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 법궤를 옮겨오고자 했으나 실패함
본장은 다윗이 법궤를 옮겨오고자 했으나 실패한 일을 기록한다.
[1-4절]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보내어 저희를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고자 할 때 우선 온 백성의 뜻을 모았다.
그는 모든 장수들과 의논하였고 이스라엘 회중의 뜻을 물었다. 그는 모든 백성이 그 일을 선하게 여기는 가운데 그 일을 행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모든 백성을 모았고 그들의 뜻을 물었다. 그는 백성들의 뜻을 모아 그 일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그가 이 계획이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이루기를 원하였다. 그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를 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한 것이다. 그의 계획은 신본주의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일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중시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했다.
그렇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았다가 돌려보내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궤를 들여다보므로 5만 70명이나 죽임을 당한 후, 하나님의 궤는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옮겨져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었다. 그 후 사울이 왕이 되었고 약 40년간 통치하였다(행 13:21).
사무엘상 7:2는,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20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고 기록한다. 사울의 때에도 간혹 법궤가 사용되기는 하였으나(삼상 14:18), 그것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궤는 구약시대의 성막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이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의 두 돌판이 들어 있었다(출 34:28). 그것은 법궤이며 언약궤이다. 법궤의 뚜껑은 속죄소라고 불리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궤는 법궤요 언약궤이며 속죄소로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거룩한 기구이었던 것이며, 다윗은 그것의 중요성을 알았고 그래서 그것을 다윗 성으로 모셔 오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 중심, 율법 중심, 언약 중심, 속죄의 피 중심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울의 삶과는 달랐다.
[5-8절]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할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 이름으로 일컫는 궤라.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
회중들의 동의를 얻은 다윗은 애굽의 시홀 시내 곧 유대 땅의 최남단, 가사와 브엘세바 지역에서부터 최북단 유브라데 강 접경지역인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바알라(혹은 바알레유다) 즉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했다(수 15:9, 60; 삼하 6:2).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궤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었다. 그것은 그의 정성어린 행위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기쁘고 의미있는 일을 위해 새 수레를 준비하였을 것이다.
그가 그 수레에 하나님의 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올 때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았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였다.
[9-11절]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뛰었다’는 원어(솨메투)는 ‘그들이 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였다’(BDB) 혹은 ‘소들이 넘어졌다’는 뜻이거나(KJV, NIV), ‘소들이 그것[그 법궤]을 떨어지게 하였다’는 뜻이라고 본다(아람어 탈굼역, NASB).
하나님의 법궤가 땅에 떨어지려 했던 것 같다. 그때 웃사는 손을 펴서 그 궤를 붙들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보기에는 정당한 행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해 그를 치셨고 웃사는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셨으므로 다윗은 마음이 상했고 그곳은 베레스 웃사라고 불리었다.
‘베레스 웃사’는 ‘웃사를 치심’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두려우시다. 전에 벳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보았을 때 5만 70명이 죽임을 당했었고, 이제 웃사가 궤를 붙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하셨다.
[12-14절]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 메어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하나님의 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물에 복을 내리셨다.
본장은 두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다윗은 사울과 달리 하나님의 궤를 귀중하게 여겼고 사모하였고 기뻐했다.
그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온 백성들과 함께 그렇게 하였다. 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궤를 짧은 3개월간이지만 맡아 섬겼던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 언약, 속죄를 나타내는 복된 기구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궤는 신구약성경이다.
시편 1:1-3, “복 있는 사람은 . .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우리는 성경을 귀히 여기며 읽고 듣고 믿고 행해야 한다.
둘째로, 법궤는 메어 옮겨야지 수레에 실어 옮겨서는 안 되었다.
역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두려우신 분이시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의도와 큰 열심을 가지고 좋은 일을 계획하고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들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도들을 통해 받은 바른 교리와 교훈, 즉 성경적 교훈을 지키기를 원하신다(딤후 1:13; 살후 2:15).
오늘날 배교와 타협, 포용주의, 은사주의, 세속주의 풍조가 교회에 심각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딤후 3:16).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믿고 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