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마음과 생각에 있는 것을 언행으로 드러내는 동물이다.
마음과 생각에 없는 언행을 표현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과 생각따라 그의 보물이 결정된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그 마음이 있느니라'
성경은 나에게 죄인이기를 원하고 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이 죄인입니다 라고 시인하며 고백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항상 자신이 의인이다라고 중심에 두고 있다.
즉 난 죄가 없다라고 하며 무엇이든 잘하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에는 고작 몇 가지,
그래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그들 고작 몇 가지의 범죄한 것들을 갖고서 회개한다.
그렇지만 성경을 그것을 회개하라고 명하시거나 교훈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죄를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서라고 하시는 것은
나의 본질이, 나의 마음과 생각 자체가 죄이므로 그 자체를 지적하시는 것이다.
나 자체를 부정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나의 죄된 고백은 고백에 의미가 없다.
나란 존재 자체가 죄인이기에 그 자체를 부정하고 그 죄를 보시고 심판하시는 분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을 살았던 모델이 바로 사도바울이다.
그렇기에 그는 주 앞에서의 세월의 흐름따라 더욱 자신을 낮추었고 자아를 부정했다.
사도 중의 막내에서 성도 주에 가장 작은 자 그리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마음을 드러내었다.
내가 죄인이라고 주 앞에 고백할 때에는 내가 고백한다는 데에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할 때에 받으시는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해도 그것은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
핵심은 내가 죄를 고백할 때에 나의 죄가 가리워지고 사함을 받느냐 하는 데에 핵심이 있다하겠다.
진정 죄인된 마음을 가진 자는 그의 마음 밭이 옥토와 같은 마음밭을 일구고 살아간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갈수록 겸손해지고 은혜를 더욱 사모하며 빚진 자로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언제나 자신을 빚진 자로서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그의 삶은 주의 백성들을 향하여 낮추고 주는 삶이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주 앞에서 들림을 받고 천국에 가기 전까지의 내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주 앞에서의 겸손한 삶이요 은혜받은 자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