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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묵상글 들 ( 연중 10주 월요일-동시적이고 현재적인 행복 비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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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0주 월요일-동시적이고 현재적인 행복 비결
"행복하열,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우리 인간이 모욕과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모욕과 박해를 받으면 나중에 하느님께서 보상을 주셔서
행복할 거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동시적이고 현재적인 행복을 말함인가요?
아시겠지만 주님의 행복선언은 현재형과 미래형이 있습니다.
여덟 번의 행복선언 중에 첫 번째와 여덟 번째 행복선언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현재형으로 동시적인 행복을 말하는데 비해
나머지 두 번째서부터 일곱 째까지의 행복선언은 모두 미래형으로
시차적인 행복을 말하거나 종말론적인 행복을 말합니다.
사실 나중의 행복, 특히 죽고 난 뒤 저 세상에서의 행복은
우리 인간이 믿기도 어려운 행복이고 그래서 원하는 행복이 아닙니다.
저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미래의 행복을 희망하는 것이 혹 지금의 불행에 좀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미래의 행복을 희망한다고 지금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나오게 된 배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남미 교회는 독재자들이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를 할 때
행복선언을 가르치며 지금의 가난과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면
반드시 저 세상에서는 행복할 거라고,
저 세상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행복을 얻을 거라고 위로했지요.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요 적이라고 비판하며,
유물론적 무신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했는데
아편이란 병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이듯 종교가 바로 그런 거라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한때 교회가 해방신학을 이런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비슷하다며
경계한 것이 둘 다 행복을 미래와 저 세상에서 누릴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차이점이 있다면
공산주의는 미래의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거부하고
오직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반면 해방신학은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시작되어야 하고
이렇게 시작된 행복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해방신학의 이런 관점은 지당한 주장이고,
오늘 주님께서 가르치신 행복론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관건은 어떻게 하면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고
끝까지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느냐입니다.
그런데 모욕과 박해를 받으며 어떻게 동시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내가 받은 것들이 모욕과 박해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누가 모욕을 준다고 줬는데 내게는 그것이 모욕이 안 되는 거지요.
인간적으로, 누가 모욕을 줘도 '개가 짖었냐?'하는 사람이나,
모욕을 주는 사람을 오히려 한심하다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신앙적으로는 덕을 쌓을 기회를 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사람에게는
모욕이 되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가 우월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욕을 받는 사람이 모욕을 주는 사람보다 우월적이거나
주는 사람의 모욕보다 받는 이의 덕이 우월적인 사람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때문에>입니다.
<의로움 때문에>와 <나 때문에> 모욕과 박해를 받을 때 행복하답니다.
의를 사랑하는 사람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때문에
자기가 받는 모욕과 박해가 오히려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모욕과 박해를 받게 된다면,
그리고 받고서 동시적으로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면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내 잘못 때문에 모욕이나 박해를 받거나
내 잘못이 없어도 의로움이나 하느님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닐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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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 슬픔,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받음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는 곳은 시편 1편입니다.
이 시편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하며, 그런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까지 뿌리를 뻗은 만큼 수분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악인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습니다. 곧 돈, 명예, 권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가 없으니 그들이 성취한 행복은 그만큼 가볍습니다.
이처럼 시편 1편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당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곳에 뿌리를 둔 이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 시편에 비추어 행복 선언을 다시금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내용은 행복을 위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뿌리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오는 가난, 슬픔, 박해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냇가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뿌리를 뻗을 수 있는 것입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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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12: 행복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를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왜 산으로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는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더 높은 곳, 하느님께로,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가르침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면 누구든지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이 말씀은 가난이 아니라, 겸손이 복되다는 의미이며, 참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절) 여기서 슬퍼한다는 것은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죄악을 두고 슬퍼한다는 뜻이다. 열심한 마음과 책임감 때문에 세상의 불의와 죄인들의 죄를 두고 슬퍼하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앞으로 올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절) 온유한 사람은 온화하고 겸손하며 잘난 체하지 않고 믿음에 충실하며 모욕을 당할 때 참는 사람이다. 복음의 계명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신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그들은 약속된 땅, 산 이들의 땅, 하느님의 유산을 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절) 의로움에 배고프고 목말라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행하여야 한다. 의로움에 주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의로움에 따라 적극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이는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후한 상을 받는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절) 자비롭지 못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다. 우리는 구걸하는 거지를 본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도 거지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구걸하는 동안 우리도 구걸을 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우리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절)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앞의 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풀고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고 시샘하지 않으면서도 간음이나 방종 같은 죄에 빠져 사는 사람이 많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안이 깨끗해진 사람이다. 이런 이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모든 사랑의 행위의 목적이요 끝이다. 하느님을 뵙게 되면 어떤 것도 더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절)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평화가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 있어, 이해와 이성이 지배하는 이 평화의 나라에는 다툼이 없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절) 주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라하고 의로움을 위하여 세상의 박해와 육신의 고통, 나아가 죽음까지도 이겨내라고 하신다. 순교자들은 믿음의 의로움과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의 박해를 견딘 분들이다. 이들에게 위대한 희망, 곧 하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부당하게 욕을 먹는 이들은 하늘에서 복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11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2절) 이런 박해와 비방 속에서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헛된 영예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은 땅에서 듣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 관해 뭐라고 하는지보다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실지에 대해 마음을 쓴다.
이 여덟 가지 행복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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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새벽을 열며.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빠다킹 신부님.
복음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영화를 잘 보지 않아서 극장을 간 지도 꽤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시절 때만 해도 극장을 수시로 찾았습니다. 학생이라 돈이 없는 관계로 개봉관이 아닌, 영화 한 편 보는 가격에 두세 편을 볼 수 있는 극장에 가서 온종일 영화를 본 적도 많았지요. 또 지금처럼 좌석제가 아니었기에 똑같은 영화를 2~3번 본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좋아했던 저였습니다.
당시 왜 그렇게 영화에 빠졌을까 생각해보면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극장에 붙은 영화 대형 그림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절, 이 그림판은 ‘꼭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 대형 그림판을 볼 수 없습니다. 또 당시처럼 인기 있어 화제가 된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필요 없이 예약만 하면 편하게 그 시간에 맞춰서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분명히 지금보다 불편했던 환경이었는데 말입니다.
불편했던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고통과 시련 역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런 기억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역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선언’을 발표하십니다. 이 행복선언의 첫 마디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를 경멸하고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이가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행복선언은 우리 세상에서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대신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늘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누리기 바라는 이는 땅에서 받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늘 나라의 영광에 부합한 지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이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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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은 종종 일상의 많은 부분을 바쳐서라도 피하려고 노력했던 변화에서 온다(앤절링 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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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
자식 중에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아이가 있다는 어느 형제님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편애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이 대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런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제로 특별히 더 눈길이 머무는 아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편애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는다면 편애를 받는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어렸을 때 가족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하게 되면 커서 보복을 꿈꾼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리 분석가 알베르트 괴레스는 ‘악은 잘못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보복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편애라는 잘못된 행동이 나중에 가족에게 복수를 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완전히 똑같은 사랑은 주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러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큰 후회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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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슬픔을 이겨낼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슬픔속에서도
행복은
피어납니다.
슬픔에 함께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새로운 행복은
이와같이
주님과 함께 하는
하나되는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삶의 모든 것이
행복이 됩니다.
슬픔또한
나누시며
이끌어가시는
주님이십니다.
함께 나누어야 할
슬픔이며 아픔입니다.
슬픔을 나누는 것이
위로임을 배웁니다.
행복은
슬픔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위로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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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연중 제10주간을 시작하는 오늘부터 연중 제21주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마태오 복음을 묵상합니다. 오늘은 제2의 모세로 산 위에서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당신 자녀로 부르신 주님의 궁극적인 바람이 무엇인지 담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수 차례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축하처럼 들리기도 하고 명령이나 권유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안에 위로와 축복이 가득하다는 점입니다.
이민족의 압제와 가난, 율법주의의 부담감에 짓눌려 살던 당시 이스라엘 민중에게 예수님의 행복 선언은 관점의 전환을 일으킵니다. 아마 누군가는 '아, 나도 행복한 거구나!' 하는 자각을 선물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행복이 꼭 성공과 재물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가난, 슬픔, 온유, 정의의 부재, 자비, 마음의 순수, 평화, 박해."
사실 예수님이 전하신 행복의 조건은 세상 눈에는 매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세상은 대개 이 덕목을 버리고 반대 조건을 쟁취하라고 부추기지요.
적어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부유하고, 높이 오르고, 타협에도 능하며, 건강하고, 주위의 인정과 찬사를 받아야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어느새 인간의 행복은 외적 조건에게 고삐와 칼자루를 내 준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의 진정한 근원이 어디인지 잊어버린 듯하지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섬긴 불같은 예언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이곳을 떠나 ... 숨어 지내라"(1열왕 17,2).
엘리야는 그가 전한 하느님 말씀 때문에 박해의 표적이 됩니다. 예언자의 운명이지요. 그런 엘리야를 주님께서 숨겨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1열왕 17,6).
아무리 예언자가 하느님과 통교하고 그분 말씀을 전달하는 귀인이라 해도, 예언자도 사람입니다. 먹고 마셔야 살고 위협과 공격에 움츠러들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와 같이 육신을 지닌 존재지요.
주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보내신 빵과 고기는 그를 지탱하는 영육의 양분입니다. 정신을 지탱해 줄 보호와 지지의 표상이기도 하지요. 거기에 더해 시내의 물은 깊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외딴곳에 고립되어 숨어 있는 처지이지만 하느님은 엘리야를 물 곁에 두십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만물을 살게 하고 꽃과 열매로 풍요롭게 하지요. 또 시들시들 말라 죽어가는 것을 되살립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물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물은 생명을 주시는 주님,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지금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물리적 빵과 고기, 심리적 위안을 위한 메신저(까마귀), 그리고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게 해 줄 주님의 현존(물)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에 비추어 보니 어쩌면 엘리야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 같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박해 받으며 정의에 목말랐지요. 오직 말씀만이 그의 사명이었으니 악에 대적할 어떤 힘도 행사할 줄 몰랐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에서도 자유롭지도 못했고요. 게다가 주님이 기억해 주시지 않으면 육신의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는 고립된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주님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같은 사랑에 사로잡힌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열정은 자기 재물이나 성공을 향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말씀과 방향성을 같이 했지요. 분명 그는 성령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지금 행복하시지요? 행복하다면 세상 눈에 행복합니까, 주님의 눈에 행복합니까? 육적으로 행복합니까, 영혼까지 행복합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주님과 함께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위로와 돌봄을 체험하며 성삼위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누리는 상태이니, 벗님은 참으로 복되십니다. 하늘 나라가 벗님의 것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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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참행복이란?'
어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내재되어 있는 지극한 사랑의 신비를 묵상한 삼위일체 대축일이었습니다.
어제 예고 없이 교구장 주교님께서 영산성당을 방문해 주셔서, 10시30분 미사를 주교님과 함께 드리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주교님의 예고 없는 방문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ㅎㅎ
주교님께서는 강론에서
"나는 나다."(I am who i am)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신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아들에게 사랑을 주시는 '성부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시는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의 사랑'과
주고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성령의 사랑'과
이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마태5,1-12)은
진복팔단(眞福八端), 곧 참행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공생활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첫 말씀입니다.
참행복이란 무엇일까?
참행복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어디일까?
단순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참행복이요, 그런 참행복이 이루져야 하는 자리가 바로 나의 삶의 자리가 아닌가 하는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좋든 싫든 크고 작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며,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는
잘 주고,
잘 받고,
잘 나누는 관계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잘 이루어진 '참행복의 모습'이 우리 안에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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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1열왕기 17,1-6
마태오 5,1-12
개 팔자가 상팔자?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보이고 울적해 보이는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괜히 제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애야, 넌 장래 희망이 뭐니?”
아이는 벼락같이 화를 내면서
“요새 그딴 질문하는 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젊은이가 뭔가 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 물음에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꿈은 애완견이 되는 거예요.
공부나 취직에 대한 스트레스도 없고, 매일 먹고 자고 놀고, 또 먹고 자고 놀고,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삼복더위에, 해가 중천에 뜬 한낮,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머릿속에는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고민거리 서너 가지로 가득한 채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농가 안에는 멋들어진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습니다.
그 나무 그늘 밑에는 엄청 게을러 보이는 진돗개 한 마리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쿨쿨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모습을 보니 ‘개 팔자가 상팔자로구나. 정말 행복해 보인다.
저 녀석이 부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다가 아닌 듯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이런 저런 고민꺼리나 스트레스 없이, 고통이나 시련도 없이, 매일같이 먹고 자고 놀고를 되풀이하는 것이 행복해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겠지요.
그런 행복은 지극히 차원 낮은 행복, 동물적인 행복, 한시적인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추구해야 할 행복은 ‘참 행복’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참으로 역설적인 행복입니다.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높은 파도 앞에 당당히 맞서며 극복해나가는 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내게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길을 걸어가는 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때로 기적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을 매일 확인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홀대 받고 있던 의인들과 가족들이 늦게나마 인정받고 보상받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마음 흐뭇해집니다.
우리도 매일의 역경과 환난을 기꺼이 이겨낼 때,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꾸준히 선을 실천해나갈 때,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해 일하다가 받는 박해를 꿋꿋이 견뎌낼 때, 언젠가 주님께서 주실 상급이 클 것입니다.
그런 희망과 기대를 안고 오늘을 살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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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1열왕기 17,1-6
마태오 5,1-12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나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에 어떤 청년과 대화하던 중 제가 조금 당황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행복하려면 이래 저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청년은 자신은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다섯 번째라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최고 가치가 행복이었고 그것이 바뀐 적이 없었기에 그런 반응은 저를 당황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가 아니라면 우리는 자아의 욕구에 속아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자녀의 성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나는 그 가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도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행복을 허락해도 되고 어쩌면 나의 행복이 나를 만들어주신 분께 가장 효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행복해지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해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저를 찾으며 몇 시간을 돌아다니셨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저를 발견하셨는데 제가 트럭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엄마를 찾겠다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찾아다녔다면 그 하루 동안의 행복은 날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찾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멀리 안 가고 주위에서 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지 않고 어머니가 저를 찾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찾아오셨다면 주님은 항상 제 곁에 계시고 저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가난한 행복은 잊고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저의 책상 앞에는 “나는 공부하는 기계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지내고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행복하여지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취업 걱정해야 했습니다.
취업하면 행복할까요? 그 나름대로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려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삶의 형태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자는 많이 가졌지만, 더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마치 어린이처럼 부모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마구간은 겉보기에는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마구간 자체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복이십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여관들은 마음이 부자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풍족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가난해 보이는 부부는 맞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많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영영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찾는 헤로데에게 자녀들이 다 참혹하게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네 잎 클로버에 얽힌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네 잎 클로버를 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포탄이 지나가서 목숨을 건지게 되어
‘행운’이라는 꽃말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짓밟으며 ‘미래’의 행운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부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발밑에 이미 행복할 조건이 깔려있음을 알고 행운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결국, 네 잎 클로버도 행복해지자고 찾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이 발밑에 있는데 뭐하러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할까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 발밑에 그분이 항상 깔려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합시다.
내가 행복하면 그분은 행복하게 머무는 나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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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08. 연중 10 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행복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그리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의 고달픔과 시련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 노래하리라”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고 땅의 주인 역시 하느님 이십니다. 하느님의 것을 인간이 잠시 관리하다가 그대로 놓고 하느님께로 갑니다. 그렇다면 소유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느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것이 지혜롭다 하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면 무엇 합니까? 내 것이 아닌 것을! 풍족하지만 결핍의 삶을 살아가는 불안한 현대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한다면 행하는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소유, 지배, 사랑! 사랑 안에서 행복을 차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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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참 행복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3-6).”
‘행복하여라.’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행복론’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입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과 참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행복이 아니라 ‘참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를 차지하려면(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영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마음이(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말은, 몸은 부자로 살아도 마음이 가난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만 온전히 섬기려면 마음이 재물에서 온전히 떠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낙타와 바늘구멍’의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가 연상됩니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마태 19,16),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9,21).
그러나 그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마태 19,22).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9,2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은 어떤 슬픈 일을 겪고 있으면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하느님을 찾으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마태 7,7).” 라는
약속의 말씀 그대로 하느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의지하면서,
하느님의 위로가 아닌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들은 참된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고,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어떤 슬픈 일을 당하고, 너무 큰 슬픔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술이나 마약이나, 어떤 세속적인 수단에 의지해서
슬픔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경우에 잠깐 동안 잊어버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점점 더 인생이 망가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들을 잊어버리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온유한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들,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사람들, 비폭력으로 폭력을 극복하는
사람들을 뜻하고, ‘땅’은 ‘하느님 나라’를 뜻합니다.
만일에 권력과 폭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저쪽 세상에서 어떤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들어가는 그 나라가 하느님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여기서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은,
즉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면서 남을 억압하면 안 된다.” 라는 말씀은
대단히 단호한 말씀입니다.
거스르면 안 되는 엄한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무력과 폭력은 반대하지만, 현실적으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길 수 있을까?
온유함만으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온유함’은 불의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로마 12,21).
어느 한 시기만 보면 폭력이 비폭력보다, 또 악이 선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비폭력이 폭력보다, 선이 악보다 더 강하고,
결국에는 선이 이깁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의로움’은 ‘하느님의 선’을 뜻합니다.
그래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이 온전히
실현되기를 갈망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갈망한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악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도 안 느끼고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고, 선한 사람들은 고생만 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하느님께서는 왜 심판을 미루시기만 하는가?” 라고
묻게 됩니다(묵시 6,10).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선’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일은 ‘회개’입니다.
우선 먼저 ‘나부터’ 회개해야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면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하는데, ‘나만’ 회개하고
남들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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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연중 제10주간 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것은 1995년 10월입니다.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교구에서는 보좌신부들에게 성지순례를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은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취항하면서 교회에 홍보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지순례를 많이 가는 편이지만 그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로 복음화학교 담당신부를 하면서 공동체 회원들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함께 했습니다.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고, 하느님의 은총이고, 제게는 기쁨의 시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 카타리나 성당이 있습니다. 들어가는 문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순례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던 아인카렘,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나자렛, 첫 번째 표징을 보여주셨던 가나, 거룩하게 변모하셨던 타볼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저녁을 함께 드셨던 다락방, 밤 세워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동산, 베드로가 회개했던 닭 울음 성당,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곳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신 곳이 많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곳,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 보신 곳,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곳, 그리고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곳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두려워마라! 왜 믿음이 약하느냐? 내가 있지 않느냐?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2005년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기억입니다. 참된 행복 선언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순례오신 분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선포하시겠습니까?’ 저는 마리아의 행복선언, 요셉의 행복선언, 아가다의 행복선언, 안드레아의 행복선언을 들었습니다. 순례에 오신 분들은 모두 저마다의 행복선언을 하였습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자리에 따라서 행복선언도 내용이 달랐습니다. 현실적인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아픈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 남편이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 자녀가 혼인을 하는 것, 자녀가 취직을 하는 것, 봉사하는 단체가 잘 되는 것, 성전 신축이 잘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행복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전쟁이 없는 것, 남과 북이 일치를 이루고 통일이 되는 것,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것, 병든 사람이 없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행복을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발전과 성장이 모든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겁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음을 알았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암인 줄 알았는데 오진이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오늘 새벽에 눈을 뜬 사람들,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하루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행복선언’을 하신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는지요? 예수님의 행복선언과 여러분의 행복선언을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비슷한지, 어떤 점이 다른지도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비움, 나눔, 희생, 봉사, 평화, 가난’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에 채울 것은 적어지지만 하늘나라에 많은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초의 불을 다른 이웃의 초에 옮겨 주어도 내 초는 잃은 것이 없지만 세상은 더 밝아지듯이 우리의 희생, 나눔, 헌신, 비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만큼 더 환해지고 밝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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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참행복 -행복은 발견의 은총이자 선택이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찾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늘 들어도 감미로운 오늘 아침 성무일도중 시편 말씀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웃을 때 얼굴은 그대로 꽃같습니다. 하여 보속 처방전 말씀에 많이 찍어 드리는 스탬프, “웃어요!”라는 말마디입니다. 그대로 이웃에게 전염되는 행복의 바이러스, 웃음의 바이러스입니다. 하여 행복한 분들을 보면 저절로 사진을 찍게 되고 어제도 어느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사진 찍어 다음 말마디와 더불어 전송해드렸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부부예요. 늘 멋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평범한 연중시기가 좋습니다. 6월 초록빛 생명의 계절에 걸맞는 초록빛 제의 색깔도 편안합니다. 늘 초록빛 영성으로 참행복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라는 산상설교의 서두인 참행복 선언입니다.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산상설교중의 참행복 선언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톨스토이는 물론 종파를 초월해 간디, 불교의 성철스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세의 십계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입니다. 모세의 기본적 십계명만으로 참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참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살아야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마지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도 ‘행복하게 살았느냐?’는 하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하여 예수님도 산상설교의 서두에 참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은 발견의 은총이요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발견되는 행복이요, 또 선택해야 하는 행복이기도 합니다. 말그대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에, 탐욕에 눈멀어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앞에 놔두고도 보지못해 불행을 사는 어리석은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깨달아 눈만 열리면 널려 있는 행복들입니다. 얼마전 불암산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하루에도 눈으로는 수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등산하는 불암산입니다.
-“수십년/평생을 함께 살아왔어도
덥든 춥든/흐리든 맑든/비오든 눈오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늘 한결같다
불암산/나도 그렇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말없는 위로와 힘이되는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바로 불암산이 상징하는 바 우리가 늘 찾고 사랑하는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행복의 샘, 위로의 샘이 되시는 하느님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행복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바로 참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의 원천임을 깨닫게 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깊이에서는 참행복의 하느님을 찾습니다. 자주 고백성사 보속 처방 말씀으로 주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이런 보속 말씀을 받으면 어떤 분들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 말씀이라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도 참행복의 뿌리에는 하느님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한자가 누굽니까? 한결같이 결핍된 자들입니다.
1.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슬퍼하는 사람들, 3.온유한 사람들, 4.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자비로운 사람들, 6.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여덟가지 행복한 사람들이라 선언받는 사람들 한결같이 결핍된 자들입니다. 각자 참행복 점수를 계산해 봐도 좋겠습니다. 20점은 기본점수로 하고 8개 참행복 항목별 10점 만점에 도합 80점, 합하여 100점 만점에 몇점쯤 되는 지 미사후 조용한 시간에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처럼 결핍된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채워주시는 희망의 하느님이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궁극의 희망을 하느님께 둘 때 참행복이요,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하느님을 만날 때 이뤄지는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며칠전 읽은 교황님의 교회의 부유함에 대해 나눈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데 교회는 왜 그렇게 부유합니까?”
“교회란 말마디는 너무 포괄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부에, 돈에 속하는 한,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의 마음이 거기에 집착한 탓이다. 그가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가난해지게 된다. 동시에 복음에 따라 순수한 마음으로 부를 잘 관리하는 부자들도 있다.
그러나 교황이, 주교가, 사제나 수도자가 부유하다면, 그것은 교회에 스캔들(걸림돌)이다. 누구든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려면 모든 부로부터 멀어져야 하고, ‘가난한 마음a poor heart’을 지녀야 한다. 부를 관리하도록 불림을 받았다면 개인적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말했다. 가난은 ‘생명의 어머니mother of life’이니 타인을 위한 ‘자아의 선물the gift of self’인 ‘너그러움generosity’을 낳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너그러울 수 있고 부자가 더 인색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부유함이 주는 참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도 분명 하느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셨습니다. 참 행복을 위해서는 주님이 ‘삶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잡아야 함을 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가 참행복한 사람입니다. 외적으로는 가난의 극치이지만 하느님의 배려중에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며 특별 피정 시간을 갖는 내적으로는 참 행복한 부자 엘리야입니다. 다음 아름다운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가난한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진리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을 찾는 우리 모두 참행복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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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 이영근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한가요? 아니면, 행복하지 못한가요? 그런데 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
(시 1,1;2,12;119,1-2;128,1-2;루카 1,42-45;11,27-28;마태 16,17).
그리고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은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윤리적, 종교적 가치 기준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인 “참 행복” 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사실, ‘참 행복’은 복음적 인간, 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진복선언”은 두 가지 영성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참 행복’을 지탱해주고 있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됨’(being)과 ‘함’(doing)이라는 존재론적이고 실천적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의 ‘꼴 짓는 영성’이고, 후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영성’입니다. 곧 존재로서의 영성은 우리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나의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고, 실천적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이 입혀진 영성입니다. 이렇게 ‘참 행복’이 지닌 특성은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 됩니다. 곧 현실에서 육화됩니다. 곧 ‘됨’의 영성은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고난)이고, ‘함’의 영성은 하느님께 예속(의탁), 치유, 섬김, 해방, 용서, 회개, 비폭력, 인내이며, 그 복은 하늘나라, 위로, 땅, 배고픔, 자비,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은 단지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 행복’을 통해 존재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일입니다.
<둘째>, ‘참 행복’이 지닌 또 하나의 영성적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안셀름 그린은 영성의 지향에 따라 영성을 ‘위로 향한 영성’과 ‘아래로부터 영성’으로 구분합니다.
‘위로 향한 영성’은 우리에게 이상적 요소들을 제시하고, 그것은 언젠가는 마침내 채워야 하는 것을 지향하는 영성운동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며 그와 하나 되려는 갈망,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영성을 닮아가려는 일련의 모든 영성적 지향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신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위를 바라보는 영성운동입니다.
반면에,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고통과 고난으로 말미암은 영성의 새로운 차원을 의미합니다. 곧 고통과 상처, 절망과 아픔 등의 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하느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말미암는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영성’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펼쳐지는 ‘살갗’이 드러나는 실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등한시 하고 있는 인간의 온갖 부정적인 현실조차도 영성의 자양분임을 인정하고, 모든 부정적인 현실이 지닌 영성적 측면을 회복시킵니다. 곧 육체, 아픔, 상처, 고독과 외로움, 절망, 슬픔, 욕망, 세속 등에서 영성의 의미를 회복시킵니다.
진복팔단의 영성은 바로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팔복은 가난, 슬픔, 핍박, 정의를 위한 갈망, 고난 등 우리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들이 지닌 풍부한 영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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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8일 월요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매일미사_김명중 시몬 신부 집전'
2020년 6월 8일 월요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매일미사_김명중 시몬 신부 집전
김명중 시몬 신부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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