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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24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하나님 / 한서노회
시작하는 말
자신의 지병을 고쳐 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한 다음에, 비로소 자신의 지병이 교만을 막아 주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은 사람은 다른사람 아닌 바울 사도였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모든 사람이 복으로 여기는건강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실은 그 간구는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버리게 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복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 자기 자신에게 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많아도, 진짜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은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설령,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복과 은혜를 안다고 해도, 그것들을 받는 방법을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또, 받았다고 해도 받은 은혜와 복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 역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사르밧의 과부 이야기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가 잘못할 때 징계하는 것은 그 자녀를 바른길로 가도록 하기 위한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상을 버리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장기간 가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바알을 비롯한 우상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종교에 의하면 땅에 내리는 축복은 주로 바알로부터 말미암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알은 자연에 제한되어 있으면서도 가나안의 풍요 다산제에 있어 중요한 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알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우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왕이 거의 우상을 숭배하고 패역한 길로 갔지만 그 가운데서도 아합의 시대는 가장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아합은 이세벧과 정략 결혼을 통해 그녀가 들여온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는 사람의 모습을 본뜬 우상이었습니다. 바알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바알이라는 용어는 신들 뿐만 아니라 인간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소유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서 떠나 어긋난 길을 택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모세는 고통받는 자기 동족을 위해 애굽의 바로 왕 앞에 나섰으며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권세를 이길 능력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엘리야는 우상 숭배의 죄악에 깊이 물들어 여호와를 대적하는 아합 왕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1.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신 지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우상 숭배와 그로 인한 악행을 일삼고, 또한벼슬아치들은 임금님에게 아부, 아첨을 일삼는 와중 속에서도, 엘리야는 온갖 우상 숭배의 왕초 격인 아합 왕에게 바른말을 하곤 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리라”라고 직언을 하고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릿 시냇가로 피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그 곳에 숨은 엘리야를 까마귀들을 통해 먹이시다가 그릿 시내가 마르자, 엘리야에게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 공궤하도록 명했으니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시는 납득하기도 어렵고, 더군다나 순종하기는 더욱 힘든 것입니다. 아마 엘리야도,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가난한 과부에게 공궤하도록 지시하셨을까? 이왕이면 부자에게 공궤하도록 지시하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대접받게 하셨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2. 과부에게 도움을 요청한 엘리야
엘리야가 사르밧의 성문에 이를 때에, 나무가지를 줍는 한 과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불러 세우고는, 그릇에 물을 조금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사실상, 고대 동방지역에서는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것이 하나의 의무였으나, 이 여인의 처지에서는 그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겨우겨우 버텨 오다가 도저히 더 이상 버틸 길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조금 남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은 후에 아들과 함께 죽을 결심을 한 상태였습니다. 눈물조차 메마를 정도의 비참한 처지…그러니까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먹고 죽기 위해 나무가지를 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이웃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려고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리야는 또 여인을 부르고는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 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여인에게는 참으로 기가 막힌 부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보세요, 누굴 약올리나? 남의 사정 모르면 가만히나 있지. …복장을 보니 하나님의 종 같은데… 라고 할만도 한데, 그러는 대신에 자기의 사정만 설명하였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움쿰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그런 말을 듣고도 부탁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오히려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 털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엘리야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두려워말고,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하셨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나? 더구나 하나님의 사자이면서, 지극히 가난한 모자가 마지막으로 만들어 먹고 죽겠다는데, 바로 그 음식을 먼저 먹겠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몰인정, 이런 몰상식이 어디 있습니까? 먼저 대접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런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만일에 요즈음에 어떤 목사가 그랬다면, 교회에서 당장 쫓겨날 판입니다.
자, 우리 생각을 조금 바꿔 보십시다. 인정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요구를 할 때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보통 사람도 아닌 하나님의 사자가 온갖 욕과 비난을 무릅쓰고 억지 요구를 할 때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참 목자는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순종하는 목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목자는 인정상, 이치상 아무리 사람의 말이 옳은 것 같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고 따르는 목사입니다. 예레미야 "3:15에 보면,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바로 이 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3. 눈물겨운 결단
여인은 정말 눈물겨운 결단을 하였습니다. 에라, 이왕 죽을 텐데, 한조각 먹고 죽나 반 조각 먹고 죽나 마찬가지지. 또, 안 먹고 죽으면 어떠랴?이왕 죽을 바에야 인심이나 한 번 쓰고 죽자. 죽는 마당에 하나님의 사자나 공궤하고 죽자. 여인은 결단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자의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이 과부는 지극히 가난했지만, 그러나 선행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4:18에 보면,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자를 대접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대단히 의미 있는 선행을 한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 엘리야를 대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하시기 위하여 엘리야를 앞 세우셨고, 그에게 먼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적을 통하여 체험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엘리야를 살리시기 위하여 사르밧 과부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먹어야 하는 양식이었지만 주의 종이 한 말에 순종하여 이 양식을 내 놓았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도 굶주리고 자식도 배곯아 기진한 죽음 직전의 삶 속에서 새 삶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르밧 과부에게 보이는 것은 빈 항아리 속에 한 움큼 남은 밀가루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져다 한 방울 남은 기름으로 빵을 구워 먹고 죽기 위해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여인.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절망 뿐이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성함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건강도 이젠 소용이 없었습니다. 앞으로의 시간도 이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밀가루 한 줌. 자기 자신과 아들이 먹고 나면 텅 빈 항아리 만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살아계신 기적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생명의 역사가 엘리야를 통하여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부의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곧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자신의 신세와 울며 보채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이 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을만큼 절박한 순간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사르밧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귀하게 들렸습니다. 엘리야가 한 말이 그의 결단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4.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포기하는 믿음과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하루 하루의 식사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남은 이 밀가루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뭄이 들 때에는 돈이 많아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 밀가루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포기하는 것입니다.
13절"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을 얻을려고 쫓아가다 원하는 것을 얻을지는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엘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오늘날도 엘리야에게 순종하는 이 과부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오셔서 무엇을 요구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을 것 같지만 실재적으로 그렇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마19:21-22)"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19:23)"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버리라고 하시는 것과 주님이 쓰시겠다고 달라고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옛사람은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나, 육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쓰시고자 할 때에는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 마리아는 천사가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할 때에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신앙으로 (눅1:38)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셨습니까?
성경은(빌2: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면서, (빌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포기하시고 우리를 구언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포기와 순종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은 자기를 비었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버렸고, 아들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결단한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보상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왕은 그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하여서는 그의 자존심까지도 버리지 않다가 하나님께 버린바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세속을 버리지 못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물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한 움큼의 밀가루는 그녀에게 있어서 남아있는 유일한 물질이었습니다. 이것을 주의 종의 말대로 순종하여 그 앞에 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물질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은 건강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밀가루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건강은 그녀에게 있어서 남아있는 마지막 건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건강을 주의 종을 대접하는데 썼더니 계속 그녀의 건강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은 시간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죽음을 눈 앞에 두었기에 그 시간은 인생에 있어서 매우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은 시간을 자신을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종을 대접하는데 써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주께 드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아있는 물질을 드리십시오.
남아있는 건강을 드리십시오.
남아있는 시간을 드리십시오.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신 생명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5. 엘리야를 대접한 과부가 받은 복
여인이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하였더니, 자신은 물론 엘리야와 식구가여러 날 먹었으나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엘리야도 엘리야지만, 보다 더 가난한 과부의 가정을 복 주시기 위해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엘리야를 지극히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신 것은 먹여 살리실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비와 지혜와 믿음을 가진 그 과부를 복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부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한 마지막 시험은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대접 여부였습니다.
6.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은 후의 일을 더욱 생각해야 합니다.
받은 바 은혜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의식주를 채워주시는 은혜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 상관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과 상관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와 상관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의 종과 상관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르밧 과부는 잠시 동안 이지만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걱정 근심 없이 살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병을 위하여 잊고 있었습니다.
1).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과부
엘리야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는 자녀라고는 어린아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란 대개 유일한 생의 희망인 법입니다. 과부는 지성을 다해 그 아이에게 소망을 두고 보살펴 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극심한 재난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아이가 병들어 숨이 끊어진 것입니다.
2) 과부에게 임한 고통(민 11:15; 히 6:18)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유일한 소생이었던 아들이 죽자 걷잡을 수 없는 비탄에 잠겼습니다. 그는 일찍이 오랜 가뭄으로 더 이상 먹을 것이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남은 한끼의 음식을 먹고는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의 가정에 찾아온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한끼의 먹을 것을 그에게 공궤했던 과부의 가정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람이 유숙하게 됨으로써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 버리자 그것은 과부에게 이 모든 축복과 은혜를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 정도로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3) 엘리야에게 고통을 아룀(요 11:4; 왕상 17:21-22)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은 사르밧 과부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용기마저 상실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을 엘리야 선지자에게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에나 무슨 재앙이 닥치는 것은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과부는 아이의 죽음을 자신의 죄와 연관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과부의 죄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녀는 엘리야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그의 불평은 원망과 불신앙이라기 보다는 자기가 당한 환난에 대한 탄식에 불과합니다.
4) 기도하는 엘리야(행 20:10; 눅 18:1)
자신이 거처하는 사르밧 과부의 가정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은 엘리야에게 있어서도 당혹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과부에게 죽은 아이를 달라고 하여 그 아이를 안고 거처하는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를 침상에 눕히고는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단순하지만 너무나도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아이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비록 죄로 인하여 환난을 당할지라도 주님께 구원을 위하여 호소하면 주님은 구원해 주십니다.
5) 죽은 아이가 살아남(왕상 17:22; 눅 7:15)
죽었던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 것입니다(참조, 왕상 17:22). 기도의 가치, 기도의 능력은 시간의 길이라든가 내용의 짜임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응답의 여부가 결정해 줍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아이가 살아나자 그 아이를 어미에게 주었습니다.
6) 신앙을 고백하는 과부(시 3:8; 눅 4:25-26)
죽었던 아이가 엘리야의 기도로 살아난 것을 보게 된 사르밧 과부는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왕상 17:24)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고 한 것은 이제 그 여인이 보다 확고한 신앙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바알의 고장인 시돈과 가까운 사르밧에 살던 여인이 바알을 버리고 여호와 신앙을 택하였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뿐만 아니라 죽은자를 부활로 받기도 한 여인들이 성경에는 기록되어있습니다. 히11:35
"(히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눅7:11-17 ; 왕하 4:32-37
7. 맺음말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서 은혜와 복을 뚝 떨어뜨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유용한 것을 통해서 은혜와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없어져 버린 것들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고, 남은 것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풍조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자비와 지혜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사자들을 공궤하여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과부를 위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을 위해 주님이 필요합니다.
평강교회로 보내셨습니다.
주의 종에게 부쳐주셨습니다.
출처 한서노회