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부산민예총이 발행하는 정기간행물 중 173호에 기고한 손바닥(짧은) 소설입니다.
시도 디카시(짧은시)가 있듯이 소설도 점점 짧아지는게 특징이네요.
소설 속 '두구동 연꽃소류지'는 젊은 시절 제가 근무했던 정신병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장소였고
이곳에서 당시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 작가적 상상을 덧붙여 작품으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연꽃은 피고 또 지네
이인규
- 2008년 경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2025년 한국콘텐츠진흥원(스토리움) '추천스토리 * 소설' 선정(블랙매직)
- 장편소설 '리벤지게임( 26년 현재 경상일보/울산일보 동시 연재 중)
집 앞마당에 매화와 개나리꽃이 벌써 피었다.
이태 전, 꽃씨를 심은 아내의 부지런함 때문에 나는 수고하지 않고 찬란한 봄을 보는 거 같아 약간 미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차피 ‘봄’은 누구의 소유가 아닌, ‘바라봄’의 공유로서 의미가 있지 않나 싶었다. 귀촌 14년 차, 여기는 지리산이 가까운 산골이었다. 그날도 나는 병원에 출근한 아내를 뒤로한 채, 본채 데크 앞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뭐야? 아침부터 ….’
행여 나는 이곳에서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후보자라고 생각하여 단번에 끊으려 했지만, 지역번호를 보니 낯이 익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아버렸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했다. 그는 아주 옛날 한 공간에서 근무했던 나와 동갑인 김이었다. 그의 묵직하면서도 구수한 억양이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그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김 형이 어떻게?”
“내 목소리 아직 기억하고 있는 갑제? 그래, 나요. 이형, 아니 이 작가님! 정말 오랜만이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는 그가 나의 근황, 즉 소설을 쓰는 것과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몹시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곳을 나온 뒤 그와 나는 연락이 끊겼고 당시엔 휴대전화가 일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의문에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 병원 도서관에 이형 책이 있더만요. 책 뒷면에 이메일과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다 아임니까.”
그의 말에 나는 작년에 출판한 내 작품집이 그곳에까지 간 거에 대한 감격보다, 그가 갑작스럽게 전화한 게 너무도 궁금했다.
“김정규가 죽었다 아임니까. 알지요? 우리 병원 최장수 알콜리즘 입원환자, 그때 이형하고 김 간호사와도 친하게 지낸 작자.”
물론 기억이 났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젊은 날, 내 기억 속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그를 잊을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은 내 아내가 된 김 간호사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김의 말대로 그 정신병원의 단골이자 최장기 환자였고 나와 나이가 같아 마치 친구처럼 지낸 사이였다. 그러고 보니 그 긴 세월 동안 보호사였던 김과 그는 아직도 한 공간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랬군요. 언제 그리되었습니까?”
“한 달 전입니다.”
“네? 그런데 왜 지금 …”
“아! 그기 … 뭔고 하면 문상하러 오라는 게 아이고, 그 작자가 이형과 김 간호사에게 줄 선물을 남겼는기라요. 그 때문에 여 한 번 왔으면 합니다만. 내용물은 나도 모릅니다.”
의아했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니 당시 아무리 우리와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도 엄연히 일개 환자였던 그가 직원(보호사와 간호사)이었던 우리에게 뭘 남겼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김에게 일간 찾아가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으면서도 모골이 송연했다.
하지만 나는 김의 전화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시골 생활이 도시처럼은 아니지만, 연내 출간할 장편소설 집필에 정신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다 초여름 한날, 퇴근한 아내가 저녁 식사 후 TV를 보다가 날 불렀다.
“여보! 이것 봐요. 두구동 연꽃 소류지가 나왔네요. 우리 젊었을 때 병원 옆이라서 저기 자주 갔잖아요. 아! 지금도 너무 아름답네요.”
그제야 나는 그때 내게 그의 소식을 전해준 김의 전화가 생각났다. 두구동 그 병원과 연꽃 소류지는 아내와 그와의 추억이 깃 들린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나는 오후 무렵에 아내에겐 부산 친구 모친장례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차를 모는 내내 나는 당시 그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첫 직장이었던 교도관이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재차 취업한 곳이 그 정신병원 보호사였다. 모든 게 서툴고 낯설었던 그 공간에서 날 적극적으로 도와준 자가 그였다. 몸매도 근사하고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잘생긴 외모를 가진 그는 이미 알코올성 질환으로 몇 년째 그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금방 친해졌고 나는 술병 빼곤 모든 게 나보다 나았던 그에게 의지했다. 그 와중에 나는 김 간호사와도 친해졌고 끝내 나와 연인이 되었는데, 그 소문이 퍼지자 이상하게도 그의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 하지만 나는 그땐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병원 생활을 잘하던 그는 우리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수시로 병원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에 보다 못한 나와 김 간호사는 치유와 상담을 핑계로 담당 의사에게 부탁하여 여름철 내내 일주일에 한 번 두구동 연꽃 소류지에 그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통기타로 노래를 부르면서 간식과 찬 맥주를 몰래 마셨다. 그때 우리는 그의 사랑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고 느꼈다. 아니 지금 생각하니 이건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정문 앞에 김이 서 있었고 내게 그의 선물을 전해주었다.
투약이 있어 길게 말 못한다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미련 없이 두구동 연꽃 소류지로 향했다. 중간쯤 포토존 겸 벤치 그리고 새로 니스칠한 데크가 눈에 띄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별 변함이 없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바람은 잔잔했고 해가 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벤치에 앉아 김이 건네준 선물을 뜯어보았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그가 오랫동안 접은 천 마리의 학이 있었고, 한쪽엔 편지가 있었다.
‘어느 날, 나의 손에 주었던 키 작은 종이학 한 마리, 천년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
평생을 알코올 중독으로 병원에서 지냈던 그의 마지막 사연은 내가 아닌 아내, 김 간호사였다. 문득 어스름 노을이 깔리면서 연꽃 소류지 안에 초연하게 핀, 백련과 홍련이 나른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