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손기정은 베를린까지 어떻게 갔을까?
만주, 한중일의 '욕망'이 담긴 곳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끊임없이 주입 당했다. 요즘 아이들은 영어 단어를 못 외워 학원에 붙들려 집에 못 가지만, 내 초등학교 시절에는 대통령 각하께서 헌사하신 국민교육 헌장을 외우지 못한 학생들이 학교에 붙잡혔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를 사랑하고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칠 각오로 똘똘 뭉친 아이들에게, 당시 선생님들은 민족의 찬란한 과거를 말해 주었다. 허리 잘린 반도에서 육로로는 국경을 넘을 수 없는 땅의 아이들에게 찬란한 과거란, 굳건한 나라의 기둥으로서 미래에 되찾아 와야만 할 과제로 제시됐다. 그 과제는 우리에게 영광의 시간이었고, 또 영광의 공간이었던 만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말달렸던 광활한 만주 벌판은, 그곳에 가는 것을 우리가 어찌 주저할 수 있는지 목 놓아 외치는 대상이었다. 한국인들에게 만주 벌판은 좁은 땅덩어리에 갇힌 민족이라는 열등감을 해소해 주는 상징과도 같다. 새벽 안개에 감싸인 채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은 신화와 같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나 한국에서 만주는 신화에 갇힌 채 오래전에 박제화된 곳이다. 어쩌면, 만주의 시간은, 광개토대왕 때가 아니라 조선 말기에서부터 현재까지 훨씬 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인들에게도 만주는 특별한 땅이다. 일본 전후 세대는 제국주의의 역사를 지우는 교육 과정 속에서 옛 식민지와 관련된 것들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를 취했지만, 만주는 일본인들에게 노스탤지어를 불러내는 곳이다. 특히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전쟁 시절 만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절망이 뒤범벅된 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시공간이었다. 만약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금까지 조선과 만주국을 지배했다면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허리우드 서부영화'처럼 하나의 장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 서부 개척시기의 무한한 가능성과 순간적인 몰락이 공존하는 것 같던 만주에서 일본인들은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그 왕국 건설의 주인공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줄여서 '만철'이라 불렸던 철도회사였다.
중국인들에게 만주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복합적이고도 기묘한 공간이다. 본디 만주란 지역이 아니라 집단 혹은 종족을 말하는 것이었다. 16세기 후반 여진족 누르하치가 세력을 넓힌 뒤 자신들을 '만주'라고 칭하고 뒤에 국가를 의미하는 그룬을 붙여 '만주그룬'이란 나라를 세웠다. 누르하치는 만주그룬의 세력을 넓히는 것과 동시에 만주문자를 창제하는 등 국가 체제의 골격을 세웠다. 이어 국호를 '아마가 아이신 그룬'이라 선언했는데 이것의 한자 표기가 후금(後金)이다. 후금은 중국 동북부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고는 1636년 국호를 '대청(大凊)'으로 바꿨다. 대청은 조선을 복속시키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뒤 중국 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중국의 주류인 한(漢)족의 입장에서는, 근대를 맞이할 때까지 만주족이라 불린 동북 지역 오랑캐의 지배를 받은 셈이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왕가와 사대부들이 조선의 형님 명(明)을 멸망시킨 오랑캐의 나라 청을 손봐주겠다고 했던 게 북벌론이었다. 중일전쟁 시기 만주는 일본이 세운 꼭두각시 나라 만주국이 통치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맞선 중국인들에게 만주국은 가장 먼저 부딪히게 되는 적군이었다. 영토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현대에는, 만주의 중국 점유와 지배가 원천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이라 불리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중국이 고대로부터 역사, 문화적으로 지배한 땅이라는 것인데, 고구려나 발해, 여진, 거란 등이 중국 고대국가의 하나였다는 동북공정 논리의 종착지는 영토분쟁의 대치선이 된다.
만주를 둘러싼 갈등, 그리고 일본의 만주 지배
청이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 만주는 무주공산 빈터와 다를 바 없었다. 청은 만주 지역에 대해 한(漢)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청조의 발상지를 신성하게 보존시킨다는 이유였다. 대신 만주 일대를 장악했던 만주족은 중국 대륙의 주인공이 되자 베이징을 비롯해 내륙의 여러 지방과 도시로 들어갔다. 만주의 공동화는 필연적이었다. 청이 만주 봉쇄를 해제하게 된 시점은 19세기 후반이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청조는 한족의 만주 이주를 장려하게 된다. 정착민이 없는 땅은 먼저 차지하는 쪽이 임자가 되기에 십상이다.
조선 사람들이 만주 땅에 집단으로 발을 들여놓은 때는 청이 봉쇄정책을 해제하기 전인 19세기 중엽이었다. 1862년, 계속된 흉년으로 굶주림을 면할 수 없었던 함경도 주민들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갔다. 구걸과 동냥으로 생명을 유지하던 한인들은 버려진 땅을 개간해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집단 기근에 허덕이던 조선 북부지역에 국경을 넘은 이들의 정착 소식이 전해지자 이주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월경을 막았던 청 정부는 1865년 한인들에게 압록강 이북에서의 거주와 농업을 허용했다. 이후로는 더 많은 한인들이 만주에 터를 잡았다. 1885년까지 만주에서 한인이 개척한 지역은 남북 100킬로미터(km), 동서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쨘다오, 우리말로 간도라는 이름을 얻었다.
간도는 자연히 조선 사람들의 땅이라는 생각이 퍼졌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과 국경의 개념이 생성되기 전 시대였다. 땅은 집단으로 거주하는 주류 종족의 소유라는 생각이 상식이었다. 조선 왕실도 간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은근히 주장하고 있었다. 1885년 고종은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 일대의 국경 관측을 청에 요구하였다. 조선과 청은 국경을 둘러싸고 그 기준점을 가지고 대립했다. 1885년 고종의 요청에 응한 청은 조청 국경에 대한 1차 공동 관측을 실시한다. 1887년에는 2차 관측을 하는데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달라 국경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후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조선과 청이 맺은 모든 조약이 폐기되자 조중 국경은 양국 간의 충돌이 발생하는 분쟁지가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난 뒤 승전국 일본은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얻은 권리인 동청철도에 대응해 만주를 지배할 수 있는 철도노선을 구상한다. 러일전쟁의 강화 내용을 담고 있는 포츠머스조약은 그동안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할양받은 이권을 일본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일본은 러시아 조차지인 뤼순·다롄 항을 비롯하여 장춘-뤼순 간의 철도 권리를 확보했다. 이 장춘-뤼순 간 철도 운영을 위해 1906년 6월 9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설립이 공포되었고 12월에 정식으로 출범한다.
일본은 장춘-뤼순간의 남만주 철도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중국 내륙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할 수 있는 철도를 갖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동삼성(현재 동북삼성)인 만주지역의 철도노선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본의 철도부설을 적극 반대했다. 동삼성의 총독은 신선 건설이나 기존선의 개축을 허가해 줄 수 없다고 버텼고 연변의 일본군 수비병에 대한 철수도 요구했다. 또한 일본의 철도 부설에 맞서 중국 자본을 통한 만주철도 부설을 꾀했다. 이에 일본은 청의 만주 지역 철도 부설 행위는 일본이 소유한 남만주철도의 이익을 심각히 침해하는 것이라며, 부설을 강행한다면 적절한 수단을 발동하여 남만주철도의 이익을 수호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1905년 이후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한 일본은 간도 조선인 보호를 명목으로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설치했다. 당연히 중국 측은 영토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했다. 중국의 반응에 대해 조선통감부는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중국과 일본의 중요한 이권 문제 한가운데에 간도가 자리 잡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만주 경영에 대한 일본의 구상이 구체화되며 일본의 태도는 바뀌게 된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 종관철도의 대륙 연결은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중국에 그만한 대가를 제공하고 철도와 광산의 이권을 챙기는 방안이 구상됐다.
1909년 2월 6일 청의 외무부에 주중 일본 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의 제안서가 전달됐다. 중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할 터이니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철도부설권과 광산 개발권을 확대해 달라는 것이 <동삼성육안>이란 제목으로 일본 측이 중국에 제시한 거래 내용이었다. 청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09년 9월 4일 청과 일본은 간도협약을 맺어 짧게는 숙종 이후 160여 년간 이어져 온 조중 국경 문제를 정리했다. 일본은 간도협약의 대가로 길회철도 부설권을 확보했다. 길회철도는 조선의 회령에서 만주의 길림성까지 연결되는 노선이다. 드디어 일본이 경부선과 경의선을 이은 조선의 종관철도를 만주로 확장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넘기더라도 철도를 가지고 있으면 실질적 지배를 할 수 있다는 일본의 야심은, 만주 전역에서 철도를 확장하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조선과 청의 국경은 도문강(현재 두만강)으로 하고, 일본제국 정부는 간도를 청국의 영토로 인정하며, 장래 길장철도를 연장하여 조선 회령에서 조선 철도와 연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간도 협약은, 조선 통감에 의해 10월 27일 조선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통고되었다. 11월 9일 이완용은 조선 정부가 이 조약을 승인한다는 뜻을 조선통감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만주의 조선인들은 중국 영토 안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조선인들이 겨우 일궈놓은 삶의 터전에 대한 권리가 사라졌다. 1910년 강제 병합 이후에는 국적조차 불분명한, 디아스포라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조선인 인구는 늘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만주로의 이주는 더욱 늘었고, 1933년에는 조선인 인구가 간도 총인구의 80%, 즉 약 41만 5000명을 넘기게 된다. 이들 만주의 조선인들은 중국인이 보기엔 이방인이자 일본의 하수인이다. 일본인들이 보기엔, 조선 본토에 비해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서 조선독립의 불순한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는 배후 기지였다. 강경한 대응이 필요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중국과의 충돌에 조선인을 이용하는 등 교묘하게 중국과 조선인을 이간질하면서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을 했다. 다른 국가를 정복하여 영토로 병합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관습·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운명의 힘과 엄청난 근면함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정복한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에 대해 세 가지 유형을 들고 있다. 이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군주 자신이 정복지에 가서 친히 정주하는 것이다. 현지에 직접 살게 되면 해결이 불가능해질 때에야 알게 될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바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선책은 정복한 국가에 이민단을 보내는 것이다. 이민단에 의한 식민지 건설은 비용도 많이 들지 않는다. 원주민들에 대해서도 이주에 따른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시킬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식민지 모국에 대한 저항을 줄일 수 있다. 가장 안 좋은 방법은 군대를 파견해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정복자는 식민지로부터 얻은 이익의 상당 부분을 군비로 써야 해 실질적인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군대의 통치 아래 민심은 흉흉해지고 그 지역의 모든 주민들은 정복자에게 적대적이 된다.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가장 안 좋은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일본은 차선책을 썼다. 정부가 나서 조선과 만주로의 이민을 국가 정책으로 장려한 것이다.
일본의 점령 정책은 점·선·면 정책으로 말할 수 있다. 점은 점령지의 주요 역이다. 선은 식민지 지배의 주요 인프라인 철도망이다. 철로가 긴 선을 이루어 중간 중간 놓인 역들을 연결한다. 일본은 역과 철도노선 주변에 일본인 이주민을 정착시켰다. 또 이 역과 선로를 중심으로 군대의 활동 반경으로 삼을 수 있는 지역을 면으로 본다. 면은 일본의 점령 통치가 힘을 발휘하는 공간이 된다. 주요 역을 기점으로 통신망과 행정기관, 군대의 본부가 들어서고 이들을 배경삼아 일본인 기업가들과 상인, 농민들은 새로운 시장과 땅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다. 만주에서 일본의 철도망이 확산되는 것은 그만큼 일본의 세력이 확장됨을 의미했다.
▲어문학사에서 출간한 <청일러일전쟁>에 수록된 승차권의 모습 ⓒ박흥수
도쿄에서 유럽행 기차를 탄 일본인의 일정은?
만철이 출범한 1906년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 중국의 북동부 만주에는 거미줄 같은 철도망이 생겨났다. 만철 본선인 하얼빈-다롄을 비롯해 남으로는 베이징과 텐진, 북으로는 러시아 국경지대까지 철도가 깔렸다. 길장철도는 함경도 회령까지 연결되었고 이것은 다시 청진, 웅기, 나진까지 이어졌다. 봉천에서 안동으로 이어지는 안봉철도의 연장선은 조선의 신의주와 연결됐다. 1911년 압록강 철교가 완공되면서 한반도를 관통해 조선 국경을 넘는 철도가 탄생했다. 일본인들은 꿈에 그리던 대륙으로의 진출과 이상향 유럽으로의 길을 연 것에 감격했다. 아시아를 탈피해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황인종의 열등감이 녹아있는 '탈아입구', 즉 일본의 목표가 현실로 실현된 듯했다. 일본인들의 자부심은 넘쳐났다.
러일전쟁의 과거를 덮고 러일협상으로 정상적인 외교관계로 돌아간 러시아와 일본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대철도망 계획을 가동시켰다. 1911년 이후 도쿄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파리로 가는 연결 승차권을 살 수 있었다.
도쿄에서 유럽에 이르는 행로는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기 혼돈의 시간을 지나, 2차 대전의 독소전 개전 전까지의 시기에 활발히 운행되었다. 서백리경유구아연락승차선권(西伯利経由歐亞連絡乘車船巻)이라는 강철 실크로드 승차권의 행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순서대로 따라가 보자. 도쿄에서 유럽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여행자는 연락승차선권을 구매하고 도쿄의 신바시 역에서 출발하는 국제열차에 오른다. 일본에서 국제열차 운송용으로 이용된 열차는 사쿠라, 후지 그리고 나나렛샤(七列車)라 불렸던 제7열차였다. 제7열차는 도쿄를 출발해 오사카를 거쳐 시모노세키역에 도착한다. 여행자는 곧바로 시모노세키 항으로 이동해 한일 연락선 7호선(나나빈:七便)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7호선에서 내린 승객은 부산역에서 국제열차 '히카리'를 타고 경성 - 평양 - 신의주를 거친 후 압록강을 건너 국경 너머 신징까지 갈 수 있었다.
신징은 현재 장춘으로 불리는 곳으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수도였다. 신징역에는 703열차가 대기하고 있다. 이 703열차로 갈아타고 하얼빈까지 달린다.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부설하면서 유럽풍으로 건설한 도시 하얼빈에서 유럽의 향기를 맡은 여행자는 국제열차인 701열차를 타고 만주 벌판을 달리게 된다. 701열차는 하얼빈에서 동청철도를 달려 서쪽의 완저우리(滿洲里)를 지나 치타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접속된다.
일본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접속해 유럽으로 가는 길은 세 가지 루트가 있었다. 앞서 말한 7열차와 한일 연락 7호선을 이용해 한반도를 경유하는 길, 만철의 출발지인 다롄 항까지 배로 이동해 다롄-하얼빈까지의 남만주 철도노선을 이용하는 길,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바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길이다. 이 세 가지 노선 모두 도쿄를 출발해 5일 정도 걸려야 만주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고 한다. 하얼빈이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유럽행 여행자는 이제부터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만주에서 모스크바까지 11일간은 꼬박 열차 안에 갇혀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를린에 가려면 2일, 파리는 3일을 모스크바에서 더 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인기는 높았다. 배를 탄다면 한 달 반을 들여야 했고 경비 또한 열차보다 세 배가 높았다. 열차 승객들이 높은 파도로 인한 공포에 질리지 않아도 되고, 지독한 멀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덤이었다. 1940년 3월에서 5월경 국제열차를 이용한 외국인 승객은 평균 120여 명에 달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동쪽 끝 출발지는 블라디보스토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우수리스크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우수리스크역은 분기점이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본선을 타게 되고 11시간쯤 더 달리면 동북 러시아 최대의 도시 하바롭스크에 닿는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국명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으로 바꾼 탓에 중소국경으로 부르게 된 중국과 소련 양국의 경계지점이 있다. 이 지점을 지나 하얼빈에 닿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얼빈으로 이어지는 길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이동한 경로이기도 하다.
청년 손기정과 남승룡은 베를린까지 어떻게 갔을까
만주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탄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은 수많은 혁명가와 그 가족들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조국을 등져야 했던 민초들도 열차에 올랐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던 중앙아시아 이주민들도 빼놓을 수 없다. 기회가 된다면 만주와 시베리아 철도를 탄 한국인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담기로 하고 지금은 딱 두 사람의 여행 경로를 따라가 보자. 점령국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마라톤을 뛰어야 했던 청년 손기정과 남승룡이다.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도쿄에서 합숙훈련을 하던 손기정은 입에 맞지 않는 일본 음식에 질렸다. 몰래 밖으로 나가 된장, 고추장, 김치가 나오는 한식을 사 먹기도 했던 손기정은 김치와 깍두기만큼은 피하기로 결심했다. 일본에서도 먹기 힘든 음식을 베를린에서는 더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1936년 6월 올림픽 개막을 두 달 앞선 시점에 선수단 본진보다 먼저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마라톤 코스 답사 등 현지 적응 훈련을 위해서였다. 손기정은 도쿄에서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부산에 도착해 경부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역에서 만주행 열차를 탄 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손기정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어지는 손기정의 육성은 그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탄 열차는 여객용 기차가 아니라 군 장비 수송용 화물 열차 같은 것이었다. 정규 여객 열차 편은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었고, 우리가 떠날 땐 그 시간이 맞지 않았다. 열차는 때 없이 멈춰 섰다가 예고도 없이 제멋대로 달렸다. 어떤 날은 종일 보리밭 사이를 달리다가, 또 어떤 날은 호수를 끼고 한없이 달리기도 했다."
손기정이 한없이 호수를 끼고 달렸다는 곳은 이르쿠츠크 지역의 바이칼 호 순환노선이 분명하다. 화물열차에 몸을 실은 식민지 청년의 여정은 민족의 운명처럼 고단했다.
"철도는 복선화 작업이 한창이었다. 가는 도중 다른 열차와 만날 때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역 구내에서 기다렸다 달리곤 했다. 처음엔 그래도 낯선 풍경에 정신이 팔렸지만 점차 눈에 익숙해지자 피곤하기만 했다.(…) 열차가 서 있는 동안 굳어진 몸도 풀 겸 우리는 가끔 철도를 따라 뛰어보곤 했다. 이것이 말썽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련 관리들은 우리가 소련의 철도 사정을 은밀히 조사하는 것으로 알았는지 따지고 들었다. 전운이 일어 각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던 때라 군수품 열차의 기밀 정보라도 염탐하려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모스크바 역에 도착해서는 따로 시내에 숙소를 정하지 않고 이틀 밤이나 열차 간에서 쭈그린 채 보내게 되었다.(…) 대사관에서 10시가 넘도록 아침 식사를 가져오지 않아 모두들 불만이 대단했다. 운동선수들 식사는 시간을 엄수해야 컨디션 조절을 하게 되는데, 사토 코치는 우리가 자꾸 보채면 본국으로 송환시키겠다고 윽박질렀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올림픽대표팀에 대한 처우였다.
"7월 17일, 두 주일 만에 비로소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 역에는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마중 나왔다. 선발대를 맞자마자 그들은 '왜 마라톤에 조선인이 두 사람씩이나 끼었느냐'고 불만스럽게 물었다. 보름간 열차에 시달리며 도착한 곳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첫인사를 받게 되다니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의 마라톤 결승점 테이프를 끊은 이는 일본 대사관 직원을 화나게 한 조선인 손기정이었다. 일장기를 단 청년은 당시 마라톤 기록에 있어 마의 벽이라 여겨졌던 2시간 30분대를 깨뜨렸다. 조선 청년은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두 손을 높이 들지도 환하게 웃지도 않았다. 사이즈가 작아 달리는 내내 발을 고통스럽게 했던 마라톤화를 벗어 던졌을 뿐이었다. 기뻐하는 얼굴로만 보면 2위를 한 영국인 하퍼가 우승자처럼 보였다. 페이스메이커 역할로 손기정의 우승을 도왔던 남승룡은 3위로 들어왔다.
두 청년은 10만 관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시상대에 올랐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선 청년들은 국기 게양대를 타고 오르는 일장기를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본국가가 울려 퍼지고 일장기가 올라가는 동안 고개 숙인 손기정은 우승자에게만 주어지는 월계수 다발을 가슴에 모아 유니폼의 일장기를 가렸다. 일본은 이를 괘씸히 여겨 이후 열리는 육상경기에 손기정의 출전을 금지시켰다. 두 청년의 쾌거는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알려졌다. 식민지 백성들은 손기정과 남승룡의 세계제패에 벅차하면서도 나라 없는 억울함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