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당신을 조종하고 있다면 엄청 기분 나쁘겠지요. 그러나 실재의 세상에서는 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당신을 조종하고 있습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파블로프의 개/정임표
인간은 육(肉)과 혼(魂)으로 된 동물이고 영(靈)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다. 삼위(三位)가 일체로 존재 하는 것이다. 나는 깨우침과 관련하여 영의 세계에 대해서 주목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몸을 지배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여긴다. 이때 말하는 마음이란 혼과 영이 합쳐진 두루뭉술한 말이다. 우리의 몸은 혼이 지배하고 그 혼을 지배하는 다른 무엇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영이다. 사람이 구원(대자유)에 이르려면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와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가 개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 밥을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들려주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려주어도 개가 침을 흘린다는 것을 밝힌 실험이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를 통해 영과 육과 혼의 관계와 깨우침과 몽매함, 성령과 악령, 그리고 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이 글을 쓴다.
실험 대상인 개는 깨우치지 못한 상태의 인간이고 실험자는 인간의 혼을 조종하는 영이다. 밥은 인간이 탐을 내는 원초적인 욕구이고 실험자가 밥을 줄때마다 종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욕구충족 안에 몰래 끼워 넣은 의도된 조작이다. 개는 몽매한 상태에 있음으로 의도된 조작을 알지 못하고 종소리를 참(진리)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개가 종소리와 밥의 상관관계를 습득한 것은 깨우침이 아니라 지식일 뿐이다. 개는 습득된 지식을 진리(참)인 줄 알고 자기내면 깊숙이 저장한다. 나는 이것을 분별되지 못한 학습의 오류라고 부른다. 무슨 내용이든지 반복해서 학습되면 개나 사람이나 학습된 지식이 이끄는 대로 반응하고 행동한다. 밥을 주지 않아도 개가 종소리에 침을 흘리는 것은 개의 혼이 학습된 지식에 홀려서 자신이 조작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소리만 따라서 반응하는 때문이다.무지몽매란 바로 이러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이를 業의 지배상태, 무의식의 지배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업장이 두꺼운 사람은 이 세상에 엄청난 폐단을 남긴다. 그래서 업장 소멸을 발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파블로프의 1차적 실험이고 다음 이야기는 2차적 실험이다. 2차적 실험자는 이제부터 개에게 종소리를 들려주면서 밥을 주지 않는다. 처음에는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던 개가 계속 밥을 주지 않으니 더 이상 종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게 된다. 새로운 학습으로 종소리와 밥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때의 앎도 깨우침이 아니고 단지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는 정도에 불과한 지식이다. 개는 아직도 자기가 보이지 않는 실험자에 의해 실험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더구나 자신이 왜 전에는 종소리에 침을 흘렸다가 지금은 그러하지 않은지 의심조차도 하지 않는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있다. 이 시점이 바로 이성(理性)이 눈을 뜨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파블로프의 개는 2차적 실험 후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지만 인간은 왜 내가 전에는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리다가 지금은 어째서 아무렇지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지고 그걸 밝히려는 탐구를 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고 우리는 그걸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이성이라고 한다. 이성은 영적인 세계(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별하는 중요한 도구다. 인간은 이 도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구원에 이른다. 이성에 의지 하지 않으면 결코 바른 영, 진리의 영, 곧 성령(聖靈: 우리의 정신세계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가려 어떤 신비한 힘)을 만나지 못한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밝히면서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곳에 다다르려는 이성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혼이 영이란 것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영에는 성령과 악령(惡靈: 인간의 정신세계를 저급한 곳으로 끌어 내리려는 사악한 기운)이 있음도 알게 된다.
인간의 이성을 일깨워서 더 높은 차원의 길로 가게 해 주려는 영(실험자)은 성령이고, 이성이 깨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숨은 곳에서 그의 혼을 조종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실험자(靈)는 사악한 영, 곧 악령이다. 어떤 사람이 있어, 그가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온갖 그럴듯한 아름다운 이름을 앞세우더라도 인간의 혼을 조작하여 자기영광(목적)을 취하려는 자는 이미 그의 혼이 악령에 팔려간 자다. 그런 자를 가까이 하면 필히 하나 뿐인 소중한 우리의 생명이 희생된다.
이성이 눈을 뜨기 시작하면 우리 내면에서는 영들의 전쟁이 벌어진다. 우리의 이성이 밝아져서 깨우침을 얻으면 우리의 마음에서 악령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때문에 숨을 곳을 잃게 된 악령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서 깨우침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고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반면에 성령은 우리의 이성이 더욱 더 빛을 발하여 악령을 물리칠 수 있도록 바른 가르침을 전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이성이 눈을 뜨려는 그 시점에서도 우리는 몽매 중에 있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니 우리의 혼은 악령의 속삭임과 성령의 탄식으로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된다. 갈등은 바른 길을 찾아가려는 내 마음작용의 또 다른 표현이다.
갈등을 극복하여 바른 깨우침을 얻으려면 함부로 행동에 옮기지 말고 선인들의 가르침을 회상하여 무엇이 진리인지 사유하고 사유하며 참이 아닌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타파해 나가는 길 뿐이다. 사유를 멈추면 이성이 빛을 잃으니 그가 설혹 만권의 독서를 하고 경전이란 경전을 죄다 줄줄 외우더라도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 이성이 눈을 뜨려고 할 때 사탕발림의 칭찬을 많이 하면 인간을 망치게 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간의 영혼을 조작하려는 자가 쓰는 술수다. 깨우침을 얻어 스스로 기뻐서 춤을 추어야지 남의 칭찬에 춤을 추는 것은 자유인의 모습(구원된 자의 모습)이 아니다. 이성이 눈을 뜰 때는 정말 좋은 스승, 좋은 도반을 만나야 바른 깨우침을 얻는다.
아득한 원시부터 지금까지 악령은 늘 달콤한 말로, 때로는 협박으로 우리의 혼을 지배하려 해 왔고, 성령은 어미닭처럼 말없는 탄식과 성스러움으로 우리를 깨우침의 길로 인도하려 해 왔다. 성령과 악령의 싸움에서 승부는 결국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로 결정된다. 내가 악령을 선택하면 성령은 떠난다. 그 반면에 우리가 깨우침에 이르고 나면 더 이상 악령이 우리의 혼백에 머물 수가 없음으로 우리는 저절로 천국(진리, 부활, 참, 깨우침, 이성이 완전히 눈을 뜬 상태 등으로 표현되는 밝음의 세계)으로 들어가게 된다.
모든 인간은 악령의 유혹과 성령의 가르침 앞에서 어떤 영을 자신의 혼에 담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게 바로 자유의지(自由意志)다. 괴테는 우리 인간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리는 이 장면을《 파우스트》를 써서 세상에 알린 바가 있다. 그와는 달리 악령에게 영혼을 팔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크게 깨우침을 이룬 후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펼치시기 전에 광야로 이끌려 나가서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줄 테니 네 영혼을 팔라는 사탄의 제안을 받는다. 예수가 그 유혹을 물리치니 사탄이 물러가서는 다시는 예수에게로 오지 않았다. 참을 사모하는 사람(참)은 사탕발림으로 유혹되지 않음을 악령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가 "사탄아 물러가라"며 단호하게 “노(no)"라고 한 이것이 "파우스트"교수와 정 반대의 선택을 한, 우리 인간의 위대한 자유의지(自由意志)이다.
악령이 기도하는 목적은 참(진리)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기를 영화롭게(우월하게, 자랑스럽게) 보이려는 데 있다. 그래서 끝없이 자신을 참인 양 거짓포장을 하는 것이다. 악령의 실체가 밖으로 표출되는 대표적인 속성이 열등감이다.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란 본래 없음에도 인간은 죽을 때까지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애를 쓴다. 그것도 부족하여 사후에 까지 인정 받으려고 비석을 세우고 선행을 날조한다. 선악과와 원죄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열등감의 유혹을 받아 신처럼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싶어서(무엇을 위하여 슈퍼맨의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선악의 관념에 빠져서 끝없이 자신을 선으로 미화 시키고 우상화시키는 거짓 속에 갇혀 사는 형벌이 우리 인간의 원죄이고 그에 대한 최후의 형벌이 사망(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더 높은 차원의 곳으로 이끌어가려는 신비한 힘이 있는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혼미한 중에 살아간다. 이걸 알리고자 하는 안타까움이, 리챠드버크의 소설 《 갈매기의 꿈》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성령은 참(진리)의 영인지라 오직 하나일 뿐이며, 악령은 거짓된 영인지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그 수가 많다. 마음속에다 참(진리)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들끼리는 쉽게, 아주 편하게 소통이 되고 악령을 받아들인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이 되질 않는 이치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기 시작하면 우리의 혼은 바로 악령의 포로가 되고 이성이 마비되어, 무화과 나뭇잎 뒤로 몸을 숨기듯이 끝임 없이 자신을 숨기게(속이게) 된다. 예면 예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우리의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하여 우리가 깨우침을 이룰 수 있다. 참은 사실인지라 한 가지 뿐이고 거짓은 지어내는 것이라 수억 만 가지라는 뜻이다. 단 한가지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수억 만 가지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과 어찌 소통이 되겠는가? 몽매를 이해하고 용서할 뿐이지 않겠는가?
깨우침을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한 다른 말로 줄탁동시(啐啄同時)란 말이 있다. 어미닭이 달걀을 품어 스무하루가 지나면 그 속에서 병아리가 나온다. 마지막까지 부화가 되지 못하고 남는 계란이 서너 개 있는데 그 걸 깨어보면 어떤 것은 삭아서 죽어 있고 어떤 것은 깃털까지 생긴 것이 껍질에 쌓여 죽어 있다. 삭은 계란은 우리의 이성이 무지몽매한 상태 그대로 임을 말하는 것이고, 깃털이 나다가 죽은 것은 깨우침의 길로 나아갔지만 근기가 약해서 중도에 포기한 것을 말한다. 나는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온 이것을 부활, 해탈, 대오각성이라고 생각한다. 병아리가 다시 계란으로 되돌아가지 않듯이 사람도 깨달음을 이루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표현과 같다.
누가 성령을 따르고 싶어도 무엇이 성령인지 악령인지 구별이 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는지 물었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헤밍웨이가《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썼다. 인류에게 던지는 그의 화두다. 파블로프의 종소리는 나를 유혹하려는 종소리 일수도 있고 나를 구원하려는 종소리 일 수도 있다. 깨우치면 그 소리가 구분되어 보이고 깨우치지 못하면 그 소리가 그 소리로 들린다. 내가 그리고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로 되어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당신(생명)을 수단으로 여기는 영은 악령이고 당신(생명)을 목적으로 여기는 영은 성령이다. 처처에서 “내가 성령이다!” “내가 진리의 영이다!” 라고 떠드는 소리가 넘친다. 깨어서 기다려 보면 악령은 반드시 본색을 드러내니 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깨어서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악이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면 악의 실체를 볼 수가 있다. 이걸 두고 "발악(發惡)"이라 한다.
파블로프의 개가 실험자에 의해 계속 조작당하는 이유는 그가 조작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원초적인 욕구에 끌려 다니는 때문이다. 그걸 알면 개도 실험자의 손에서 벗어나서 깨우침에 이를 수가 있다. 사실 사람이 개보다 더 문제가 많고 더 위험한 존재인 것은 개는 원초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종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고 자기 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데, 우리 인간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에도 되돌아오질 못하고, 스스로 환청까지 만들어서 계속 침을 흘리며 반응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혼이 악령에 사로잡혀 염색(세뇌)되면 그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혼이 악령에게 붙잡히지 않기(세뇌되지 않기를)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누가 우리의 영혼을 조작하는지 한 겨울날의 새벽 별처럼 우리의 이성이 깨어서 빛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깨어서 기도하라!"
그 간절한 외침이 들리는 명징(明澄)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