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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과 재혼
(신 24:1-4)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모압평야에서 전한
세 편의 설교 모음집입니다. 율법이라는 뉘앙스 때문에 지극히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
별히 오늘 본문은 이혼과 재혼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현대 사회처럼 구청에
서 혼인신고를 받고 법원에서 이혼을 허락하는 제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광
야에서 이런 문제까지 심각하고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혼율에 대해 2004년도에 발간된 보건복지부의 통계와 법원행정처의 통계에는 차이
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예년에 비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
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우리나라 이혼율이 47%이며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이혼율
을 보이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에서는 이혼율을 9%라고 발표했습
니다. 차이가 드러난 이유는 보건복지부와 법원행정처의 이혼율 통계 집계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한 해 동안 결혼한 신혼부부의 총계와 그 해에
이혼한 부부의 총계를 단순 비교했기 때문에 47%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법원행정처에
서는 이혼한 가정의 수치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가정의 수치를 나누는 방식으
로 통계를 냈기 때문에 9%라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계산으로 볼 때, 우
리나라 열한 가정 중 한 가정은 이혼을 경험한 가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
신 이 율법의 규례가 어떤 것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모세 율법의 이혼 규례
모세의 율법이 말하고 있는 이혼 규례의 내용은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1절)입니다. 그 당시에 결혼이란
아내를 취하여 데려오는 것이고, 이혼이란 집에서 내어 보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를 취하였는데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어 그 때문에 도저
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에 본문의 정의에 따
르면 결혼이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인데, 남편과 아내가 서로 기
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주고 집에서 내보냄
으로써 이혼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는 다른 남자와 만나서 재혼
할 수 있는 사회적인 권리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혼증서를 받은 여자가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둘
째 남편(後夫)이 그 여자를 기뻐하지 않아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된 경우나, 혹은 재
혼한 둘째 남편이 죽는 바람에 이 여자가 다시 혼자가 되었을 경우, 모세의 율법은
이 여자가 다시 첫 번째 남편(前夫)에게 돌아가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가증한 일, 즉 범죄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결혼과 이혼 재혼에 관한 다른 성경구절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본문의 모세
의 율법만 고려해서 본다면 이혼이나 재혼은 죄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이나
재혼을 죄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혼한 사람이 혼자가 되었다고 해서 다시
전 남편과 결합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모세의 율법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바
로 남자가 이혼의 사유로 삼을 수 있는 수치 되는 일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구체적으
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논쟁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이스라엘에 있는
두 가지 학파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첫째로 보수적인 샴마이학파는 수치 되는 일을 아내에게서 성적인 부정이 발견된 경우
에 국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에게서 처녀인 표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든가, 결혼
생활 중에 다른 남자들과 바람을 피워서 성적인 부정이 발견되었을 경우에 국한하여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가 조금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에게서 처녀
의 표적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 대해서는 신명기 22장 13-21절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취하여 그와 동침한 후에 그를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그에
게 누명을 씌워 가로되 내가 이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의 처녀인 표
적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그 처녀의 부모가 처녀의 처녀인 표를 얻어가지고 그 성읍
문 장로들에게로 가서 처녀의 아비가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 딸을 이 사람에게 아내
로 주었더니 그가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말하기를 내가 네 딸의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나 보라 내 딸의 처녀인 표적이 이것이라 하고 그 부모가 그 자리
옷을 그 성읍 장로들 앞에 펼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이스라
엘 처녀에게 누명 씌움을 인하여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의 아비
에게 주고 그 여자로 그 남자의 평생에 버리지 못할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신22:13-
21).
처녀인 아내를 누명 씌어서 내쫓으려고 하는 사람은 태형과 은 일백 세겔의 벌금형을
받고 결국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남자의 말
처럼 “그 일이 참되어 그 처녀에게 처녀인 표적이 없거든 처녀를 그 아비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
을 제할지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상당히 엄하지만 이것이 모세의 율법입니다. 이
미 이와 같은 율법의 판결이 있기 때문에 여자에게 있어서 수치 되는 일이 성적인 부
정에만 국한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반면에 자유주의적인 힐렐학파는 이 수치 되는 일을 자의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게 해석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이 맛이 없다든가, 요리를 자꾸 태운다던가, 인상 쓰는 것
이 밉다든가 하는 이유까지도 모두 포함이 된다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 해
석이 옳다면 어떠한 이유라도 트집을 잡아서 아무렇게나 이혼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
다.
이처럼 우리는 샴마이학파의 보수적인 해석도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힐렐학파의 광범
위하고 자의적인 해석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수치 되는
일이란 비록 성적인 부정까지는 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결혼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
운 결정적인 결함이라고 정의해야 합니다.
제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한 부인
이 저에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이 부인은 백인과 국제결혼을 한 사람인데 내용인즉
슨, 현재 살고 있는 남편과 이혼을 해야 할지 그냥 살아야 할지를 묻는 것이었습니
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니까 자기 남편이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머리에 총을 들이대
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얼마나 곤란한 문제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이라
고 대답하시겠어요? 만약 그런 사람하고 당장 이혼하라고 답해주면 남편 되는 사람이
제 머리에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르고, 그래도 그냥 살라고 답변했다가 그 남편이 혹시
라도 총을 발사해서 그 부인이 죽게 되면 이 여자의 가족들이 나에게 쳐들어와서 당신
이 잘못 상담해준 탓에 우리 가족이 죽었다고 탓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
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고, 나도 주 안에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당신 편이고 저도 언제나 당신 편입니다. 당신이 그 남자와 계속 살아도 나는 당신의
편이 되어서 기도해 드릴 것이고, 이혼을 해도 당신의 편이 되어서 기도해 드릴 것이
니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결혼 생활 중에는 성적
인 부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
습니다.
보수파와 자유파의 이와 같은 해석에 대한 논쟁은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사람이 아무 연고
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 힐렐학파, 즉 자유주의파가 우세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이상적인 창조질서를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이상적인 질서는 이혼
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또 물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이상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왜 모세에게 이
혼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버리는 것을 허락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
지 아니하니라”(마19:8)고 대답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이상적인 질서는 그게 아
니지만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완악한 상태에서 구제하기 위해 이런 규례를
준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2. 이혼 규례의 영적인 교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와 같은 이혼규례를 통해서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
을까요?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저급(低級)한 가치보다 고급(高級) 가치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교훈
입니다. 모든 가치는 중요하지만, 가치가 충돌할 때에는 고급 가치를 취하고 저급한
가치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가치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다이아몬드와 꿀꿀이죽을 주면 돼지는 무엇을 선택할까요?
당연히 꿀꿀이죽을 먹고 다이아몬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다이아몬드와 맛있는 음식을 주고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다이아몬드
를 고를 것입니다. 사람은 가치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혼
과 재혼의 문제를 생각할 때도 무조건 이혼은 안 된다는 기준으로 사람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당시에는 어렸던 제 큰 아들에게 칼로스라는 남미 친구가 있었습니
다. 그런데 칼로스는 편모 밑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번은 칼로스의
어머니에게 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시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고향
인 남미는 카톨릭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혼을 할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망와서 산
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혼이 안되서 고향을 떠나 멀리 타국으로 이민을 와서 살
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모세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혼과 재혼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가치의 고저와 경중을
잘 판단해서 저급한 가치를 희생해서라도 고급 가치를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사실
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와 백년해로를 언약해서 그 언약을 지키는 것이 얼
마나 귀한 가치입니까? 그 언약을 깨면 마땅히 슬픔과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남
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도저히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살 수 없다
면, 남편과 아내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도저히 함께 살을 맞대고 살 수 없다고 생
각할 만큼 결정적인 흠결이 있는 경우에는 언약 준수의 의무보다 한 단계 높은 가치
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 경우에 모세는 언약 준수의 의무보다도 인간의 평생 행복 추
구권을 더 중요한 가치로 보았습니다. 비록 할 수 없이 언약을 깨뜨렸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이혼을 당한 여자에게도 이혼증
서를 줘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것은 그 여자에게도 평생 동안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세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혼을 한 후에는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혼해서 혼
자 살다가 다시 전 남편에게 돌아가서 사는 것은 괜찮지만 재혼 후에는 안 됩니다. 왜
냐하면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도의 존엄성도 지
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윤리가 개나
말 수준으로 전락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언약준수도 귀한 가
치요, 평생의 행복추구권도 귀한 가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도의 존엄성을
갖는 것도 결코 희생될 수 없는 고급 가치라는 사실은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급한 가치를 희생할지라도 고급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원리는 본문 5절에
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
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찌니라.” 갓 결혼한 남자에게 영장이 나와서 군대
에 가야 하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신혼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무조건
입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신혼을 맞은 남자에게 일 년 동안 군 입대를
면제해 주고 있습니다. 군대에 가서 국토를 방위하는 것도 중요한 가치지만 새로 장가
든 사람이 경건한 후손을 낳고 아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국토방위보다 더 귀한 고
급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6절에도 동일한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맷돌의 전부나 그 위짝만이
나 전집하지 말찌니 이는 그 생명을 전집함이니라.”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당연
히 갚아야 합니다. 빚을 갚는 것은 귀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빚을 갚게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맷돌을 모두 전당잡는다든가, 아니면 모두 전당받기는 조금 지나치다고 생
각해서 맷돌의 한 짝 만을 전당잡아서 어차피 맷돌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빚
진 사람의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이므로 피해야 합니다. 빚을 갚는 것도 중요한
가치지만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저급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고급 가치를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이며,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교훈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벌기 위
해서 주일 성수도 하지 않는 등 신앙을 멀리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부자
가 되는 것은 좋은 가치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비교하면 분명히 저급한 가치입
니다. 일시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영혼의 평화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
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치의 경중
고저(輕重高低)를 잘 분별해서 귀하고 고상한 고급 가치에 헌신해야 합니다. 고급 가
치를 위해서 때로는 저급한 가치를 희생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현실과
이상적인 질서 간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이혼이
란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인간의 현실이 타락된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완악
함을 인해서 모세가 이혼규례를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이상적인 질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 교
회와 가정은 모두 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질서를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영
역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원죄 가운데 있고, 설령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성품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옛 성품을 그대로 안고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
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현실적으로 죄 아래 있는 인간질서의 완악함을 고려해서
규례와 법과 말씀을 주십니다.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정죄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태도
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말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한 국가, 사회, 가정의 현실이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적이지 않다고 해서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자꾸 갖게 되면 그 사람의 인품이 부정
적이 됩니다. 만약 어느 교회가 완벽하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 사람이 그 교회에 등록
하게 된다면 그 교회의 완벽성은 그 사람 때문에 당연히 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사
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죄성과 문제와 이상적인 질서가 깨지는 일들이 존재하게 되
어 있습니다. 이상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이 깨졌다고 해
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가정에 문제가 있어서 이혼이나 재혼을 했다고 해도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얽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현실 상황에서 거룩함을 추구
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황과 죄 진 이후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과 하나님의 전략의 차이입니다. 마귀는 사람이 죄 짓기 전에 죄
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그 때부터 마귀는 죄 지은 사람
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죄 짓기 전에는 이상적인 질서를 주시면서 죄 짓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사
람이 연약해서 죄를 짓게 되거나 이상적인 질서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품어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우리가 있는 가정과 교회, 직장과 사회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전까지는 인간 사회에서 이상적인 것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현실 속
에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기를 소망하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
금 처한 현실 속에서 좌절하여 부패와 타락과 침륜으로 나아갈 것인지, 마음을 새롭
게 하여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이상적인 질서를 향해 나아갈 것인
지 순간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신명기 전체의 사상도 사람이 어느 상황에 처해 있든
지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한 현실이 어떻습니까? 어떤 현실이든 하나님은 정죄치 않고 여러분
을 받아 주십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 속에서 늘 마음을 새롭게 하여 거룩함과 경건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