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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잃은 제 친구의 亡婦歌입니다.
방장님, 꼭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신정재
제례하옵고~
저의 고교동창 늙은이들의 글 모음 <우리들의 이야기⓼ -서울사대부고
11회 동창 수필모음>을 보내드립니다.
같은 세대를 살아온 이야기들이니
조금은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追而,
보내드리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333p)의 시는
작년에 상처(喪妻)한 친구(여형권)의 시입니다.
꼭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20.5.4.
신정재
....................
눈물 비벼 넘기며(亡婦歌)…
여형권
몇 년 전부터 신정재 씨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도 응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크게 자랑할 거리도 이야기 소재도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
몇십 년을 동고동락하던 짝궁을 잃고 외롭게 지내는 나에게
고인이 된 이규숙 동문이 위로차 보내온 위로의 편지에 힘입어
몇 자 적어 봅니다.
새록새록 그리운 님 달그락거리며 아침을 열고
소박한 밥상에 네 정성 묻어나더니
적은 거실은 광야처럼 넓어지고
돌돌 거리던 조약돌 소리 사라진 지 오래라.
너는 떠나도 네 손길 스친 찻잔 아직 따스해,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잔에 커피 내려 창가로 간다.
싱그러운 새벽바람 행여나 네 향기 묻어오려나
창문 열고 다가서면 그렇게 또 너 없는 하루가 시작되고
달그락 소리로 아침잠 깨우고 정성을 양념으로 예쁜 밥상 놓이더니
이제는 식은 물 한 모금도 눈물 비벼 넘기네.
꺼져가는 불씨는 끝내 잦아들고
꼬옥 지켜주리라 다짐한 지키지 못할 약속은 물거품보다도 못한,
허세였더라.
빼앗기듯 너를 보낸 후 소중한 우리 둥지는 모든 것이 빛을 잃고
허무의 바다가 삼켜버렸지.
카나리아 노래 멈추고 시냇물에 돌 구르는 소리 사라진 지 오래라.
홀로 남겨진 서러움 목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울음
명색이 사나이라 터트리지 못하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머언 산 한 번 바라보고.
너는 내 손톱밑 가시 깊이깊이 숨어 있어 들어낼 수 없고
상처도 너무 진해 지울 수도 없어
어느 여인에게도 마음 틈새 보인 적 없고
가슴 열어 보인 적 더욱 없으니 훗날 어디서 무슨 인연으로 만나든
내 사랑 다하지 않았음을 신께 고하리,
불같은 사랑도 아픈 이별도 모든 것이 절대자의 뜻
내 능력 없음을 이미 아시고 거두어 옆에 두고 돌보려 하심이라.
너를 괴롭히던 아픔도 누구나 짊어지는 원죄까지도 다 내려놓고,
천사의 날개 덮고 고이 잠들라.
<(株)에스에프 대표이사/서울사대부고 11회 동창회보 편집인/서울대 농대 축산학과
(59학번)졸/近著:《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유럽을 만나다》등 3권(한길사刊)>
"제가 왜 붓을 꺾어야 합니까!
역적질이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구대열
방장님,
제목도 없이 글을 보냅니다.
좋은 제목 하나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쓴 뒤,
지난 4월 24일 임선영 씨의 글이 나간 이후 글방에 실린 글들을 훑어보았습니다.
새삼 우리 글방의 품위가 느껴지더군요. 방장님의 동기분들의 글이었으니
저보다 3년 선배들의 글들이었지만, 저보다 젊은 분들의 글들도 모두
젊잖게 임선영 씨를 조용히 꾸짖더군요. <!--[endif]-->
이번에 보내는 제 글이 실릴 여지나 있을까 한동안 망설였습니다만.
마침 하태형 선생님의 글에서 오래동안 의문을 가졌던 문제가 떠올라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더군요.
저의 글은 많이 가다듬어 겉으로나마 점잖게 보이려 한 것이니
글방 식구들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뒤끝 질긴 한 인간이 아직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참고로 우리글과 말투에는 쓸데없이 ‘님’이나 ‘분’ 등 존칭어가 붙는데
이제는 이게 표준어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일본어나 중국어에는 선생‘님’은 없지요. 선생 자체가 존칭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글에서 ‘선배분’이라고 쓰자 틀렸다고 컴퓨터에 붉은색 밑줄이 나타나는군요.
‘분’을 지웠더니 정상으로 나타납니다.
‘선배’와 ‘분’을 띄었더니 붉은 줄이 없어지는군요.
이보다는 저는 ‘선배분’이란 존칭이 적절치 않다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우리말의 2중 3중 존칭은 가급적 피해야죠.
‘선배가 드신 오늘 저녁 식사는 맛이 좋으셨습니다’에서
‘맛이 좋다’의 주어는 ‘식사’이지 선배가 아니죠.
‘식사’에게 괜히 존칭어를 붙일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존칭을 붙이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 믿는 것 같습니다. 정부조차도 ‘대통령님’, ‘장관님’을
남발하지요. 대통령 자체에 존칭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극존칭을 남발하는 북한의 영향일까요?
본론으로 돌아가서,
임선영 씨의 글에 대해서는 미국 어틀란타에 계시는 박선근 회장님의 점잖은 충고와
김영희 대사의 날카로운 지적이 글방의 공식 대응이며,
이 이상 직접적인 논평은 필요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이 일이 없었다는 듯 모두 잊자는 건 아닙니다.
5월 16일字 글방에 신복룡 교수님은
제가 임선영 씨의 글에 ‘비분강개’하여 붓을 꺾기라도 할 것 같다고 걱정하시더군요.
4월 말 이후 만난 글방 친구들 거의 모두가 ‘이게 나를 두고 한 말인가?’라며
일면 분개하고 일면 ‘웃기고 있네’식으로 희화화하더군요.
이같이 정신적 피해/상처/충격을 받은 분들에게 이제 조용히 덮고 넘어가자고 하면
끝날 일은 아니죠. 각자 자기대로의 반응을 수시로 보이는 것은
정신건강 상 좋고 또 방장님이라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임철순 주필같이 ‘임선영 씨 잊지 마시라요! 방장은 신명 나면 남의 사신(私信)도
까발리는 Psycho 편집자라는 걸!’이라며 점잖게 일갈하는 분도 있고,
두고두고 안줏거리로 삼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거니까요.
저는 붓을 꺾지 않습니다.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무슨 대단한 분한테 꾸지람을 받아야 합니까?
신문기자 시절로부터 치더라도 50년 넘게 글 써먹고 살아온 사람인데,
할 수 있는 건 70 평생 배워 온 것을 바탕으로 좀 잘난 체, 좀 아는 체한 것에 불과했는데,
제가 무슨 역적질이라도 저질렀다는 말인가요?
삼전도의 청 태종 칭송비문을 썼다고 팔목을 자르겠습니까?
이등박문 친양시를 썼다고 붓을 꺾겠습니까?
지난번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 것은
이제 쓸 소재도 다 떨어졌고 다른 일거리가 생겼으니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런 시답잖은 글을 보았으니 ‘옳거니, 그렇다면 이제 좀 쉬어 갈까?’라고
가볍게 한 말입니다. 이게 비분강개로 비쳤으면 죄송합니다.
신복룡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용서를 바랍니다.
이상의 글이 지나친 것이라 생각되시면 방장님이 없애버리세요.
방장님,
내친 김에 또 한 번 잘난 체 해 볼까요?
5월 11일자 글방에 오랜만에 하태형 교수의 시수(詩瘦)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습니다.
두보(杜甫)의 <暮登西安寺鐘樓寄裴十迪-저녁에 서안사 종루에 올라 배적에게 보냄>이란
시가 나옵니다. 여기에 배적은 裴十迪이라 되어 있습니다.
일단 이게 한자가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배적’이라 되어 있으니 그동안 배적이란 인물을 두고
혼란스러웠던 점을 하 교수님에게 문의드리고 싶습니다.
중국 당 시대에 ‘배적’이 두 번 나옵니다.
당고조의 친구 배적(裵寂)과 두보, 왕유(王維, 699-759)의 시에 나오는 배적(裵迪)입니다.
배적(裵寂)과 배적(裵迪) 모두 구글 등을 찾아보았으나 생몰연대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 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당고조 이연(李淵)의 술과 노름친구이자
당의 개국공신인 배적을 보았을 때입니다.
그 뒤 배적(裵寂)은 당태종에게 고구려원정을 말렸다는 걸 본 듯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보았으나 확인할 수 없군요.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을 부추긴 배구(裴矩, 547-627)와 혼동한 것인가 했으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645년 안시성에서 패퇴한 뒤
직언을 잘하던 신하 ‘위징(魏徵)이 살아 있었다면 고구려 원장을 말렸을 것인데’라고
한탄한 것은 <삼국사기>에 나오지요.
왕유의 친구 배적(裵迪)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생존한 사람입니다.
처음엔 ‘배적’이라는 한글 이름이 같고 또 술을 좋아하여
왕유와 여러 시를 남겼으니 무심결에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 생각했지요.
왕유가 쓴 ‘작주여배적(酌酒與裵迪- 배적과 술을 마시며)이란 시가
세상사를 잘 그리고 또 인간들이 살아가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싶어 외운 바 있지요. 최근엔 임철순 주필과 이 시를 두고
카톡으로 의견을 나눈 적도 있습니다. 시를 한번 볼까요.
酌酒與裵迪 작주여배적-
酌酒與君君自寬 작주여군군자관
人精蒜覆似波瀾 인정산복사파란
白首相知猶按劍 백수상지유안검
朱門先達笑彈冠 주문선달소탄관
친구여 술이나 드시게.
인정은 물결같이 뒤집히는 것.
늙도록 사귄 벗도 서로 칼을 겨누고,
성공한 이도 후배의 앞길을 막나니,
草色全經細雨濕 초색전경세우습
花枝欲動春風寒 화지욕동춘풍한
世事浮雲何足問 세사부운하족문
不如高臥且加餐 불여고와차가찬
비에 젖어 풀들이 푸른 색을 띄고 있고
봄바람 차가와 꽃은 피지 못하거늘,
뜬구름 같은 세상 말을 해 무엇하랴.
누워서 배불리 지내는 게 제일이지
이 배적(裵迪)은 당고조의 배적과는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았던 다른 인물이라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두보(杜甫)도 생몰연대가 712-770년이니
왕유와 같이 성당(盛唐)기의 인물이죠.
그러던 차에 하교수님의 ‘시수(詩瘦)’란 글을 읽고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두 인물의 간단한 행적이나 작품 등 좋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 2020.5.24.
<梨大정외과 명예교수/이대학보사 편집인 역임/국제정치학 박사(런던政經대/LSE)/
著書:"삼국통일의 정치학", "제국주의와 언론"/前한국일보 사회, 외신 기자
(한국일보 견습 22기)/부산고~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고성 産>
박흥진이 다시 쓰는 古典영화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1954)》
박흥진 - 名匠 엘리아 카잔 감독 & 아카데미 8관왕 수상작
엘리아 카잔이 감독한 콜럼비아 작품.
뉴욕 선紙 기자 말콤 존슨이 1948년에 일어난 뉴욕부두의 한 노동자 피살사건을 계기로
24회에 걸쳐 부두의 부정과 노동조건을 폭로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흑백명작이다
존슨은 이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아카데미 작품, 감독, 남우주연(말론 브랜도),
여우조연(에바 마리 세인트), 각본, 촬영 및 편집상을 받았다.
뉴욕 부두노조를 장악하고 있는 갱 두목 자니(리 J. 캅)가
졸개 테리(말론 브랜도)에게 노조 비위를 고발하려는 조이를 아파트 옥상으로
불러내라고 시킨다. 자니의 부하들이 조이를 아파트 아래로 밀어 떨어트려 죽이자
조이를 혼내주는 줄만 알았던 테리는 충격을 받는다.
테리는 유망한 권투선수였으나
내기 시합에 관계된 자니의 변호사인 형 찰리(로드 스타이거)의 요구로
일부러 져준 뒤로 자니의 졸개로 전락했다.
테리의 유일한 낙은 아파트 옥상의 비둘기들을 키우는 것.
테리는 조이의 여동생 이디(에바 마리 세인트)를 알게 되면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한편 이 지역 담당 신부 배리(칼 말덴)는 노동자들에게 단결해
노조의 비리를 폭로하라고 호소하나 모두 자니가 두려워 이를 피한다.
권투선수 테리는 죽은 조이의 여동생 이디와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서로 사랑에 빠진다.
깡패 테리(왼쪽)는 이디와의 사랑으로 인해 양심과 자존을 되찾는다.
그리고 테리는 배리 신부의 조언에 따라 이디에게 자신이 오빠 조이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고 고백한다.
테리가 삐딱하게 나가자 자니는 테리의 친형 찰리(변호사)에게
동생 테리를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찰리는 동생 테리에게 자니의 눈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사정하나
테리는 “형 때문에 내가 이런 날건달이 되었다”며 거부한다.
테리가 이디를 찾아가 둘이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는 순간
아파트 아래 골목에서 테리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뛰어나간 테리와 그를 쫓아온 이디를 향해 트럭이 질주해오나 둘은 위기를 벗어난다.
변호사 찰리가 자니 일당에 의해 살해되면서
테리는 복수를 하려고 혈안이 되는데 배리 신부가 찾아와 폭력을 쓰지 말고
부두노조 범죄조사위에 출두해 노조비리를 고발하라고 종용한다.
^테리는 조사위에 출두, 노조의 온갖 비리와 살인행각 등을 폭로한다.
다음 날 아직도 자니의 영향력 아래 있는 부두에서 일자리를 못 얻은 테리가 분개,
자니를 찾아가 둘 사이에 격렬한 격투가 벌어진다.
테리는 자니의 졸개들에게 죽도록 얻어터지고도 일어서 일터로 향한다.
다른 노동자들도 자니의 말을 무시하고 테리의 뒤를 따른다.
영화의 음악을 작곡한 사람은 뉴욕필의 상임지휘자였고 작곡가이기도 한
레너드 번스타인. 오프닝 크레딧 부분에서 천둥번개가 번쩍이고 벼락이 치는 듯이
험악할 정도로 강력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음악은
테리와 이디의 사랑의 장면에서는 매우 서정적이요 감상적인데
이 음악은 ‘온 더 워터프론트: 심포닉 스위트’라는 이름의 CD로 출반됐다.
번스타인의 유일한 영화음악이다.
<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 편집국장 역임/LA영화비평가協, 헐리웃외신기자協(골든
)
LA
배운다는 것은
이승신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치어 세상이 혼란해지고 바뀐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온라인 강의가 길어지며 교육과 수업을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코로나 창궐 이전에 교육받았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다.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어려서부터의 교육은
습득하는 지식과 그 콘텐츠의 내용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멈춰서 뒤를 돌아본다.
할머니 손에 이끌리어 들어갔던 초등학교, 여중·고, 대학 그리고 연이은 미국 유학을.
요즘 아가들 서너 살에 배우는 한글 영어를
일곱 살에 덕수초등에 들어가서야 한글을 깨쳤고 구구단도 배웠겠으나
배운 지식은 어슴푸레하고, 쓰다듬어 주시던 2학년 때 여선생님의 따뜻한 손,
우리 집을 방문하셨던 온화한 인상의 5학년 선생님
그리고 단정하고 깔끔하시던 6학년 남선생님 얼굴이 떠 오른다.
여중고에 가서는 영어를 처음 배우고 학과목이 열 몇 개로 늘어났기 때문에
분명 많은 지식을 배우고 쌓았겠으나 딱히 기억이 나질 않고,
각 반을 돌며 내 그림을 칭찬해주시던 중 1 담임 미술 선생님,
국어 지리 선생님의 예쁜 모습, 말투, 표정, 특이한 억양, 첫 수업 들어오자마자
시든 꽃을 치우시던 영문법 선생님의 손놀림,
얼굴이 약간 기울어져 생긴 6시 5분 전 같은 별명들,
졸라서 들은 6.25 전쟁 참전 이야기, '초원의 빛' 등 영화 이야기,
노천극장의 3천 명 채플이 더 생각난다.
대학은 또 어떤가.
영문학을 꼭 전공해야지 하는 절실함보다는 당시 컷 라인이 높아
선생님이 권유하신 듯한데 공부 내용이 있었겠지만,
4kg가 넘는 영문학 앤솔로지Anthology 책이 무거워 한쪽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4년을 매일 들고 다니던 것과 높 낮은 너른 캠퍼스를
책 들고 입구에서 제일 먼 뒷문께 문리대 건물로 꽤 걸었던 기억이 난다.
두툼한 앤솔로지 한 부분을 자기 차례가 오면 읽고 번역하던 생각이 나나,
졸업 때까지 그 책을 다 보진 못했고, 5월의 빛나는 하루, 교실 밖 언덕진 잔디에 앉아
교수님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맛나게 먹은 생각, 월 수 금 점심시간에
대강당 예배에 출석 체크 하던 것, 매해 연기하기, 대학 카렌다모델 하기,
일선 장병들에게 가 기타로 노래하기, 5월의 May Day 축제 등이 선명히 떠오른다.
지금도 모교를 들리게 되면 햇빛 쏟아지던 그 잔디에 앉아 본다.
그리고는 그다음 순서처럼 간 워싱턴의 유학, 너무나 자유롭고 확 바뀐 환경임에도
곧 적응하고 이상을 높이며 순조롭게 자라난 듯하나,
익숙한 가족과 환경을 멀리 떨어뜨려 허전하고 외로웠던 기억~ 이 주마등처럼 지나 간다.
제수잇(Jesuit) 학교인 조지타운 대학원은 지도교수가 사라 Sara 신부였는데,
신부복을 입었음에도 따스한 인정과 휴머니즘으로 더 기억이 된다.
그러고 보니 배우고 공부한 내용보다는 스승 한 분 한 분의 분위기, 교내 분위기들이
차근차근 떠오르고 있다.
분위기가 떠오르는 것은 일본 유학도 그렇다.
최근의 기억이 그렇기도 하지만 선생님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는데
그것을 깼기 때문에 기억에 많이 남는지도 모른다.
일본도 외국이고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가르치고 공부하나
그들의 얼굴과 겉모습은 우리와 같다.
그러나 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 자세가 기대 이상 달랐다.
그들의 지나칠 정도의 친절함 상냥함 세심함 꼼꼼함 겸손함은 나를 매일 놀라게 했다.
20여 년 학교를 다닌 틀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토 동지사 대학 수업에서 배운 내용들도 영화장면처럼 머리를 스치나,
벌써 구체적인 기억은 일일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학생을 향한 자세 겸허함 미소지음 나긋나긋한 음성,
그 철저한 인상은 지금도 가슴에 새겨져 있다.
첫 수업과 마지막 수업에서 학생들을 향해 90도로 한참을 깊이 절하던
연세 높은 도오야마 카즈코遠山 和子 여선생님과 몇몇 분의 마음 자세를 잊을 수 없다.
도오야마 카즈코遠山和子 선생 -도시샤대학 2016 1 15
배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 존경스러움을 무의식적으로 배우며 인성을 키워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세계의 언택트untact로 얼굴 대하지 않고 하는
사이버 강의가 아쉽고 걱정된다.
당연히 생각했던 지난 모든 수업이 '애정의 눈길'을 주신 선생님들과 함께 했던 것임을
지금만큼 깨우치고 감사할 수가 없고, 지난해 제자들과 눈을 맞추며 했던
나의 대학원 수업도 코로나 창궐 이전이어 감사할 뿐이다.
가다가 멈추고 돌아보는 여정, 스승들의 인정과 애정이 내 안에 있었네
수업 -교토 도시샤대학 2016 1 15
야마모토 카즈에山本和惠 선생 - 도시샤대학 2016 7
제자들과 종강날 - 단국대학원 2019 6
<시인, 에세이스트, '손호연단가연구소'이사장/이화여고~梨大영문학과~조지타운大
대학원 졸/著書: "치유와 깨우침의 여정" 등/최근 교토 동지사(同志社)大 유학>
봄 따라 꽃 따라
최병효
서귀포 범섬을 뒤로 하고... 2020.5.7
“모두에게 나쁜 바람은 없다. It is an ill wind that blows nobody good”라는
서양 속담은 간단하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이 속담의 논리에 따르면
COVID-19 유행병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혜택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할 것이다.
모든 회사의 주가가 폭락한 것만은 아니며
관련 약품이나 의료용품 생산 회사 등 큰 폭으로 가격이 오른 주식도 있고
이 세계적 공황 상태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큰돈을 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유행병이란 것이 꼭 모두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옳은 것일까?
일찍이 프랑스 경제학자 끌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야 Claude-Frédéric Bastiat
(1801-1850)는 “우리가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Ce qu'on voit et ce qu'on ne voit pas)이라는
1850년의 논문에서 파괴와 이를 복구하기 위해 사용한 경비는
실제로 사회에 혜택이 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함으로써
기회비용 (opportunity cost) 이라는 경제학 개념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는 아이가 집의 유리창을 깨면 유리쟁이가 돈을 버니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필요한 곳에 돈이 사용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비윤리적일뿐더러(예: 그 돈이 유리쟁이에게 지불됨으로서 빵집 주인이 부당하게 피해를 당함)
사회 전체의 경제활동을 왜곡시킨다고 하였다.
이를 경제학에서 “부서진 유리창 오류 또는 유리쟁이의 오류(broken window fallacy
or glazier's fallacy)” 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COVID-19로 생긴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하여 더 많이 자전거를 타고
더 많이 꽃 구경을 다니는 것도 이 “부서진 유리창 오류” 에 해당되는 것인가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사회.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백수라서 피해 볼 학생이나
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 오류에 해당 되지 않고,
“모두에게 나쁜 바람은 없다”라는 속담을 순수하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어쨌든 자전거를 타고 강가를 돌아다니는 것은 남에게 주는 피해가 없고
점심이나 커피도 사 마시니, 소비활동을 하지 않고 혼자 집에서 자가격리하는 것보다는
경제에 기여하는 면이 있다 할 것이다.
꼭 코로나 덕분이 아닌지는 몰라도 이번 봄에는 평생 어느 때보다도 많이
우리 산하를 둘러보고 느끼고 봄꽃의 향연에 취하게 되었다.
작년 3월 말부터 자전거 타기를 재개하여 우선 구리 왕숙천 변의 동구릉과
한강 상류 두물머리 부근의 다산 유적지 등을 둘러보며
점차 북한강과 남한강 방향으로 더 깊이 진출하기도 하고
중랑천, 탄천, 양재천, 안양천, 우이천 등 한강의 많은 지류 들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북한강 시원지 춘천호와 파로호, 남한강 시원지인 충주호와 경인운하를 따라
한강의 끝인 인천갑문 까지 수차례 다녔으니 어언간 한강 종주를 마친 셈이다.
지난 4월 말에는 임실 강진면에서 시작되는 섬진강 자전거 길 200km를 따라
광양까지 2박3일 종주를 마쳤고, 5월 초에는 제주도 일주도 무사히 마쳤으니
1년여 동안 제법 우리 산천을 주유한 셈이다.
좁은 나라라고 해도 아직 동해안 종주, 낙동강과 영산강 종주,
울릉도 일주 등 해지기 전에 가야 할 길은 멀기만하다.
북한강 양귀비-물의 정원 2020.5.23
자전거로 다니니 걸어서나 자동차로는 가기 힘든 장소에서
여러 종류의 꽃을 발견하고 새삼 우리 강토가 수수하나 제법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봄이 되기 전에 전령사로서 온다는 매화는 특히 좋아하는 편이라
전에도 이름 있다는 매화들을 좀 찾아다녔다.
특히 7-8년 전에 발견한 전주 부근 완주군 소양면의 추졸산 위봉사 홍매화는 잊지 못해
그 후 해마다 찾아가 봤지만 그 만개의 시기를 맞추지 못해
계속 마음속에 그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 5월 초 임실 산소에 간 김에 들러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그 홍매가
뒤늦게까지 나를 기다린 듯 황홀한 자태를 보여줘서 크게 감동하였다.
위봉사 홍매 2020.5.1
수년 전 봄에는 화엄사에 갔으나
때가 늦어서 숙종때 심었다는 흑매의 꽃을 보지 못해 꿈으로만 남아 있다.
작년에는 순천 선암사의 천연기념물로 6백년된 백매와 홍매의 두 그루 선암매를 보러 갔지만
늦었고 50여 그루가 된다는 그 후손들의 개화된 모습만 볼 수 있었다.
대신 귀경길에 인근의 복사꽃 마을 농장에서 만개한 복사꽃에 파묻히는 호사를 누렸다.
선암사 인근 복사꽃 마을 2019.4.13
서울에서는 창경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양쪽으로 제법 오래되고 아름다운 홍매 두 그루가 있는데
금년에도 늦어서 우아하지 못한 뒷모습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경복궁의 흰 매화들은 늦게 피어 홍매대신 백매로 아쉬움을 달래보았지만
역시 매화는 홍매라고 할 것이다.
국립현충원에 있는 제법 오래된 한 그루의 홍매는 내가 잊지 않고 매년 찾는데 올
해도 그 만남의 시기를 맞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전거로 다녀보니 어느덧 우리나라도 벚꽃 나라가 된 것 같다.
전국 어디서나 벚꽃이 봄꽃으로 제일 선호되는 것 같다.
빨리 자라는 장점에다가 꽃이 일주일 내외 밖에 못 가나
화려하고 가을 단풍도 좋아 모두들 즐겨 심은 탓인듯 하다.
나는 특히 분홍색 왕벚꽃과 진분홍의 수양벚꽃을 좋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하지는 않다.
수양벚으로는 역시 국립현충원이 국내 최고의 명소가 아닐까 한다.
이번 봄에도 때를 놓치지 않고 이를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자전거로 국립현충원에 가서 벚꽃과 홍매화를 본 다음에
한강 선유도로 들어가니 약간의 수양벚꽃과 제법 키가 큰 일반 벚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일본정원만은 못하나 한강 가운데 있어 그런대로 둘러볼 만 하였다.
경회루 옆 수양벚꽃 2020.3.29
국립현충원의 수양벚꽃 2020.3.30
수년 전부터 나의 눈에 갑자기 들어온 봄꽃 중에
창경궁의 살구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창덕궁 후원 입구에서 들어가 오른쪽 언덕 아래로 큰 매화로 보이는 나무에
엄청나게 꽃이 많이 피어 있어 횡재한 기분으로 내려가 살펴보니 살구나무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 큰 매화나무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두 나무는 줄기나 꽃으로 구별하기 어려우니 대개 키를 보고 짐작해 보나
아직도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꽃에 대한 나의 안목이 부족하여
홍매화와 복사꽃은 어렵지 않게 구분이 가나 여러 나무의 꽃들이 아직 헷갈리기도 한다.
이것도 수년전에야 눈에 들어 온 것이지만
경복궁 경회루 옆 살구꽃 나무들도 제법 오래되어 매우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74년 1월 외무부에 들어가니 사무실이 중앙청이라 점심시간에 뒷문으로 경복궁을 출입할 수 있어
자주 산책을 했으나 자연에 대한 관심보다는 업무나 사람에 대해서만 몰두한 탓인지
특별히 생각나는 꽃이 없다. 꽃도 나이가 들어야 눈에 들어오는 것인가 보다.
경복궁 살구꽃 나무들 2020.3.29
작년 봄 청남대에 꽃구경 갔다가 뜻밖에 매우 아름다운 꽃사과 꽃을
발견하고 크게 횡재한 느낌이었는데 엊그제는 68년도 최초로 시작된 교양과정부 다니느라
인근에 하숙하며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던 공릉동 서울공대 캠퍼스(현 서울과학기술대)를
52년 만에 찾았다가 역시 뜻밖에 꽃사과 꽃을 발견하였다.
한강에서 중랑천으로 들어가 12km정도 가면
옛 경춘선 철로길이 자전거 길로 변하여 육사 앞 화랑대역까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공릉동으로 가는 도로가 있어 좀 따라가니 그곳이었다.
일제시대 서울공업전문대학의 광산학과 건물이었다는 당시 교양과정부 건물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일제시대 지은 옛 서울공대 3층 건물들도
새로이 단장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학생 수가 14,000명이라는 현 서울과학기술대는
옛 서울공대 캠퍼스 전체에 수 많은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서
옛날의 잡초밭과 같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대학이랄 수도 없었던 당시 공릉동 교양과정부 생활은 지금에 비하면 판자집 생활이라고 할 것이다.
명색이 대학이라지만 제대로 된 도서관도 없고
인근은 아무런 상점이나 문화시설도 없는 빈촌에 밭과 야산뿐으로 참으로 황량하였다.
그래서 내 하숙방에 찾아 온 친구 이수혁과 서울여대로 이어지는 뒷산을 오르며
누구 시인지도 모른채 “ 그윽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허공에 던진 돌팔매 하나….” 라고
읊조리고 각기 돌팔매 하나씩을 허공에 던지며
이게 대학이냐 하며 절망했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문화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명동이나 종로의 영화관, 맥주집,
종로 1가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나 “가화” 니 “가연“이니 “세시봉” … 이니 하는 다방에서
달래는 정도였다. 그 후 동숭동에서의 3년도 매학기 반독재 시위로
학기의 절반도 채운 적이 거의 없으니 대학을 다녔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요
즘 코로나로 대학이 잠시 휴강이나 온라인 상태라지만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대학생활이라고 생각된다.
52년만에 공릉도 옛 교양과정부에서 . . . 2020.4.16
4월 중순 청평댐 옆에서 발견한
뒤늦게 만개한 진분홍의 왕벚꽃은 나를 놀라게 하였는데
한 달도 더 지난 며칠 전 다시 찾아가 보니 인근 왕벚꽃이 아직 몇 개씩 나무에 달라붙어 있어
반가웠다. 이제 마지막 남은 왕벚꽃도 사라져 가고 라일락도 지고
일본목련과 후박꽃도 마지막 꽃을 피우고 모란도 져가니 사라져가는 봄이 아쉬워
마지막 봄꽃들을 보러 더욱 바삐 자전거 바퀴를 돌리고 다닌다.
청평댐 옆 왕벚꽃 2020.4.18
영랑은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리면 일년 내 봄을 여윈 슬픔에 잠겨
울거라고 했는데 대장부로서 너무 허약한 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는 일년 후 다시 돌아오는 봄이 아닌, 평생 자신을 비켜만 갔다고 생각했던 사랑을
마침내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를 잃고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이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재충전을 위해 고향 집을 찾아 나서는
여장부 Scarlett과 대비되지 않는가?
Scarlett은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했던(사랑해야만 하는) 사람이 Rhett임을 뒤늦게 깨닫고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나, Rhett는 "My dear, I don't give a damn." 이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가장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Scarlett이 어떤 여자인가,
“Rhett, 지가 가면 어디를 가, ‘내일은 다른 날이니까 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
그가 결국 나에게 돌아올 거야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죠지아를 휩쓴 폭풍으로 그녀의 농장 Tara에 있는 집이 남아 있을지 날아 갔을지 걱정하면서
(she wonders to herself if her home on a plantation called "Tara" is still standing,
or if it had gone with the wind which had swept through Georgia.)
꿋꿋하게 그녀를 지탱해 준 땅으로 돌아가는 강단을 보이지 않는가?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사는 그녀는 Rhett가 "나는 당신을 사랑했으나
당신에게 이를 알게 할 수는 없었소. Scarlett,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매우 잔혹하기 때문이오. I loved you but I couldn't let you know it. You're so brutal to those
who love you, Scarlett." 라고 한 말을 건성으로 들었을 것이고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Scarlett처럼 삶에 대한 서양인들의 강한 일상적 태도는 믿음, 소망, 사랑 (faith, hope, love) 의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Solveig가 그렇고 Gretchen이 그렇지 않았던가.
일제강점하의 암울한 시대를 살던 유교 국가 조선의 영랑에게
이런 강한 정신을 심어줄 어떤 철학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하고 그의 심정에 공감하며
절망적인 그의 감상적 시를 이해해 보려한다.
서양 시인중 가장 감상적이고 자조적이고 풍자적이고 독재체제에 저항적이었다는
독일 태생의 Heinrich Heine(1797-1856)는 “선한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의 천국을 경험하고,
악한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의 지옥을 경험한다.”고 했다는데
나로서는 이 봄에 천국처럼 아름다운 꽃들을 열심히 보고 다니면
선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역으로 해 본다.
그러나 모든 명제의 역이 진실인 것은 아니니 그리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쩠든 나는 모란이 지기 전에 부지런히 두 바퀴를 굴리며
봄을 따라 꽃을 따라 이 찬란한 계절을 가능한 많이 숨 쉬고 싶다.
봄이 다시 나에게 오던 안 오던 그건 내 소관이 아니지 않은가.
그저 도연명의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요승화이귀진 낙부천명복해의
(어떤 조화로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천명에 따라 즐겁게 살 뿐 무엇을 망설이고 의심하랴)“ 의 심정으로 살아갈 뿐이 아닌가.
영랑의 시를 읽어 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金永郎/1903-1950)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왕 꽃 얘기가 나왔으니 하이네의 시 한편도 읽어 본다.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
그대 한 송이 꽃처럼
귀엽고 아름답고 깨끗하구나
네 모습 바라보면
우수에 젖는 내 마음
그대 머리 위로 손을 모아
기도하고 싶은 마음
하느님이 언제나 지켜 주시길
깨끗하고 아름답고 귀엽게
덕수궁 모란꽃 2020.4.17
<駐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역임/전주고~서울대 문리대 정치외교학부(외교전공)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