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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산에서 결혼까지
성경본문 : 잠언 22: 6
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가 창조하셨고 그가 다스리시며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이고 또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시 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원문에는 "주신"이란 말이 없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가 주신 상급이다"란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자녀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기업 - 곧 하나님의 영원한 재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으로 길러야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기업이기 때문에 그렇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르는 방법을 가장 완전하게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데, 특히 자녀양육은 꼭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중심이 되어갑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무엇이든지 합니다.
신자들도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기를 때 보면 더 그렇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혹은 자녀들이 좋아하는 대로 자녀를 기릅니다. 그러다보니 자녀 양육에 대한 목표나 목적이 뚜렷하지 못하고 時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모든 섭리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구원과 모든 은혜와 복의 시여자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대로 생활하고, 이 신앙의 고백대로 자녀를 길러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자녀의 출산에서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아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 중심의 자녀 양육 내용들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 자녀출산계획
대개는 자연스럽게 자녀를 낳고 기릅니다만, 자녀출산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도하면서 계획하여야 합니다. 자녀출산 계획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사람이 계획을 세우는 것은 잘 못이 아니냐 하는 지적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작정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우리로는 소원을 두고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요즘은 일반적으로 자녀를 적게 낳으려고 합니다. 하나나 둘만 낳는 것을 거의 대부분의 부부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경건한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가 많은 것을 분명히 축복으로 가르치고 있고 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복을 주시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녀들을 많이 나아 잘 길러서 하나님의 백성을 번성케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녀를 적어도 3명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겠나 하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최소한이라도 순종하는 선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국가 물론 시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정부시책을 중히 여겨서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는 이기적인 동기입니다. 아이를 잉태하고 기르고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멋쟁이 엄마들은 몸매관리 하느라고 아이를 하나만 낳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많이 나으면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기 힘들다고 했는데, 요즈음은 경제적으로 좋아지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향락을 누리며 편하게 살고 싶어서 자녀를 적게 낳으려고 합니다.
● 태 교
아이가 잉태되면 부부가 다 함께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며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특히 요즈음은 약물을 조심하고 술, 담배등은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묵상과 건전하고 아름다운 생각과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태아도 성령충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 태아를 위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모태 신앙인들이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의 큰 일을 한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기도로 자란 사람들입니다.
● 유아세례
아이가 출생하면 가능한 빨리 유아세례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으로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양육할 것을 엄숙히 서약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임신한 부모들은 미리 유아세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출생한 아이와 예배에 첫 출석을 할 때 세례를 베풀도록 할 예정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이 점 유념해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유 아 기
어머니의 품에 있을 때가 아주 좋은 시기입니다. 기도와 찬송과 말씀묵상 가운데서 자녀를 양육하십시오.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자녀와 함께 기도하십시오. 찬송과 성경을 들려 주십시오. 특히 예수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십시오.
아이가 자라서 유치원에 다닐 때 쯤되면,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유아용 성경을 사거나 성경 이야기, 비디오 등도 비치해서 자주 보고 듣게 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만화영화나 컴퓨터 게임부터 보고 배우게 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유치원도 잘 골라서 보내고, 주일은 교회 유치부에서 꼭 예배와 교육을 받도록 하십시오. 이 때의 신앙교육은 절대적입니다. 천주교가 전통적으로 유치원 교육에 힘써 온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 초등학교
이 때까지만 해도 가정교육이 절대적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아이가 되게 하십시오. 말 잘 들을 때 확실하게 하십시오.
어릴 때 성경교육만큼 더 좋은 교육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류최대의 보고입니다. 성경보다 더 위대한 고전은 없습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가장 좋은 책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합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게 하면 그 마음에 아름답고 경건한 것이 쌓이게 되고 정직함과 지혜가 함께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와 결코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바로 신자의 어머니입니다.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됨을 경험케 하고, 예배의 공동체요 서로 봉사하고 교제하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몸으로 체득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교육을 중히 여기고 관심을 가집시다.
그리고 초등민학교 때까지 때리는 일이 가능합니다. 요즘은 무조건 때려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회초리를 과도히 아끼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잘 못했을 때는 그것을 확실히 깨닫도록 벌을 주어야 합니다. 조심할 것은 절대로 흥분한 상태에서 아이를 때려서는 안되며- 교육의 매, 사랑의 매여야 합니다. 또 자주 때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벌이라는 것은 일년에 한 두 번 주는 것이지 자주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어쨌던 무엇이 옳고 무엇이 나쁜 것인가를 어릴 때 알아야 하고, 또 잘 못했을 때는 그 대가가 있다는 것도 알고, 모든 것을 자기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요즘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아주 고생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나 제멋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적극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 중, 고등학교
부모노릇하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입니다. 아이들 자신들도 자신들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때입니다. 가장 많이 참고, 관용하고 품어주는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때가 바로 우리 부모들의 인내를 시험하는 시기인 것같습니다.
특별히 이 때는 말이 아니라 부모의 삶의 본을 통하여 교육하여야 할 때입니다. 바른 인생관,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 할 때입니다. 부모가 신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일관성있게 살지 못하면 아이들은 방황하게 되고 안정과 목표를 잃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이 때부터 대학입시라는 무서운 괴물 앞에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무시되고, 오직 그것 하나만 생각하게 만드는 아주 답답하고 어려운 문제가 대두됩니다. 여기에 자신이 없는 아이들은 아예 방황하기 시작하고 이런저런 죄의 유혹에 빠져 빗나가기 쉽습니다. 어쨌든 이 문제는 온 국민들이 다 고민하고 있으면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독인으로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학이나 출세가 결국 우상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보다 이것이 앞장서서는 안됩니다.
교회 청소년들의 농담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공부를 잘하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어쨌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니라" 부모들이 이렇게 자기들에게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극복해야 할 잘못된 생각들,
(1) 자기가 세상적으로 영광스러운 위치에 올라가야 하나님이 영광받으신다고 생각하여, 자기 성취욕을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가치관입니다.
(2) 사람을 20세 전후의 대학입시라는 한 차례의 시험을 통해 결정적으로 평가해 버리는 제도적 가치관. 사람이 20세 정도에서 만개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30세 전후에 오히려 사람의 능력이 종합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특히 청소년들을 지적인 능력-암기나 이해의 능력만을 가지고 좋은 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들
바른 기독교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청소년들이 당하는 이 혼란과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 청년기
부모의 역할이 크게 줄어드는 시기입니다. 부모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인격을 존중하고 대화해야 할 때입니다. 억지로 교정하기보다 부모의 뚜렷한 신앙과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일 수 있습니다.
● 결 혼
서양인들을 보면 그들의 자녀가 만 18세가 되면 이제 그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다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결혼 때까지로 생각하는데, 저는 후자가 더 성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시기는 결혼 때입니다. 이제는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고 가정을 이루어 모든 면에서 독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혼과 같은 중대사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하셨습니다. 신구약의 말씀이 같습니다. 신7:3에는 "그들(이방인)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이라고 하였고, 고전7:39에는 "주 안에서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권고입니다. 순종하면 복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중생된 사람은 불신자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의 차이는 여러 가지 차이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인생관, 가치관, 목적, 신념, 삶의 방법들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행복이 그 만큼 적어지고 맙니다.
자녀들이 결혼기에 접어들기 전에 미리 이 점을 확인시키고 기도하십시오. 혹, 불신자를 사귀었거든 전도하고 신앙생활을 권유하십시오, 적어도 예수 믿겠다는 공적인 서약-학습서약-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공적인 서약이 없으면 결혼을 승낙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약혼식을 하지 않고 바로 결혼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부득이 약혼식을 할 경우라도 가족끼리 예배로 하고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결혼식도 간소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결혼은 당사자 중심이라기 보다 일가친척 가문들이 지나치게 개입해서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당사자 중심의 결혼이 되도록 협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년하여 결혼 시기가 지난 경우에는 너무 결혼에만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여러 가지 방편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또 미혼이라 하더라도 자녀들이 독립해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본인들도 자기 人生전체를 내다보고 준비하며 계획해야 합니다.
(결언)
결국 부모자신이 신앙과 인격에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말씀으로 지혜와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가슴에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출처: 은혜목회정보
성경은 우리 삶의 나아갈 길
성경본문 : 잠언 22: 6
6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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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 16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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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햇볕에 잘 여문 곡식이 속이 알차듯이, 사람도 사람다우려면 마음이 알차게 익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알찬 사람은 말과 행동에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삶의 지혜가 녹아 있습니다. 성경은 펼치기만 해도 이로운 책입니다. 그래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좋은 가르침이 있고,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곧 수불석권(手不釋卷)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우리가 미래에 나아갈 길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또는 미래에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질문은, 인간의 역사를 알고, 역사의 의미와 본질을 찾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의미를 묻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문제 삼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상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나 흥미에서뿐만 아니라, 역사에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인간관과 역사관에서 인간과 자아에 대한 통찰을 깊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 이룩됩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부르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큰 사명을 맡기시는 것을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자명하게 보아 왔습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수님의 생애, 그리고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 글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네 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으며, 최후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에 있어서 우리들의 관심은, “성경이 우리들의 현실과 현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영혼에 관해서 어떤 진리를 말해 주는가?”를 듣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인 구약성경의 인간관을 간직하고 창조의 질서에 따라 사는 인간과 현실의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인간을 바라보시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민의 정으로 주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인간이 살아야 할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파란 많은 인간들과 사귐을 가지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새로운 삶을 함께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창세기의 기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으심을 받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했고, 따라서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과 사귐을 갖고, 그 안에 모든 자유를 부여했고, 만물을 지배하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또한 “인간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인간은 어떻습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위선(僞善)과 거만(倨慢)으로 하나님을 적대하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교만해 있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재물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비참한 인간의 현실을 가난한 자, 죄 지은 자, 세리, 귀신 들린 자, 병자, 사회의 밑바닥에 사는 억눌린 서민들에게서만 본 것이 아니라, 부자,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 그리고 학자들 속에서도 찾아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고 하는 소위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중병에 걸린 자임을 상기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육체만의 문제나, 혹은 마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사회적 존재인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 찾아온 것을 알렸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누구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참다운 인간관계는 그저 인간적으로 형성된 인간 관계가 아니고, 주님 안에서 거듭난 인간들의 새로운 삶의 참된 존재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들의 새로운 사귐과 새로운 공동체가 참된 인간 관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통해서 “주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인간의 모습과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무엇을 소유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과 같은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나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무엇이 삶의 만족이며, 어디에 삶의 목적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물을 때 우리는 보다 중대한 내용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살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물건이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살려고 하는 의욕” “살겠다는 의욕”이 있을 때, 그 사람에게는 모든 물건은 필요한 것이지만,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돈이나 지위나 명예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과 자신의 인격의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을 던질 때 찾아오는 불안과 정신적 고통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정신적 과제를 해결 짓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은 무엇입니까? 소유나 물질적인 것에 비하여 인간의 문제에서 오는 불안, 곧 인간학적 불안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모든 예술도 그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나타났으며, 온갖 학문과 사상도 그 해결을 위하여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역사에 존경받는 모든 인물들이 이 인간학적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구출될 수 있을까 하는 데 그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를 비롯한 오늘의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중심에 있는 불안을 문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서 오는 불안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장차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에 귀착(歸着) 됩니다. 만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의의를 잃을 것이며, 인생의 깊은 불안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별로 큰 뜻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정신적 깊이가 없는 자연인이며,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는 데 온갖 의의가 있다고 믿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뜻 있는 삶을 추스릴 줄 아는 사람은 가치 있는 문제를 가진 사람입니다. 가치 있는 문제란, 모든 인간들이 그 깊이와 영원한 데서 느끼는 정신적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얻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보지만, 어느 누구도 그 문제에 근본적인 해결을 얻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인간 됨의 문제이며, 모든 인간이 다 같이 생각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그리스에 재미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 신화는 인간의 일생은 불안의 일생이며, 우리들의 삶은 끝없는 불안의 연속임을 알려주는 인간의 운명을 비유한 신화입니다.
그 그리스 신화를 읽어 보면, 아득히 먼 옛날 이 세상에는 신들만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불안’이라는 한 신이 사람을 한 번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료가 없으니까 땅을 차지하고 있는 신에게로 가서 흙을 좀 빌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은 형성되었지만, 생명과 활동을 못하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신은 다시 ‘영혼’을 맡아 취급하는 신에게로 가서 생명과 호흡을 빌어 인간을 완성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별로 말이 없던 땅을 차지한 신과 영혼을 맡은 신들이 불안이라는 신에게 그 만들어진 사람을 각각 자기가 갖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안이라는 신은 다 되어진 사람을 보니까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할 수 없이 세 신은 가장 높은 신에게 재판을 청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을 끝까지 다 들은 재판관은 “지금 너희들이 서로 이 사람을 가지겠다고 싸우지만, 아직은 그대로 참고 있어라. 이 다음에 이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흙의 신’ 너는 이 사람의 몸뚱이를 도로 찾아 가고, ‘영혼의 신’ 너는 그 영혼을 되찾아 가거라. 그러나 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불안의 신’ 네가 차지하거라.” 하고 판결했습니다.
그 때부터 오늘까지 “인간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혼은 영계로 돌아가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안 속에 머물게 되었다.”고 전래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니고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인간적인 불안을 해결지어 주며, 모든 근본적인 회의에서 풀어 줄 수 있는 책임을 맡은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 것입니다. 예술이 그 문제를 취급하였으나 설명하는 데 그쳤고, 철학이 그 뜻을 계승하였으나 문제의 해결을 주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요소로 믿음, 곧 신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일, 즉 신앙은 기독교인의 문제이지만, 지식의 과제만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지식을 무시하거나 도덕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이상과 학문, 자유와 도덕을 초월하는 신앙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들의 지성, 감정, 의지를 종합한 전인격이 성경적 실재,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 접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체험, 전 생명을 바쳐 얻은 생활의 결과가 신앙의 바탕, 믿음의 근원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신앙인들이 생활과 체험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게 보여 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인간들이 지켜야 할 떳떳한 교훈과 진리이기 때문에, 에수님의 교훈과 말씀에 따라 절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나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같이 해 주시는가에 따라 얻는 체험과 확실한 증거가 신앙의 내용이 되며, 그 뜻을 이웃과 사회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인간에게 믿음과 목적이 되게 하는 말씀이 곧 성경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창조적이고 기여적인 삶을 갖도록 하게 해 주는 힘이 있으며, 인생 행로에 새 소망이 되어줍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늘 성경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이 그 마음에 가득 차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천국의 백성인 것입니다. 성경은 읽을수록 그 마음이 맑아지고, 거룩하여지고,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고, 지혜로워지고, 의로워지고, 덕스러워져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 인물들은, 성경은 꿀 송이 같이 달고, 음식 같이 탐하여 애독하고 탐독한 사람들입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매일 13장씩 1년에 신구약을 네 번씩 읽었고, 그의 91회 생일 기념일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지금까지 150회 이상 읽었는데, 어느 때나 큰 기쁨으로 읽었고, 다 읽으면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영국 왕 조지 5세는 전 국민의 신망을 받은 왕이었는데, 그는 즉위 5주년 기념식에서 “나는 어머니 알렉산드리아 여왕의 교훈과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55년간 매일 성경을 한 장씩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제2대 대통령 애덤스는 자기의 경험을 말하며 “성경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읽어야 할 책이요, 한 두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라, 분주할지라도 매일 한 장씩 읽어야 할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길선주 목사가 감옥에서 묵시록을 3만독을 해서 외웠다는 말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는 구약 30회, 신약 100회, 요한1서를 500회 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많은 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지 않고는 신앙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며, 무식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낙원,” 괴테의 “파우스트,”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 등 최고 걸작품들은 다 성경에 그 근거를 둔 것이며, 성경 지식이 없이는 이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외에도 음악가, 화가, 조각가 등의 예술 작품이 다 성경을 바탕으로 한 걸작들임을 재삼 음미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증거의 책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편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일깨워진 예언자와 사도들의 마음들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라고 인식한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증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면에서 성경은 성령이 우리의 심령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방법이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의 말인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즉 성경만이 그에 대한 유일한 권위 있는 역사적 기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엄격하게 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의미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 즉, 그의 “뜻”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위해 기도하라고 그리스도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 온 숱한 일꾼들을 예로 보여 주면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자유를 잃고 인권을 유린 당한 애굽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자.”고 용감하게 나섰던 모세, “불의와 퇴폐의 땅을 벗어나 의와 사랑의 밝은 땅으로 가자.”고 간곡하게 외쳤던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죄와 죽음, 불안과 공포의 땅을 벗어나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따라 나가자.”고 외친 희망과 사랑의 사도 요한 등을 보이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시키시고 훈련시키시고 계십니다. 여기에 성경이 우리를 강하게 끄는 힘이 있으며,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로 읽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국가가 잘 되려면 경제 부흥이 되어야 하고, 경제 부흥이 되려면 정치가 안정되어야 하며, 정치가 안정되려면 사회 질서가 잘 되어야 하고, 사회 질서가 잘 되려면 도덕적 의식이 있어야 하고, 도덕적 의식을 가지려면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합니다. 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성경이 그 삶의 바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성경을 우리 전 생애의 삶의 길잡이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우리 삶의 길잡이로 삼아서 하나님의 지혜와 축복을 받고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