여 명 귀환
1634.2.16. 장수현감(長水縣監)
Ⅱ. 사금성재경염정운대서(謝錦城宰鄭澐代書) 의 배경
이 글은 오언절구로 지어졌는데, 외삼촌 정운이 무안현감으로 부임할 때 직무에 임하는 당부의 말을 쓴 것이다.
강항은 외삼촌이지만 나이 차가 없는 외삼촌과 가까이 지냈음을 알 수 있는데, 무안현감에 제수되자, 당나라 덕종(德宗 재위 780~805년) 때 관중지방의 식량난을 예로 들어 항시 어려운 일을 회상하며 초심을 지키고 살아가면서 고을 원의 직무를 다하라는 당부의 글이다.
■ 당나라 덕종시 관중(關中)지방의 식량 난
당나라는 개원지치(開元之治)라는 현종의 태평성대기에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고 번진할거(藩鎭割據)의 현상이 되었다. 현종의 뒤를 이은 덕종 때인 783년에 경원병변(泾原兵变)이 일어나자, 당 덕종은 장안에서 봉천(奉天)으로 도망쳤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은 위수(渭水)가 흐르는 관중(關中) 분지에 소재했는데, 재정에 충당할 식량 및 물자는 대부분 강물을 거슬러 동부 및 남부 곡창지대에서 조운(漕運)을 통해 조달되었다. 경원병변으로 장안과 관중 지방으로 공급되던 수송망이 마비되었으므로 식량난이 발생하고 아사자가 속출되었다. 진한공을 절강성으로 보내 식량을 징발하여 수송토록 하였는데, 가까스로 3만 석의 식량을 싣고 장안의 중위교에 도착하였다.
| 這句話出自唐代歷史背景(源自《舊唐書》或相關記載),確切原句通常爲“米已至陝,吾父子得生矣”。這是唐德宗(李適)在涇原兵變逃亡至奉天時,得知韓滉運來的糧食到達陝州,深感父子(與太子李誦)有救後發出的感嘆,反映了當時漕運對於關中安危的決定性作用。 문장의 당대 역사적 배경은 《구 당서》 또는 관련 기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확한 원구는 보통 "쌀이 이미 섬서에 이르렀으니, 우리 부자가 태어났구나" 이다. 이것은 당 덕종(이괄)이 경원군란으로 봉천으로 도망갔을 때, 한황이 가져온 식량이 섬주(위교)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자(태자 이송과 함께)의 구원을 느낀 후의 한탄으로, 당시 조운이 관중 안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반영한다. * 참고 : 維基文庫 |
Ⅲ. 사금성재경염정운대서(謝錦城宰鄭澐代書)
금성 사는 고을 원 경염 정운에게 (무안현감 장도를) 글로 갈음하다.
嘗讀唐實錄 德宗貞元末, 關中歲不穩 公私俱困竭. 醉人爲上瑞 良民起殺越 禁軍脫巾呼. 洶洶不可遏 玉觴淡無味 天意方忉恒. 是時韓晉公 奉詔鎭兩浙 急督泛舟役 千帆簇如櫛 八彩忽傳春 顧謂太子曰 米至中渭橋 吾父子得活. 正類渴睡 漢 一生坐迃濶. 墮地慕唐虞 有志常覬豁 力學不逢時 與世極抹撥. 力耕不救飢 日給猶戞戞. 策名二十年 被服無短褐 奉親閼滫瀡 養軀只疏糲. 有時簞瓢空 主孟常蹙頞 見女呌索飯. 衆口鵝鴈聒 幸蒙賢地主 公廩分圭撮. 況得務安守 葭莩又苽葛 供給公私餘 每助山家鉢 淡活成卒富 窮鱗感濡沫 瘦妻面復光 喜氣生毫髮. 向我絶交徧 相對語刺刺. 末路少此色 重惠安可揭 韻語替回鱗 午月旬有八
일찍이 당나라 실록을 읽어보면 덕종 정원 말기에, 관중(關中)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공사 모두 궁핍하였다. 취객이 상서가 되고, 양민들은 살인하고 달아나고, 금군(禁軍)은 두건을 벗고 식량을 구걸하였다. 민심이 흉흉하여 진정되지 않았으며, 옥 잔의 술도 밋밋하고 맛이 없고, 하늘의 뜻도 근심이 가득하였다. 이때 한진공(韓晉公 韓滉)이 (식량 조달을 위해) 조서를 받들고 양절(兩浙 절강성)의 진(鎭)에서 독촉하여 급히 배를 띄웠는데, 천개의 돛 무리가 늘어선 것이 임금의 위용을 떨치듯 봄에 전하여졌다. 돌아서 가리키며 태자가 말하기를, “쌀이 중위교(中渭橋)에 도착하니 우리 부자는 목숨을 건졌다.” 하였다. 바로 잠 못 이루던 사람들은 땅바닥에 떨썩 주저앉았고, 요순시대를 그리워하였다.
뜻있는 사람이 항상 바라는 바는 학문에 힘쓰되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도, 세상과 더불어 닦아야 한다. 힘써 농사지으면 굶주림을 면하고 매일 풍족하여 오히려 예법을 숭상하게 된다.
출사한 지 20년에 의복은 짧은 베옷이 없고, 부모를 모심에 쌀뜨물 음식도 없으며, 몸을 건사함에 거친 현미밥은 드물다. 청빈하여 배고플 때면, 주맹(主孟)은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여자들을 만나면 나물밥을 찾았다. 뭇사람의 비난은 거위처럼 시끄럽지만, 다행히 어리석고 현명함은 거기 사는 사람의 몫인데, 공평히 거두고 나누어야 한다.
이제 무안(務安)의 고을 원은 나의 친척으로, 공사 간에 공급하고 남음이 있으면 매양 산골 사람의 밥그릇을 도와야 한다. 항시 맑게 사는 것이 부자로 죽는 것이다. 가난한 어부에게 감사하게 베풀며, 수척한 부인의 얼굴을 다시 빛나게 하여 희색이 조금이라도 돌게 하여야 한다. 나에게는 연락은 끊고 말은 자자하게 상대하여야 한다. 인생의 말기에 이러한 일도 적을 것이고 소중한 사랑으로 이에 열거하여, 운에 맞추어 물고기 비늘처럼 엮어 보내니 5월 18일이다.
곤갈(困竭 困渴) : 재물(財物)이 다 떨어져 곤궁(困窮)함.
상서(上瑞) : 중국 고대 상서로운 징조를 뜻하는 상서(上瑞), 중서(中瑞), 하서(下瑞) 등으로 나뉘는 징조 체계 중 최고 수준의 길조를 의미한다.
탈건지변(脫巾之變) : 군량이 다 떨어지는 변고.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에 관중(關中)의 군량 창고가 텅 비어서 금군(禁軍)이 모자를 벗고 길거리에서 식량을 호소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진공(韓晉公) : 당(唐)나라 중기의 명재상. 경제학자이자 유명한 화가였던 한황(韩滉, 723년~787년)을 지칭한다. 자는 태충(太冲)이며, 명재상 한휴(韓休)의 아들로 태어나, 꼼꼼하고 엄격한 성품으로 당나라 말기 경제 안정과 《오우도(五牛圖)》같은 명작을 남긴 예술가로 유명하다.
양절(兩浙) : 중국 저장성(浙江省) 일대와 장쑤성(江蘇省) 남부 지역을 통칭하는 역사적 지명으로, 절동(浙東)과 절서(浙西)를 합친 지역을 뜻합니다.
팔채(八彩) : 고대 요(堯)임금의 눈썹에 여덟 가지 채색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임금의 위용(偉容)을 이르는 말.
중위교(中渭橋) : 중국 서안(장안) 부근을 흐르는 위수(渭水)에 설치되었던 세 개의 다리 중 가운데 교량이다. 진(秦)나라 때 조성되어 한(漢)나라 때 정비된 중요한 다리로, 수도 장안과 북쪽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및 군사적 요충지였다.
갈수증(渴睡症) : 일종의 만성적인 수면장애
타지(墮地) : 땅에 떨어졌다는 뜻으로, 사람이 태어남을 이르는 말.
당우(唐虞) : 중국의 도당씨(陶唐氏)와 유우씨(有虞氏). 곧 요와 순의 시대를 함께 이르는 말로 중국 사상의 이상적 태평시대(太平時代)로 치는 시대.
기활(覬豁) : 바라는 바를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다.
말발(抹撥) : 닦다.
책명(策名) : 이름을 명부에 올리다.
단갈(短褐) : 1 굵은 베로 짧게 지은 옷. 2 짧은 베잠방이. 3 (비유어) 천한 사람들이 입는 옷.
수수(滫瀡) : 쌀뜨물에 음식을 담가 부드럽게 하는 음식 조리의 한 방법.
양구(養軀) : 몸을 기르다
단표(簞瓢) : 단사표음(簞食瓢飮(), 1 도시락과 표주박을 아울러 이르는 말. 2 ‘대나무로 만든 밥그릇에 담은 밥과 표주박에 든 물’이라는 뜻으로, 청빈(淸貧)하고 소박(素朴)한 생활(生活)을 이르는 말.
주맹(主孟) : 진나라 대부 리극의 처(晋大夫里克之妻). 후에는 주인(主人)의 부인을 지칭하였다. 后借指主人之妻
| 리극(里克 ?~기원전 650년) : 춘추 전기 진국경대부(晉國卿大夫). 진 헌공의 중요한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군사 통수권자로서 괵국(虢國)과 우나라 등의 전투에 참여하여 진나라 영토를 황하 이남으로 확장시켰다. |
축알(蹙頞) : (괴롭고 귀찮아서) 눈살을 찌푸림.
중구(衆口) : 뭇사람의 평판(評判). 또는 비난(非難).
가부(葭莩) : 1 갈대청. 2 갈대청 같이 지극히 엷은 관계. 혈연관계가 먼 친척. 3 친척. * 가부지친(葭莩之親) : 그다지 친하지 않은 먼 친척을 이르는 말.
호발(毫髮) : 가느다란 털. 아주 작은 물건(物件)을 가리킬 때 쓰는 말.
Ⅳ. 강항이 정경염에게 보내는 이별시 2수
금성별태수경염(錦城別太守鄭景恬) 금성에서 태수(지방관) 정경염을 이별하다
시경염사주나관(時景恬使酒) 광가자관고기지(羅官狂歌自寬故譏之)
이때 경염이 술을 시켜, 나관(경염)이 미친 듯 노래하며 몸소 위로하니 이를 책하게 되었다.
호거금성수(好去錦城守) 아름답게 떠나는 금성의 원님
승심부대괴(升沈付大塊) 오르고 내림 있으니 큰 책임을 맡았네
전원무한호(田園無限好) 전원을 한없이 좋아했는데
부귀유시래(富貴有時來) 부귀가 올 때도 있겠지
숙취방천일(熟醉方千日) 크게 술 취한 것이 천 일은 될 듯
광가서일애(狂歌紓一哀) 미친 듯 부르는 노래에 오로지 슬픔도 잊게 되네
북풍취우설(北風吹雨雪) 북풍에 비와 눈이 몰아치는데
이한정난재(離恨定難裁) 이별하는 아픔의 어려움을 덜 수 있을까
자금성귀태수정운출전계교(自錦城歸太守鄭澐出餞溪橋)
금성(나주)에서 태수로 돌아온 정운을 시내 다리에서 전별하다.
벽해증연예(碧海曾連袂) 푸른 바다에서 일찍이 손을 잡고
추수고곽서(追隨古郭西) 뒤쫓아 따라가니 옛 성곽 서쪽이네
심재유여흥(深材有餘興) 깊은 재목이 여흥이 있어
청창부항저(淸唱不須低) 맑은 노래 소리에 고개도 떨구지 못하네
노수춘유천(老樹春猶淺) 늙은 나무엔 봄은 오히려 오래지 않았는데
평교초이제(平郊草已齊) 들밖에 풀은 이미 자라 가지런하네
경혼다감개(競魂多感慨) 마음에는 감개도 많고
거내차분휴(巨耐此分携) 이 헤어짐은 정말 참기 힘드네
추수(追隨) : 뒤쫓아 따름. 남의 뒤를 쫓아 따름.
■ 상황 추정
경염공(정운 1577~1636)이 금성태수(錦城太守, 나주목사)를 지낸 것은 아니다. 「나주목읍지(羅州牧邑誌)」에도 이름이 없다. 태수(太守)는 지방관을 말한다. 기록으로는 무안현감(족보)과 1633~1634년경 장수현감(왕조실록)을 지냈다. 강항(姜沆 1567~1618)의 생몰년을 볼 때, 무안현감을 제수받은 해로 추정된다. 다른 지방관을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막내 외삼촌으로서 나이 차가 크지 않고 매우 가깝게 지낸듯하다. 술을 좋아했고 창가(唱歌)에 능한 모양이다.
금성(錦城 나주)에서 지방관으로 나가는 장도를 전별하는 시의 풍경을 보면 거주지가 나주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수은 강항의 거주지도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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