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진 시대를 관통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 청년의 삶의 궤적을 기록한 김재원·이숭희 엮음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푸른사상). 일제 강점, 대공황, 소련의 스탈린 대숙청, 한국전쟁 등 시대의 격랑에 휘말려 희생된 김건후의 불운했던 삶을 파헤침으로써 참혹했던 역사의 비극을 되새긴다. 2022년 1월 25일 간행.
■ 엮은이 소개
김재원
뮌헨대학교(LMU)에서 서양미술사학, 고전 고고학, 미술교육학을 전공했다(박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로 19, 20세기 미술사 및 그리스도교 미술사를 강의했다.
이숭희
뮌헨대학교(LMU)에서 정치학, 러시아사, 유럽사를 전공했다(박사). 한국 국방대학교 교수로 국제정치학, 동북아시아의 안보 정치 및 강대국의 외교를 강의했다. 현재 한국 국방대학교 명예교수이다.
■ 책머리에 중에서
20세기 초, 전 세계를 뒤흔든 격동과 마주하며 살았으나, 잊혀진 역사에 묻혀버린 김건후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한국에서 김건후(金鍵厚)로 태어난 그는 중국 국적을 획득하면서 칭치엔허가 되었고, 미국에 도착하여 청년 허버트 김(Herbert Kim)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국 대공황은 학업을 마친 그를 소련으로 내몰았고, 소련에서는 게르베르트 김(Герберт Ким)으로 불렸다. 이 여러 이름은 그가 겪은 역경을 반영한다. 결국 그는 소련에서는 스탈린 대숙청에,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에 희생당했다. 그는 파란 많은, 기구한 삶을 살았던 한국인 인텔리겐차이며 광산 엔지니어였다.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은 많은 곳에서 여러 해를 거쳐 언급되었으나, 한국의 가족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딸 김재원이 이 모든 기록들을 파헤치기 전까지는 단지 그의 부인이었던 정정식 교수에 의해 단편적으로 그의 딸에게 전해졌을 뿐이다.
김건후의 삶의 궤적은 그의 개인적 선택이기보다 한국이 처했던 국내외적 격변의 결과였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떠난 망명, 상해 독립운동가 가족의 궁핍한 삶, 일본의 대륙 침략과 동북아의 세력 변화, 미·소 간의 협력과 대립, 그리고 세계 최초의 이념적 대립이었던 한국전쟁. 이 모든 것들이 김건후가 겪어야 했던 고난이었고, 그의 고난은 곧, 돌아갈 곳 잃는 디아스포라의 모진 운명이었다.
■ 책 속으로
1904년(혹은 1905년) 평양 남쪽, 강서에서 태어난 허버트 김은 그의 가족을 따라 1916년에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이는 그의 부친 김홍서(1886~1959)가 감리교 지도자였으며, 교육자였고, 평양의 주요 신문사의 편집인으로서 일제의 한국 점령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은 1919년 상해에 세워진 망명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국 시민권을 얻은 허버트 김은 상해의 YMCA에서 활동했고, 결국 미국 유학을 결정했으며, 그의 부친도 이 결정을 지원했다.
1923년 허버트 김은 미국으로 들어와서 사우스다코타에 있는 휴론대학에서 수학했다. 그가 중국, 일본 등지에서 활약한 사회주의적 기독교 선교사인 조지 셔우드 에디(George Sherwood Eddy, 1871~1963)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그는 “젊은 한국인으로서 나는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고 느꼈고 (…) 그래서 광산학의 미래 실용성에 주목했다”고 하였다. 휴론대학에서 수학한 이후 1924년에 그는 콜로라도의 광산대학(CSM)으로 옮겨갔고, 여름방학마다 사우스다코타 리드에 있는 홈스테이크 금광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28년 CSM에서 광산학 학위를 받은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2년 동안 수학하였고, 광산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그는 미국인, 폴린 립만(Pauline Liebman)과 결혼하였다.
(20쪽)
1937년 11월 1일 월요일 밤, 11시쯤 이미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몇 사람이 호텔로 들어와 허버트 김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스텝니약(Stepniak) NKVD의 장이었던, 적어도 3년 전부터 나를 알고 함께 일해왔던 소로킨 대위가 중위를 대동하고 내 방으로 들어와, 내게 소위 체포영장을 보여주었다. 난 그들에게 뭔가 큰 오해가 있을 거라고 말했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난 기꺼이 가서 뭐든 설명할 작정이었고, 그날 밤 그들이 날 다시 보내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옷을 입고 소지품을 챙겨 기다리고 있던 NKVD 차량에 태워졌다. 나는 야밤에 은밀하게 붙잡혀간 수백만 명 중 하나였다.
(김건후 친필수기,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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