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31
상대를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 / 김학중 목사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매우 ‘냉철하고 객관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즉, 자신은 개인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은 정확하고 틀림이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지난 7월26일, ‘텔레그래프’ 인도판은 인도군의 황당한 실수를 보도하였습니다.
중국과 인도는 1960대부터 지금까지 국경지역에서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여름부터, 인도군은 밤마다 국경지대에
미확인 비행물체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도군은 이 미확인 비행물체들이 중국군의 무인기(無人機)들이라고 확신하고,
무려 6개월(작년 8월~올해 2월) 동안이나 그것들을 감시하였습니다.
마침내 지난 2월, 인도군은 이 비행물체들을 공격하기 전에
‘인도천체물리학연구소(IIAP)’에 최종적인 확인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해당연구소는 그 비행물체들이
금성과 목성이라는 사실을 최근 밝혀내었습니다.
하마터면 인도군은 별들을 상대로
‘우주전쟁’을 치를 뻔하였습니다.
이 해프닝이 보여주듯, 많은 심리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우리의 선입견, 즉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관점’이 우리의 이해와 판단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과 선입견은
우리의 인간관계를 더욱 돈독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반면,
부정적인 선입견은 인간관계를 왜곡하거나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요소가 됩니다.
결국 우리의 인간관계가 치유되고 성장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린 잘못된 선입견을 뽑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못된 선입견의 덫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1. 감정을 낮추고 예의를 갖추라. (22:1-20)
요단강 서편의 전투와 이스라엘 12지파의 땅 배분이 모두 끝나자,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편의 3지파들을 성소가 있었던 ‘실로’로 불러모았습니다.
우선 여호수아는 그들이 약속을 잘 지켰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22:2-3).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22:5).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막대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 돌아가서 …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22:8).
그런데, 요단강 동편 지파들이 막상 귀환 길에 오르자 뜻밖의 사건을 벌였는데,
바로 요단강 강변에 거대한 제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요단강 서편 지파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졌습니다.
그런데, 서편 지파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것을 배교(背敎), 즉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라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동편 지파들을 단죄하고 엄히 처벌하기 위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던 ‘실로’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벌일 각오까지 다졌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22:12).
결국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칭찬하고 축복했던 동족들끼리
순식간에 전쟁을 벌여야 할 대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는
단순히 동편 지파들의 의심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서편 지파들이 동편 지파들을 믿지 못했기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서편 지파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동편 지파들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만일 서편 지파들이 동편 지파들을 진정으로 신뢰했더라면,
이런 식으로 조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소문들이 들려올지라도,
‘에이, 그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어!’하고 일축하거나,
정 의심쩍다면, 조심스럽게 직접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안 좋은 소문이 들리던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하지만 서편 지파들의 마음 속에는 동편 지파들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했기에,
그들은 앞뒤도 재지 않고 전쟁준비부터 서둘렀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한번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기면,
그 선입견을 근본적으로 뿌리뽑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줍니다.
동편 지파들이 요단강의 동편에서 삶의 터를 마련하겠다고 요구할 때부터
이미 서편 지파들과 동편 지파들 사이에는 감정의 앙금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상황은, 동편 지파들이 요단강을 앞장서서 건너가서,
서편 지파들이 땅을 다 차지할 때까지 목숨 걸고 싸운 후였습니다.
즉, 서편과 동편의 지파들 사이에는 단순한 ‘민족사랑’ 정도가 아니라,
함께 생명을 내어놓고 전쟁터에서 싸워본 군인들이 공유하는
끈끈하고 진한 ‘전우사랑’이 쌓였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민족사랑’과 ‘전우사랑’도
양편의 불신의 앙금을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서편 지파들이 냉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곧장 요단강을 건너가 전쟁을 벌이기보다,
제사장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영향력 있는 대표자들 10명을 사절단으로 뽑아 요단강 동편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서편의 사절단은 동편 지파들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그들을 야단을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서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너희가 오늘 여호와께 거역하고자 하느냐?”(22:16).
그리고 그들은 도발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22:19).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바로 하나님과 자신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충성스럽게 받드는 의인들이지만,
동편 지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인들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동편 지파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해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서편 사절단은 동편 지파들에게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이미 그들을 일방적으로 정죄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언행은 동편 지파들에 대한 참기 힘든 무례이며 모욕이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곳곳이
소모적인 다툼과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각 주체들이 자신들의 사적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몰상식한 무례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격렬한 논쟁을 벌이더라도,
상식과 예의를 지키면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서로 상식과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논쟁을 위한 논쟁, 말꼬리 잡는 논쟁, 무조건 우겨대는 논쟁만 남을 뿐,
마지막에는 아무런 유익한 성과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상식적이고 무례한 논쟁과 다툼만 일삼다 보면,
결국 자충수를 두게 되어 스스로 추락하게 됩니다.
지난 3월 27일, 법정에서 피고인과 여검사가 욕설을 주고 받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에 폭력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던 피고인은
증인에게 20차례, 검사에게 3차례의 욕설을 퍼부었는데,
특히 마지막에 여검사에게 ‘씨XX아’하고 욕을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여검사도 ‘개XX야!’라는 욕설로 되받아 쳤습니다.
그 결과, 해당 여검사는 모욕죄로 고소당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8월 1일, ‘검찰시민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하여
해당 검사가 검사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대검찰청 감찰위원회에 징계를 건의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그토록 심한 욕설을 퍼붓는데
덤덤하게 참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의를 갖추어야 할 법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흥분했기에,
비록 검사라 할지라도 무사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케이블TV를 통해 영국의 국회가 논쟁을 벌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국에는 ‘양당제’,
즉 ‘주요한 두 개의 정당들이 국회를 주도하는 제도’가 확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국회에서는
두 정당의 의원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논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영국의 국회의원들은 격렬한 말다툼 중에도 예의를 지킬 줄 압니다.
한쪽 당의 대표자가 앞으로 나와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들어간 후에야
다른 당의 대표자가 앞으로 나와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그래서 양쪽이 한꺼번에 나와서 소리지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툭하면 멱살잡고 싸우는 우리나라의 국회와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이처럼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예의를 갖추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이성을 잃고 추태를 부린다고 해서 우리도 그 분위기에 함께 휩쓸리면,
마지막에는 우리도 역시 상당한 책임을 져야만 하며
서로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부정적인 선입견은 더욱 커지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2.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라. (22:21-34)
그런데, 이처럼 일방적인 모욕을 당한 동편 지파들은 의외로 신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선 하늘의 하나님께 자신들의 결백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22:22, 23).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커다란 제단을 쌓은 이유를
서편의 사절단에게 차분히 설명하였습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혹시라도 당신들의 자손들이 우리의 자손들에게
‘너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할 수가 없어!
하나님의 성소에서 썩 꺼져버려!’라고 말하면 어쩌나 하고요.
그러면 우리의 자손들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확실한 물증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국 고심과 논의를 거친 끝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의 제단과 동일한 모양의 제단을 세워
우리도 당신들과 동일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증거로 삼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단 위에 어떠한 제사라도 드릴 생각이 결단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생각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제단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한 증거로 세웠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편 지파들처럼 동편 지파들에게도
‘불신감’이라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불신감의 내용과 성격은 서로 사뭇 달랐습니다.
서편 지파들은 동편 지파들의 온전한 신앙상태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편 지파들은 의심의 여지가 보이자
동편 지파들을 향하여 불 같이 분을 내었습니다.
반면에, 동편 지파들은 서편 지파들의 인격을 믿지 못했습니다.
즉. 서편 지파들은 언제라도 동편 지파들에게 절교선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일방적으로 절교선언을 당하면,
동편 지파들이 하나님의 성소로 나아가 복과 은혜를 받을 길이 막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정통성 있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할 증거물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소동은 서로의 밑바닥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복 받는 백성이 되도록 만들자는 것이
양쪽 모두의 최종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던 부정적인 선입견들이
양쪽의 관계를 사실상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 사이의 근본적인 문제도 ‘불신감’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에게 현금 또는 현물을 지원하거나
북한에 직접 투자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재원들을, 북한 정권이 군사적 목적이나 상류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업합작을 하더라도, 최근의 개성공단사태 같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언제 또 다시 생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북한은 미국, 한국, 일본이 연합하여 자신들의 정권을 무너뜨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켜보겠답시고 오래 전부터 핵무기를 개발했지만,
결국 그 핵무기 때문에 전 세계로부터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혈맹이라고 생각했던 중국마저 북한을 매우 차갑게 대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사면초가가 된 북한은 한미 연합군의 정례적인 군사훈련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가운데,
아무리 남북회담을 열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최근에도 몇 차례나 남북당국들이 직접 만나 대화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이전보다 더 큰 실망과 불신만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현정부가 내세우는 대북정책의 키워드도 ‘신뢰 프로세스’입니다.
대한민국과 북한 사이에 탄탄한 신뢰가 쌓이지 않고는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어떠한 일도 진척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답답한 관계는
‘이성적인 머리’로 풀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가슴’으로 풀어야 합니다.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서로의 밑바닥 감정을 이해하고 보듬어주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분쟁과 다툼들은
각자의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 아닙니다.
서로의 ‘감정’이 상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사춘기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철없는 행동들이 정말 옳다고 생각해서
부모님과 주변 어른들에게 마구 대드는 것일까요?
부부싸움을 할 때, 각자가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자기가 옳다며 버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자신들의 논리에 허점이 많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핏대 세우며 억지 논리를 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들은 모두 ‘상처 입은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상처 입은 감정’을 어루만지지 않는 이상,
논리정연 한 설득이나 고압적인 으름장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상처 입은 감정을 더욱 덧나게 만들 뿐입니다.
현재 우리사회의 지성과 교양이 과거보다 훨씬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격렬한 다툼과 분쟁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점을 무시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동편 지파들에 대한 오해가 풀리자, 제사장 비느하스의 사절단은
뒤늦게라도 동편 지파들의 상처 난 감정을 어루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22:31).
즉,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에서 구원한 모든 공로를 동편 지파들에게 돌렸습니다.
비록 서편의 사절단이 동편 지파들에게
자신들의 섣부른 판단과 무례함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이 칭찬 속에 그들의 미안한 마음이 충분히 녹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편 지파들도 이 소동에 대하여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건이 잘 마무리 되자, 서편의 사절단은 곧장 요단강을 건너가
서편 지파들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했고,
그 결과 그들도 모든 오해를 풀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22:33).
당연히 ‘당장 전쟁을 하자’던 과격하고 무모한 말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22:33).
마침내 제사장 비느하스의 사절단은 동편 지파들의 상처 난 감정을 어루만지고,
그들의 입장을 서편 지파들에게 잘 설명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만드는 ‘평화의 사절단’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화평하게 만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이간질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장점과 미덕은 무시하고,
그들의 단점과 허물들만 잔뜩 부풀려 마구 퍼뜨립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단점과 허물들은 사랑으로 덮어주고,
그들의 장점과 미덕은 과장을 해서라도 크게 선전해주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상처 입은 감정들이 치유되고,
그들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부정적인 선입견들이 녹아 내리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우리사회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평화의 기도’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