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시누이께서 올해 팔순이시다. 내내 서울에서 사시다가 내가 결혼하던 무렵에 딸들이 직장에 다니는 부산으로 옮겨가셨다.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셔서 경찰서장이셨던 시아버님은 정치적 변동으로 갑자기 자리에서 물러나셨다. 그 뒤로 돈과 인연이 멀어져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시고 그냥저냥 사셨다. 무학이신 어머니가 구멍가게와 하숙집으로 집안 경제를 도맡게 되셨으니, 어머니 대신 큰 딸로서 큰시누이는 다섯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뛰어놀고 싶은 어린시절부터였다. 동생들 업어주고 똥기저귀도 내가 다 빨았어. 동생들이 저질러놓은 일까지 야단을 맞는 서러운 날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날의 반항심이 표출되었을까. 큰시누이는 이 말씀을 자주 하신다. 어려서는 어머님 말씀을 지지리도 안 듣는 딸이었어 엄마 속 많이 썩였지 청개구리였어 엄마한테 야단을 맞으면 사납게 소리소리 질러가며 도망치면서 지붕에 돌을 막 던졌다니까 왜 그랬는지 몰라 내가 글쎄. 내가 엄마가 되니 어머니 마음을 알겠더라구. 어머님이 늙으시니 내가 어른이 되더라구. 맏딸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젊은 시절 고단함을 함께 지나와서일까. 두 분이 만나는 날에는 그 시절 고생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큰시누이는 어머님과 눈물을 함께 흘리는 딸이며 친구였다.
뜨거운 사랑으로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딸 둘을 낳고 헤어지셨다. 삼십초반부터 홀로 자식들 건사하며 살아오셨다. 말할수 없을만큼 힘든 나날들이었겠으나, 육군 해군 공군 공중전까지 치르시며 사셨다고 재미난 이야기처럼 깔깔거리며 말씀하시고는 한다. 그 지난했던 나날들 때문일 것이다. 가시를 마음 구석구석 기르며 가시나무로 사셨을 것이다. 사람들이 날 무서워해 성격이 까탈스럽고 상대방을 한눈에 알아보기 때문이지. 냉정하기 때문이지 특히 거짓말하는 사람은 용서 못해. 어느 날 길바닥에서 점을 치는 사내가 시누이를 힐끗 보고는 말했단다. 자리 하나 깔고 앉으셔야겠어요. 보통사람보다 눈매가 예사롭지 않으신 것은 맞다.
그럼에도 나는 큰시누이의 말씀에 싱겁게 웃는다. 그런 말씀 마세요. 지금까지 시누이 노릇 한번 안하셨고 그렇게 사납게 말씀하시는거 저는 들어보지 못했네요 조금도 무섭지 않으신데요 사실이다. 올캐인 내게도 잘했다 잘했다는 하셨어도 이건 이래서 잘못이고 저건 저래서 잘못이라고 트집을 잡는 시누이 노릇은 한번도 하지 않으셨다. 그랬구나 그렇지 너그럽게 받아주셨다.
어머님이 아프셔서 요양원에 계실때도 마찬가지셨다. 본인은 부산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다녀가시면서도 동생들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지 않으셨다. 돈 버느라 바쁜게지 손자 보느라 바쁜게지 신랑 밥해주느라 바쁜게지 사업이 시원치않은게지 등 어떤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고개를 끄떡이셨다. 올캐인 내게도 역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맏며느리이니 어머니를 자주 뵈러 가라는등 어른으로서의 말씀도 삼가셨다. 본인이 할 일에 충실하실 뿐이었다. 수고한다는 말씀만 하셨다.
남편의 직장때문에 우리가 고리에 살 때 큰시누이네가 부산에 사셨으므로 두 여조카들과 여름이나 겨울 휴가 기간에는 우리집에 와서 지냈다. 시누이네도 우리도 서울에 계신 가족을 떠나왔으므로 외로웠다. 내 아이들 둘이 어렸고 조카들은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오랜만에 아이들한테서 해방이 된 나는 세끼 밥상을 열심히 차려서 함께 맛있게 먹었다. 시장이 멀어 여러날 먹을 식재료를 미리 사다 쟁여놓아야해서 힘들기는 했지만 즐겁기도 했다. 그런 날들 속에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 시댁 식구라기보다는 친정 쪽 식구만큼 다정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시누이와 여조카들은 내게 참 살갑게 대해주었다.
SRT를 타고 부산에 내려간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으니 큰시누이는 시댁 쪽에서 가장 윗 어른이신 셈이다. 부산이 아니라 미국이라 해도 달려가야 할 어른이신 것이다. 매일 편안한 차림이었다가 오랜만에 정장을 차려입고 구두를 신어서 일단 나들이하는 기분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발도 아프고 늘어난 허리에 바지 허리가 꽉 끼어 앉아있기가 힘들어진다. 이 나이에는 편안한 차림이 제격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큰시누이는 아들을 참 잘 두었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면 누가 믿을까. 특히 외할아버지, 내 시아버님의 사랑이 극진했고 외할머니, 내 시어머님의 사랑이 지극했다. 물론 어미인 시누이의 사랑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 사랑과 믿음 덕분으로 독립적으로 신앙심으로 진실하게 성장하였다. 공부는 물론 결혼과 집장만등 모든 것을 스스로 해냈다. 외삼촌과 이모들에게 명절이건 추석이건 빼놓지 않고 선물을 보내준다. 어머니인 큰시누이에게는 생활비며 용돈을 꼬박꼬박 드리고 있다. 명절 잘 지내시라고 건강하시라고 안부 인사도 다정하게 곁들인다. 이만한 젊은이가 있을까. 저 살기 힘들고 바쁘다고 부모에게 오히려 손을 내미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명절에 나는 누구에게 선물한 적 있던가. 없다. 조카이지만 존경스럽다. 고마우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달할 줄 아는조카네 가족은 현제 직장 때문에 인도네시아에 있다.
대충 지나가도 그만이련만은 어머니의 팔순을 그냥 지나치면 후회할 것 같다고 했다. 4일간의 휴가를 내서 아들 둘과 아내와 함께 왔다. 하루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저녁에 부산에 간 뒤 다음날 시누이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저녁에 팔순잔치에 참석할 거란다. 그리고 그 저녁 늦게 서울에 와서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인도네시아로 들어갈 예정이란다. 어머니와 누이 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 씀씀이가 자개장처럼 견고하고 빛이난다. 물론 부산에 살고있는 여동생 둘이 음식점이며 팔순상이며 미리 예약해 놓았을 것이다.
부산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모임장소로 간다. 큰시누이와 막내 시누이 부부와 조카들과 조카의 아이들과 한 사람 한 사람 끌어안고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조카들도 오십대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제 만난 것처럼 스스럼이 없다. 큰시누이는 연세에 비하면 주름살도 없고 건강하신 편이다. 사년 전인가 층계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고 그 휴유증을 앓고 계시지만 목소리만은 쨍쨍하시다.
팔순 상 앞에서 아들과 딸들과 손자들 11명과 그리고 형제인 우리 네 사람이 사진 촬영을 했다. 선물증정식을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 우리와 막내 시누이 부부에게도 조카들은 고맙다는 선물을 준비해주었다. 나중에 보니 만원짜리 지폐를 돌돌 말아 작은 상자에 가득 채워 넣은 교통비였다. 잔칫날에 먼 길 오신 분들께 여비 정도는 챙겨줄줄 아는 지혜를 어디서 배웠을까. 알면서도 나는 실천하지 못하고 산다. 조카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반듯하게 잘 가꾸어진 것이다. 조카의 이십 대 딸들까지도 이쁘기도 하거니와 친절하고 상냥하다. 무엇이든 앞서서 도와주려고 애썼다. 부산역으로 돌아올 때에는 택시도 미리 불러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정을 오랜만에 푸짐하게 느꼈다. 참으로 따스했다.
가장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아들인 조카가 읽어내려가던 직접 쓴 축하 편지다. 내용이야 고맙고 감사하고 애쓰셨다는, 누구나 쓰는 감사의 글이지만, 그 글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조카의 울먹이는 표정과 어린날처럼 다정하게 부르는 엄마 엄마 그 소리는 그곳에 모여앉은 모두를 울렸다. 조카는 큰시누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삼켰다. 큰시누이도 눈물을 훔치셨다. 옆에 서 있던 여조카 둘도 훌쩍이며 눈물을 찍어냈다. 혼자 살아오셨으니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많으셨던 큰시누이다. 자식들도 그 시간들을 함께 지나왔다. 서럽고 고단했던 시간들에 대한 눈물이며 또한 서로에게 고마워하는 눈물이 아닐까. 가족은 역시 위대하다. 끈끈하다. 서로에게 아픔이었다해도 짐이었다해도 결국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나도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에 아침 일찍 큰시누이에게 핸드폰으로 축하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남편이 우렁찬 목소리로 가족 앞에서 읽어내려갔다.
먼저
진심으로 팔순을 축하드립니다
지금만큼 건강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먼 길 무던하게 잘 달려오셨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그 길 참으로 잘 견뎌내셨습니다
고단하고 험란한 그 길 참으로 지혜롭게 걸어오셨습니다
꿋꿋하게 지켜내신 어머니의 자리는 아름답습니다
장하십니다 애 많이 쓰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늘 그곳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우리 가족의 정신적 기둥이십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삼촌이 함께 있는
마음의 고향이십니다
어머니께서 아프실 때
한 달에 한번씩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의왕까지 오셔서
어머니 곁을 지키시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되셨습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높은 전화 목소리는
무엇보다 듣기 좋습니다
건강하시다는 표시이니까요
계속 그런 목소리 듣게 해 주십시요
가족들 모두 이만큼 건강하고 화목하니
축복입니다 행복입니다
건강하십시요
팔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제 남편이 시누이와 통화하였다. 처음에는 기운이 없고 작은 목소리셔서 어디가 아픈신가 걱정이 되었다. 안방에서 통화중이었는데 통화가 길어지면서 거실을 지나 내가 앉아있는 방에까지 시누이의 목소리가 쩡쩡 울려왔다. 마음이 놓였다. 그 목소리 계속 듣게 해 주십시요 마음속으로 나는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